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053] ‘APART’, 경비원의 시선으로 고찰하는 한국사회 단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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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 만연한 ‘갑질’의 폐해는 어느 특정분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 거의 전 분야에서 사회적 현상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그중에서도 잊을만하면 기사화되는 대표사례가 아파트 경비원 관련 갑질 사건임을 부정하는 이는 없을 테다. 우리는 아파트, 즉 ‘공동주택’ 경비원이라 하지만 주민자치회에서 직접 고용한 ‘수위’와 경비업체 소속 ‘경비원’은 법적 신분이 제법 차이가 난다. 물론 주민들이 보기엔 똑같은 ‘을’이지만 말이다. 공식적인 업무 외에 수많은 과외업무를 마치 주민들의 ‘집사’, 심하게 말하면 ‘하인’처럼 도맡아야 한다. 이런 부정적 인식은 강남 타워팰리스부터 지방의 주공아파트까지 공통이다. 우리 사회가 경비노동자들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지 않는 한 악순환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채지희 감독의 단편영화 <APART>는 이런 아파트 경비원의 애환을 소재로 삼는다.

▲영화 ‘APART’ 스틸사진

한국 독립영화에서 아파트 경비원 갑질 문제를 다루는 작품은 이제 결코 드물지 않다. 잊을만하면 터지곤 하는 첨예한 쟁점이다 보니 영화의 표현수위나 정서적 충격도 점점 더 강도가 세지는 상황이다. (물론 인터넷을 검색하면 나오는 실제 경비원 갑질 사례는 그 내용이 우리의 상상을 가뿐히 초월한다) 그런 일련의 흐름 가운데 후발주자에 속하는 <APART>는 어떤 차별성을 제시할 것인가. 호기심을 더해 작품을 보기 시작한다.

◆ 작은 아파트 단지 경비원이 겪는 사건사고의 시간

오래된 복도식 주공아파트의 외관은 낡았지만, 가로수가 제법 풍성하게 녹음을 이룬다. 온갖 휘황찬란한 외래어 이름이 붙은 신축 아파트 단지들에 비하면 꽤나 낭만적으로 묘사되기 좋은 풍경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곳 또한 주인공 경비원에게 만만한 곳은 못된다. 영화의 초반은 우리도 어림짐작할 경비원의 초과근무와 감정노동의 순간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한건 한건은 떼어놓고 보면 그렇게 극단적인 갑질은 아니다. 하지만 노령의 경비원 한명에게 단지 전체가 하나씩 둘씩 요구하는 일들이 쌓여 가면 금방 눈덩이처럼 쌓여가기 마련이다. 고령의 경비원이 지치는 건 금방이다.

▲영화 ‘APART’ 스틸사진

주인공은 빗자루로 낙엽을 쓸고 마대자루에 담는다. 그 노동의 풍경이 별로 힘들게 보이지 않는다면 그가 처리해야 할 업무에 무관심한 것뿐이다. 부감 샷으로 서서히 카메라가 위로 올라가자 드넓은 아파트 단지 주차장에 가득 널린 낙엽과 작은 점이 되어버린 경비원의 상황이 한눈에 실감된다. 이 영화가 나온 이후 한참 지나 홀로 마대자루 수백 개에 해당하는 낙엽을 치운 뒤 과로로 사망한 경비원 사례가 뉴스에 났던 게 새삼 실감나는 순간이다. 겨우 정리를 마치고 관리실로 돌아오니 전화벨이 울린다. 택배를 가져다주면 안 되겠냐는 공손한 협박전화다. 쓰레기 분리수거장도 살펴봐야 하고 어린이집 차량 통학도 만일의 사고를 대비해 체크해야 한다. 안내문과 공고도 부착하고 온갖 민원에 일일이 대응해야 한다. 주민대표 회의에 참석하면 늘 질책당하는 게 일과다.

주민들의 민원과 항의는 실로 다양하지만, 최근 가장 심각해진 건 1002호에 혼자 사는 할머니가 반려동물을 키우는 문제다. 할머니가 기르는 개들은 야밤에 요란하게 짖어대곤 한다. 주민들은 서로 아옹다옹하면서도 비사교적이고 의지할 데 없는 이 할머니에게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데엔 의견이 드물게 일치한다. 주민대표회의에서 대표자들은 주인공에게 반려동물 문제를 해결하라고 종용한다. 찾아가 민원이 많다는 상황을 전달하지만, 할머니는 막무가내다. 화가 난 주인공은 자신이 당했던 설움이 할머니 때문이란 생각에 순간 화가 나 거칠게 윽박지른다. 그리고 얼마 후 사건이 터진다.

◆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속 시대의 우울을 담아내다

영화는 주인공인 아파트 경비원에게 극단적인 감정노동의 누적이 점점 스트레스로 쌓여가는 걸 켜켜이 묘사한다. 혹시나 저러다 실제 일어났던 신문 사회면 보도처럼 극단적 선택을 하는 건 아닐까 보면서도 조마조마해할 관객들이 생길 법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빤한 전개로 안일하게 빠지지 않는다. 자극적 소재로 관련 사안을 ‘소비’하기는 상대적으로 쉽다. 적지 않은 한국 독립영화가 화제성을 노리거나, 사회문제를 다루기 위해 민감한 소재에 도전하지만 ‘불행 포르노’에 그치곤 하는 광경은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다. 그러나 다행히 <APART>는 그런 유혹을 가뿐히 뛰어넘는다.

▲영화 ‘APART’ 스틸사진

영화는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우리의 사소한 무관심과 각자의 이기심이 누적되면서 생기는 ‘타인의 고통’을, (그조차 주민 일반이 아니라) 아파트 경비원에게 강요된 위탁업무를 안기듯 응시하게 만든다. 착잡한 표정의 경비원만이, 본인 역시 의도치 않게 일정부분 영향을 끼친 비극적 상황에 대해 책임을 느끼며 고통스러워할 뿐이다. 하지만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경비원은 자신에게 주어진 보잘것없는 일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의 울분을 가라앉혀야 한다. 만약 그가 주민대표나 다른 주민들에게 즉자적인 분노와 폭발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다면 객석에 앉은 관객은 통쾌하고 짜릿하겠지만 그건 현실에 대한 공분이 아니라 대리만족에 불과하다. 그저 편안하게 푹신한 극장 좌석에 앉아 3자의 입장에서 관전하는 관객의 품평은 영화 속 인물들에겐 배부른 소리, 사치스러운 환상일 뿐이다.

▲영화 ‘APART’ 스틸사진

이 영화가 유사한 소재의 작품들과 차별성을 띠는 점이 바로 그런 통찰에 있다. 감독은 ‘아파트 민족’으로 태어나 자랐을 것이다. 대도시의 무수한 2030세대는 이제 아파트가 고향이다. 어릴 적 추억 역시 반경 1km 이내, 아파트 단지와 그 일대로 한정된다. 과거의 부족 영역에 다름이 아닌 것이다. 그렇게 세대를 거듭하면서 아파트 민족은 단지 안과 밖을 나누고, 단지 내에서도 자가와 임대를 구분하고, 주차장을 놓고 내전을 벌이는 게 당연시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영화 속 아파트는 지금처럼 이웃집이 층간소음 분쟁 상대 말고는 별다른 유대감을 갖기 힘든 신형이 아니라 복도 형태 구축이지만 세대가 바뀌면서 과거에 이웃끼리 옥신각신하더라도 필요할 땐 도움을 주고받던 전통은 사라진 지 오래다. 대신에 새로운 사회현상을 반영하듯 무선 이어폰 등 휴대용 전자기기의 소음과 폐해, 나의 캣맘 활동은 되고 타인의 반려동물은 불가하다는 아전인수가 변화된 세태의 단면을 그려낸다.

감독은 유년시절의 개인적 체험을 일정부분 영화에 녹여내는 것과 함께, 그저 뉴스 사회면을 시각화하는 형태의 습작들과는 차별화된 지형도를 펼쳐 보이는 데 일정부분 성공해낸다. 작품 속에서 반복되는 “남의 사정까지 알아야 되느냐!”는 대사는 곧 작품의 주제의식을 담은 메시지로 울림을 던진다. 주인공이 간혹 드러내는 퉁명스러운 언행은 결코 그가 매몰차거나 몰인정해서가 아니다. 아파트 경비원이라면 연상되는 특정한 이미지, 일평생 고된 노동으로 가족을 부양하고 성장에 한몫했지만, 은퇴 후에도 노동을 멈추지 못하는 고령세대의 초상이다. 노동인권과 공정한 처우를 제기하면 고령자 일자리가 기계나 젊은 층으로 대체될 게 두렵기에 제대로 권리를 주장하지도 못한다.

▲영화 ‘APART’ 스틸사진

주인공(과 그가 속한 세대들)은 헌신적인 부양과 돌봄으로 자녀들을 키워 독립시켰지만, 그들의 윗세대와는 다르게 후손들의 보살핌은 받지 못하는 처지다. 그렇다고 국가의 부양책임도 충분하지 못하다. 오히려 근래 대중교통 무임승차제도 논란처럼 젊은 세대에게 부담을 강요하는 빌런 취급이다. 그런 과도기의 희생양으로서 주인공의 면모는 그가 근무하지 않는 시간의 일상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아파트 경비원이 아니라 이웃으로 1002호 할머니를 만났다면 오히려 실버세대 판타지 같은 이야기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쓸데없는 상상을 해본다.

◆ 지역사회 협력에 힘입어 완성도를 갖추다

영화는 로컬 독립영화의 미덕을 꽤나 충실하게 갖췄다. 이제는 재개발로 사라진 달서구 00주공아파트단지 관계자들의 협조로 촬영 장소를 확보한 덕분에 게릴라 촬영이 아니라 안정되게 아파트단지를 배경으로 담을 수 있었다. 영화 속 아파트 주민들은 몰인정한 편이지만 실제 주민들은 정반대였던 셈이다. 저예산 지역 독립단편영화 제작에 든든한 원군이 되어준 00아파트 덕분에 <APART>가 완성될 수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다. 영화 소재를 안다면 흔쾌히 자기네 아파트를 촬영현장으로 내어주기 꺼림칙할 수도 있는 건이라 더 돋보이는 지점이다. 게다가 조연배우 대부분을 (대구 독립영화 캐스팅의 든든한 우군인) 지역 연극계에서 충원할 수 있었다. 덕분에 (속칭 ‘사투리’라 불리는) 지역 향토 말 구사가 꽤나 찰진 편이다.

주인공인 아파트 경비원 역을 맡은 박경용 배우는 그저 무기력한 피해자도, 비현실적 배짱을 부릴 수 있는 용자도 아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는 지극히 현실적인 ‘을’의 초상을 실감나게 재현한다. 초로에 접어드는 그 나이대라면 대개 산전수전 다 겪으며 일생을 보냈을 테다. 그런 주인공은 극중에서 평균적인 아파트 경비원들보다 조금은 꼬장꼬장하게 표현된다. 오히려 대한민국 아파트 경비원 평균치보다는 꽤나 자존심도 강하고 결코 고분고분하게 납작 엎드리진 않는 고집스러움도 곧잘 드러낸다. 그의 이전 경력이 영화 속에서 공개되진 않지만, 결코 만만해 보이지 않는 내력이 느껴진다. 하지만 결국 근본 모순에는 대응할 수 없는 무력감을 깊숙하게 체화한 존재다.

▲영화 ‘APART’ 스틸사진

주민자치회 대표 역할로 밉상스럽지만 그 또한 권력을 휘두르기보단 눈치 볼 데 많은 중간관리자 캐릭터인 임호준 배우와 1002호 외로운 할머니 역의 송광자 배우는 독립영화 팬들에겐 친숙하고 반가운 얼굴들이다. 경력직으로 탄탄한 경력을 쌓으며 여러 영화에서 활약한 만큼 본 작품에서도 제 몫을 다해내고 있다. 그 외엔 대부분 아마 주변에서 수소문해 출연하게 되었거나 스태프들이 돌려막기로 나섰을 테지만, 얼굴이 익지 않다 보니 더 현실 아파트 주민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APART>는 눈을 번쩍 뜨게 만드는 파격적인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여러 용도로 유용하게 활용될 만한 장점이 많은 작품에 속한다. 영화가 다루는 소재와 배경에 대해 익숙하거나 실제로 관련된 이들이 이 작품을 함께 관람할 기회가 좀 더 생기길 기대한다. 기존 독립영화 관객층의 관람 체험과는 퍽 상이한 흥미로운 풍경이 그려질 만하다.

<작품정보>

APART
2020|한국|드라마|28분
감독/각본/편집 채지희
주연 박경용(경비원 역)
출연 임호준(아파트 회장 역), 전병덕(교대 경비원 역), 신동호(이용원 주인 역),
이미정(주민1 역), 최영주(주민2 역), 권경훈(주민3 역), 채종규(주민4 역),
송광자(1106호 할머니 역), 정예진(여고생 역), 안세빈(소녀 역),
정민준(남학생 역), 송애린(여학생 역), 한혜지(딸 목소리 역)
촬영 장자목
PD 우원철, 김건희
조감독 정민우
음악 정민우, 김태웅, 전상모
미술 하윤우
사운드 신승호
스크립터 김주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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