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이유도 장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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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6년 음력 4월 초, 예안 고을(현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일대)이 시끄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고을의 양민 한 사람만 잘못되어도 그 처리 과정이 분분하기 마련인데, 영남 유림의 정신적 지주인 도산서원 원장이 곤장에 맞아 사망한 일이 발생했으니, 시끄럽지 않은 게 오히려 이상할 일이기는 하다. 그 처리 문제를 두고 4월 8일 회문이 돌았고, 4월 9일 도산서원 유생20여 명이 모여 도산서원에서 회의를 열었다.

이 일은 두어 달 전인 2월 초에 발생했다. 당시 도산서원 원장이었던 이유도는 안동부사와 어떤 사안을 두고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기록이 없어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개인적 송사였던 걸로 보인다. 안동부사는 자기 권력을 활용하여 이유도를 옥에 가두었고, 이렇게 되자 아무리 개인 송사라 해도 도산서원 유생들 입장에서는 가만 있을 수만도 없는 일이었다. 이유도는 이황의 형 이해의 손자로, 이황에게는 종손자였다. 이처럼 경상도 유림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데다 도산서원 원장이다 보니, 지역 유림의 행보도 바빠졌다.

결국 이 사안은 안동부에서 해결되지 못하고, 상급기관인 경상감영으로 이첩되었다. 경상감사 원탁이 직접 이 사건을 심리했다. 그는 안동부사와 이유도의 입장을 각각 들은 후, 최종적으로 이유도에게 잘못이 있다고 판결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발했다. 결과에 불만을 품은 이유도가 그만 경상감사의 면전에서 그를 모욕하는 말을 해버렸다. 화가 난 경상감사 원탁은 이유도에게 곤장을 치라 명했고, 이로 인해 며칠 뒤 이유도는 감옥에서 목숨을 잃었다. 안 그래도 위험하기 이를 데 없는 형벌인 장형을 집행하면서 감정까지 실었으니, 평생 유학자로 살았던 이유도로서는 이를 이겨낼 수는 없었다. 지난 2월 14일의 일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억울하게 여긴 아들 이암이 나섰다. 그는 왕이 있는 궁으로 직접 쳐들어가서 격쟁 상소를 올렸다. 임금이 지나가는 길을 막고 징이나 꽹과리를 치면서 그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였으니, 그의 청원이 왕에게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격쟁 상소는 대단히 엄밀한 조건 속에서만 올릴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절차를 어긴 채 상소를 올렸다는 이유로 상소 자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만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일이기 때문에 죄로 다스리지는 않는 선에서 처리가 되었다. 지난 3월 7일의 일이었다.

상소가 무위에 그치자 이암은 집안의 숙부였던 이홍중에게 부탁하여, 도내 유생들에게 통문을 돌리게 했다. 결국 4월 9일 현 경상감사의 죄를 성토하기로 의론을 모으고, 도내 유생들에게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서명을 받는 일이 진행되었다. 도산서원 원장이었던 이유도 개인의 송사였기 때문에 그의 죽음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유림의 공의를 일으키는 통문을 반대하는 입장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도산서원의 권위를 인정했던 많은 영남 유림들이 여기에 참여하면서 경상감사 원탁은 사방에서 들어오는 압력에 시달려야 했다.

이암 개인의 격쟁 상소와 달리, 유생들의 여론은 조정 입장에서도 작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조선 시대의 경우, 자신이 속한 지방관을 탄핵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된 데다, 조정에서는 이유도의 사망을 경상감사가 공권력을 행사하다가 발생한 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통문을 주도했던 이홍중은 3차례나 고신을 당하는 고초를 겪었고, 도산서원 관계자들 역시 신문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권력이라고 해서 이러한 유생들의 여론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결국 그 스스로 사직하는 모양새를 띠기는 했지만, 원탁은 억울한 마음을 가지고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1626년 발생한 이유도 장살 사건의 전모이다.

이 사건은 이념 국가로서의 조선을 설명하는 훌륭한 사례이다. 역사학자 이정철의 말에 따르면, 조선은 권력의 주체와 권위의 주체가 각기 다른 사회였다. 권력은 왕으로 대표되는 공권력의 몫이었지만, 권위는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물론 조선의 왕들은 그 권위마저 자신의 것으로 가져오고 싶었지만, 이를 위해서는 ‘권력을 떠나’ 유학의 이념을 실현하는 삶을 살아야 했다. 유학 이념에 따라 건립된 조선에서 권위는 유학 이념에 따른 수양과 실천을 통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서원은 유학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평생 수양하거나 목숨을 걸고 실천했던 사람들을 메모리얼하고 그러한 후예를 길러내기 위해 설립되었다. 향교를 넘어 조선 시대 권위의 상징이 된 이유이다. 이 때문에 서원 구성원들은 그들 스스로 권력과 떨어져서 자신을 수양하고 실천할 때 비로소 그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권위는 오로지 권력을 탐하지 않을 때만 높아지니, 어떤 권력도 수양을 일로 삼은 유생들이나 벼슬 없음을 의미하는 유학幼學이라는 신분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처사處士가 정승보다 존경받고, 평생 배움을 다했다는 의미를 가진 학생學生으로 자신을 설명하는 일이 자랑스러운 사회였다.

이유도 사건은 이 같은 권력과 권위의 싸움이었다. 물론 싸움이 되는 순간 권력은 권력을 잃고 권위 역시 권위의 손상을 가져오지만, 그 어느 쪽도 승리하지 못하는 조선 사회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는 어쩌면 조선이 500년을 갈 수 있었던 이유, 그리고 현재 한국이 그나마 이렇게라도 건강함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권력의 힘을 동원하여 권위까지 강제로 쟁취한 사회의 참혹성을 북한이라는 사회가 잘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이 추론이 그리 틀리지는 않을 터이니 말이다.

권력을 가진 자들의 속성이야 권위도 함께 갖고 싶겠지만, 조선시대의 경우 권위 그 자체는 권력을 탐하지 않아야 생기니 참으로 쉽지 않은 퍼즐이었다. 물론 지금 우리 사회가 여전히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권력을 탐하지 않고 있는지, 그래서 권위가 권력과 별개로 존재하거나 혹은 그 반대편에서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말이다. 우리 사회가 근래 그 특유의 건강함을 잃고 있다는 평가들이 나오는 배경에는 혹 이러한 이유가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