[무비053] ‘장학생’ 가난을 증명해야 하는 세상에서 견뎌내는 모녀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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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학교 출신 신진작가의 주목할 만한 작업

수도권을 제외하면 (5개 대학이 포진한) 부산 정도를 제외하면 정규 4년제 영화학과가 있는 지역은 손에 꼽힐 정도다. 특정 지역의 영화제작 기반을 언급할 때, 체계적인 교수진과 전문 커리큘럼, 촬영용 기자재 등 물리적 환경을 골고루 갖춘 영화학과가 해당 지역에 존재하느냐 여부는 결정적 요소에 속한다. 하지만 근래에는 최소한 광역시나 주요 권역별로는 지역 미디어센터나 독립영화 단체들이 주최하는, 영화제작 워크숍이나 영화 만들기 교실 부류의 프로그램이 하나둘 등장해 빈자리를 메우는 중이다. 물론 여전히 부족함이 많지만, 반드시 서울의 영화과 진학을 위해 입시에 매달리지 않아도 될 최소한의 조건을 구축하려는 시도는 주목할 만하다.

그런 과정을 거쳐 지역별로 독립영화 창작이 활성화되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비슷한 시기에 지역독립영화단체들이 ‘영화학교’라는 이름으로 소규모 워크숍과 아카데미(대학) 정규과정 사이의 교육 커리큘럼을 통해 만만찮은 완성도의 단편영화들을 속속 배출하고 있다. 특히 그중에도 2019년부터 출발해 작년까지 4기를 배출한 대구영화학교 출신 감독들의 성과가 상당한 관심을 얻는 중이다. 1기 출신 감독 중 박재현, 박찬우 감독들의 차기작이 국내 유수 영화제에서 수상하면서 대구 독립영화계의 차세대로 조명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기존 선배 창작자들과 공동 작업을 통해 시너지를 이뤄내며 지역 내에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두터운 영화인 지층을 형성하는 중이다. 현재 4기까지 배출한 지역영화학교 2기 장주선 감독의 <장학생>은 그러한 흐름의 대표 격 작업이다.

대구영화학교 2기 과정을 수료한 감독은 워크숍을 통해 얻은 인적/물적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동료들 가운데서도 특히 활발한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2020년 공개한 <조의봉투>는 취업준비생인 주인공이 고등학교 친구의 장례식에 낼 부조금 액수로 갈등하는 현실 짠 내 팍팍 나는 데뷔작이었다. 이후 선보인 2021년 영화진흥위원회 숏-폼 제작지원작 <프리즈마>는 코로나19로 얼어붙은 것 같은 세상에서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모녀의 고단한 하루를 그려낸다. 일관된 정조를 유지하는 감독의 작업들 중에서도 본 작품 <장학생>은 대표작으로 꼽힐 만하다. 감독이 지속적으로 천착하는 주제인 “우리 시대 가난의 얼굴, 빈곤의 초상”을 형상화하려는 연속 프로젝트의 1단계 정점 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다.

▲영화 <장학생> 스틸이미지

◆ 머리로는 도움이 절실하지만, 가슴으로는 내켜지지 않는

고등학생인 희원은 담임교사로부터 저소득층 장학금 신청을 제안받는다. 당사자로서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당연히 반색할 것 같은데 희원의 표정은 복잡하기 그지없다. 그의 입술에선 흔쾌히 승낙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뭔가 마뜩잖은 게 있는 듯하다. 집에 돌아온 희원은 단체급식 현장에서 일하다 밤늦게 퇴근한 어머니와 하루를 결산하듯 도란도란 대화를 나눈다. 그러다 결심한 듯 어렵게 장학금 이야기를 꺼낸다. 절차 진행 관련해 뭐 도와줘야할 일 없냐는 어머니에게 희원은 자기가 다 처리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해외여행 다녀온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듯) 타국에 비해 한국의 행정관청 업무처리는 최상위권이다. 우리에겐 선망의 대상인 서구 주요국들에 비해서도 절차가 신속하고 정확한 편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익숙하지 않은 이가 관공서에 혼자 방문해 복잡한 여러 종류 서식을 떼어오는 건 두려움 가득한 경험이 될 테다. 처음 해보는 이들에겐 그 난이도가 제법 상당하기도 하다. 희원이 직면한 상황이 딱 그렇다. 요것저것 필요한 것 미리 챙겨놨던 것 같지만 주민센터 직원은 결정적인 게 빠졌다고 말한다. 아직 미성년자인 희원은 보호자인 어머니의 동행 혹은 위임장이 없이는 절차를 진행할 수 없다.

희원은 위기의 순간에 쓰라고 받아둔 비단주머니를 다급하게 풀어보듯 급히 (주6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는) 어머니의 일터를 찾는다. 관리자의 서슬과 동료들의 눈총을 염려하며 어머니가 용케 자리를 빠져나와 딸과 대면한다. 이런 일이 있다면 왜 진즉 엄마한테 요청하지 않았냐고 어머니는 일단 타박부터 늘어놓는다. 하지만 희원은 어머니가 바쁜 것 다 아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변명 아닌 변명을 꺼낸다. 그렇게 어머니와 딸의 상황 공유 이후 급하게 위임장이 작성된다. 서류를 작성할 자리가 없어 희원의 등에 서식을 올려놓고 사인을 해 가까스로 그렇게 첨부해야할 마지막 퍼즐이 마련된다.

이제 장학금 신청만 남았다고 생각하는 희원에게 담임교사는 작업이 추가로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희원이 쓴 자기소개서 내용을 손보자는 것이다. 장학금을 받기 위해 그녀의 사연을 좀 더 절박하고 애절하게 표현하자는 게 교사의 주된 요지다. 희원이 한 부모 가정 자녀라 겪는 어려움을 강조하고, 장래 희망과 꿈을 좀 더 절실하고 또렷하게 작성하는 게 점수를 받기 좋겠다는 계산이 수반된 제안이다. 하지만 희원은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그는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을 (영화 초반처럼) 다시 지어 보인다. 희원은 궁금하다. 왜 장학금을 받기 위해 자신이 또래들에 비해 얼마나 괴롭고 힘든지를 구구절절 증명해야만 하는지 말이다. 그리고 자신이 장학금을 받게 되고 나서도 (지급받은 금액이) 헛되지 않게 쓰일 거라는 기대치를 충족시켜야 한다. 희원은 선심에 따르는 요구조건을 통 받아들일 수 없다.

▲영화 <장학생> 스틸이미지

◆ 한국 사회복지제도와 행정서비스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다

현대 국가는 사회복지제도를 통해 소외계층과 사각지대를 최소화시켜 사회 내부 갈등이 격화되지 않도록 조절한다. 이를 위해 복잡하기 그지없는 현대 사회에서 ‘찾아가는 복지행정 서비스’는 필수불가결하다. 하지만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해도, 한국사회의 현실은 도움이 필요한 데 맞춤형으로 적절히 지원되기보다는, 정보가 많고 눈치가 빠른 이들이 더 잘 활용하는 측면이 여전히 두드러진다. 속된 말로 여전히 알아서 챙겨 먹는 차원에 머무는 셈이다. 희원은 사회 시스템 전반의 본질을 꿰뚫고 있지는 못할지언정 세상이 근본적으로 뭔가 문제가 있다는 통찰에는 근접한다. 힘들고 어려운 이를 돌보라고 정부가 있는 건데 왜 선심 베풀 듯 당사자가 자신을 PR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현대 한국사회에서 경제적 가난은 그저 물질적인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가난은 인간의 존엄과 자긍심을 좀먹는데 실로 탁월한 위력을 발휘하는 중이다.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들에겐 목구멍에 불이 난 듯 부족한 지원이나마 당장 절실하지만, 원조를 청하는 과정에서 이행해야 하는 온갖 시시콜콜한 증명과 근거 제출 와중에 당사자는 자신이 속한 계급적인 처지, 즉 신분을 그야말로 제대로 깨닫게 된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박탈감과 열등의식에 휩싸이는 건 물론이다. 그리고 행정업무 편의를 위해 실질적으로는 불합리한 결과를 양산하는 탁상행정은 이들을 시민으로 복귀시키려 노력하기보다는, 적당히 ‘빵과 서커스’를 제공해 불만이 폭발하는 것만 제어하는 선에서 ‘관리’ 대상으로 만들어버린다. 기초생활수급자가 애써 노동해 근로소득을 얻으면 수급 기준에서 탈락하는 게 대표적인 사례다.

주인공은 장학금 신청 때문에 엄마와 한 이불 덮고 콕 자는, 비좁기 짝이 없지만 세상에서 유일하게 안식을 제공하던 안락한 보금자리가 남의 집 월세라는 신세를 비로소 깨닫게 된다. 복지 제공의 대가로 자신의 사회적 계층과 신분이 폭로되는 현실은 양자택일로 삼기엔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에게 특히 더 가혹한 처사다. 굳이 무상급식제도를 학교에서 시행하는 것도 그런 격차가 감수성에 상처를 입히는 걸 차단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아직 국내 인식은 그런 간단한 배려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뿐만이 아니다. 지역 주민 센터에서 의지하고 도움받을 어른 한 명 없이 혼자 서류 발급을 위해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던 희원은 부모님과 함께 와 응석을 부리는 또래아이들을 보면서 열패감에 휩싸이고 만다.

경제적 빈곤은 <장학생> 이야기 전개 과정에서 주인공이 겪게 되는 온갖 수난의 출발점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영화는 도식적인 불행을 전시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는다. 누구나 대충 짐작하는 계량화된 가난을 나열하는 건 의외로 쉬운 선택이다. 하지만 <장학생>은 거기에다 추가로 사회적 불평등구조 속 하위신분의 정체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마음의 가난과 좌절의 측면이 부각된다. 영화 속에서 조금만 더 세심하고 실효성 있게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찾아가 보듬어 주는 의무를 국가와 학교는 방치하고 있다. ‘목마른 자가 우물 판다!’와 ‘가난은 나라도 어떻게 못한다!’라는 식상한 문구를 변명으로 써먹으며 책임을 다하지 않기에 일부 ‘복지 브로커’처럼 능력 순으로 찾아먹는 구조가 존속되는 것이다.

▲영화 <장학생> 스틸이미지

여기에서 발생하는 핵심적인 폐단은 복지가 시민의 정당한 권리가 아니라 시혜적 도구로 변질된다는 측면이다. 복지 수혜자를 높은 데에서 내려다보듯 측은히 여기는 행정의 태도는 상대방에겐 수치나 모욕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정작 당사자들은 깨닫지 못하지만 상대는 꿈에라도 잊지 못할 굴욕감인 것이다. 그렇게 감정의 골이 심화된다면 공동체는 붕괴되는 운명으로 치닫는다. 사회가 유지되는 정상적 구조가 무너지고 나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만 남게 될 것이다.

◆ 도식적 설정 너머 세계의 단면을 재현하고픈 욕심 많은 영화

물론 <장학생>은 묵시록적 디스토피아를 예언하는 묵시록적 영화는 아니다. 또한 집단적으로 대립하는 계급 갈등의 풍경을 구체적으로 그려내지도 않는다. 다만 이 영화는 물질적 자원 제공만으로 해소될 수 없는 빈곤의 문제를 극적 연출로 묵직하게 재현하는데 집중한다. 그렇게 재현한 영화 속 세계를 통해 관객이 현실의 일상에서 생각해볼 여지를 각인시키려 한다. 딱 거기까지를 감독 스스로 자신의 몫이라 생각하는 태도다. 그렇게 장주선 감독은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경험과 주변에서 직간접적으로 목격해온 빈곤의 풍경을 극사실주의로 묘사하는데 일정한 성과를 축적하는 중이다. 예전 초창기 작품들에서 신문 사회면을 극화한 것처럼 드러나던 투박한 측면이 어느덧 눈 녹듯 사라지고 정제되어 간다. 그렇게 점점 더 이야기의 개연성과 공감대가 확장되는 중이다.

영화는 일일이 과도하게 상세한 상황 설정이나 직설적인 대사로 진행과정을 부자연스럽게 해설하지 않는다. 대신에 효과적으로 스토리 이해를 돕는 장치들을 적극 활용한다. 감독이 주제의식을 좀 더 다양한 방법론으로 풀어낼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는 진화의 흔적이다. 은유의 문법으로 구사된 섬세한 묘사와 꼼꼼하게 마련해 둔 장치들이 곧잘 눈에 포착된다. 과거 평범한 가정의 표상이던 단란한 가족 식사 풍경은 주인공 희원의 집에서는 사치스러운 여유에 불과하다. 소분해서 냉동실에 얼려놓고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각자 해결하는 냉동 밥이 그 가족의 살림살이 여건을 표상한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깔끔한 소품 사용법이다. 단출한 가족의 겨울철 난방을 책임지는 전기장판과 ‘웃바람’이라 불리는, 창문 틈새로 스며들 듯 불어대는 바람소리 또한 직접 경험하진 않더라도 충실하게 등장인물들의 처지와 심리를 드러내는 장치로 위치한다.

▲영화 <장학생> 스틸이미지

물론 2030세대의 상대적으로 개별화된 시야와 세계관을 아쉬워하는 이들에겐, 본 작품이 여전히 현실의 재연을 넘어서는 대안 제시로 나아가지 못하는 결말에 아쉬움을 표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런 통찰은 해당 세대가 경험치를 쌓고 시행착오를 거치며 자기 세대의 시선을 정립하는 과정을 지난하게 거쳐야 완성될 측면이다. 그러니 조금 더 기다려 주는 여유가 필요한 문제일 것이다. 무엇보다 주인공 희원이 잠자리에서 ‘잘 살자’며 독백하는 장면, 위험한 세상에 무심코 나왔다가 사방에서 쫓기는 것을 형상화해 놓은 것 같은 주인공 희원의 캐릭터다.

영화는 그렇게 누군가의 마음속 상처를 격발시킨 뒤 치유의 태도로 태세를 전환한다. 그 결정적 국면마다 삶의 고단함을 온몸으로 표출하는 등장인물들의 연기는 말로 다 하지 못할 감흥에 도달한다. 모든 게 다 어찌 해결되었으니 이제 관습적 해피엔딩을 맞이하면 된다는 고정관념은 <장학생> 영화의 태도와는 까마득히 멀다. 여전히 주인공 가족에게 시차를 두고 닥쳐올 도시의 냉기를 예감하게 만드는 찰나로 귀결되는 마무리 여운이 제법 맵다. 그렇게 비수처럼 가슴에 꽂히는 스산함은 이 위력적인 영화의 결말에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다.

<작품정보>

장학생 SCHOLAR
2021|한국|드라마|27분
감독/각본/편집 장주선
출연 조예주(희원 역), 박희은(명선 역), 권민희(선생 역),
김령아(동사무소 직원1 역), 김인혜(동사무소 직원2 역),
조한탁, 김선빈(동사무소 부녀 역), 이다훈(동사무소 민원인 역),
황정선, 이효미(식당 앞 모녀 역)
PD 김태오
촬영 정수연
조감독 손현교
스크립터 박수진
미술 성광제
사운드 최지영
동시녹음 권민령
D.I 컬러플러스
제작 대구영화학교

2021 23회 대전독립영화제 연대와 유대의 초대
2021 23회 부산독립영화제 로컬투로컬
2021 22회 대구단편영화제 애플시네마 경쟁
2021 3회 서울여성독립영화제, 단편경쟁
2021 9회 인천독립영화제, 초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