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053] ‘수능을 치려면’ 좀비보다 무서운 입시의 나라

10:36
Voiced by Amazon Polly

◆ 2023년 11월 셋째 목요일이 다가온다!

2024년도 대입수학능력시험(이하 ‘수능’)이 2023년 11월 16일에 치러질 예정이니 이제 100일도 채 남지 않았다. ‘수능 백일전야’ 한계선을 돌파해버린 것이다. 학령인구 감소를 우려하거나 말거나 여전히 전국 수십만 수험생에다, 1년 내내 기침소리도 마음대로 못 내면서 고3 눈치를 보느라 노심초사했을 가족까지 더하면 물경 수백만이 오직 이날을 위해 숨죽이며 살아왔다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다. 1994년에 수능이 처음 실시되었으니, 올해로 벌써 30주년을 맞이한 셈이다. 한 세대 사이클을 충족했으니 나름대로 역사적 순간인 셈이다.

▲2019학년도 수능이 치러지던 2018년 11월 15일 오전, 한 여고 후보들이 선배들의 응원하고 있다. (사진=이희훈 오마이뉴스 기자)

하지만 그 누구도 수능도입 30주년을 축하해 줄 생각은 없어 보인다. 처음 제도가 실시될 당시에는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입시지옥을 조금이나마 완화할 수 있지 않을까 일말의 기대가 있었겠지만, 신기루처럼 사라진 지 오래다. 애초에 대학 진학여부, 아니 대학 간판으로 통칭하는 학벌 서열을 획득하는 행위에 전 사회적 관심과 자원이 총동원되는 한국사회 기형적인 구조를 전복시키지 않는 다음에야 아무리 이상적인 제도를 도입해봐야 현실은 바뀔 리 없기 때문이다. 수능 역시 숱한 혼란만 남긴 채 그저 대체할 제도를 마련하지 못해 계속 이어지는 것에 불과하다.

대학진학에 대한 욕망은 20세기 후반 한국사회 경제성장 및 중산층 확대와 정확히 궤를 함께 한다. 그 이전에도 교육을 통한 신분상승 욕구는 상당했지만, 대학입학의 문은 비좁았고 투입해야 할 가계비용 감당하기도 만만찮았기에 포기하고 말거나 혹은 가족 중 일부(공부를 특출하게 잘하거나 오히려 더 결정적으로는 아들, 특히 순번 상 장남)에게 기회를 몰아주는 식으로 (선택과 집중 방식으로) 결정되곤 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집권한 정부들은 각자의 이해관계와 당대 사회적 분위기가 맞물리면서 대학의 양적 팽창을 주도했다. 특히 1990년대 김영삼 정부의 ‘대학설립준칙주의’, 쉽게 말해 대학 정원 확대와 폭넓은 설립 허용은 순식간에 대학교 숫자를 기하급수적으로 팽창시켰다. 그 결과 유래를 찾기 힘든 대학진학률을 가진 나라가 탄생한다.

하지만 동일연령대 대비 세계 최고점의 대학진학인구(70%대)를 보유함에도 누구도 행복해하지 않는다. 고등교육 접근성 확대가 처음부터 본질적인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학력자본 획득을 통한 사회적 계급 상승의 기대가 ‘우골탑’이라 불리는 교육열의 신화를 창조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작 중국 본토에선 별로 인용되지도 않는 ‘맹모삼천지교’가 부모의 당연한 의무인 양 당연시되는 풍조도 과잉 교육열의 부산물이다. ‘위장전입’을 정당화하는데 팔릴 뿐이니 말이다. ‘대학가야 사람 취급 받는다!’라는 누구라도 감히 이견을 꺼내기 힘든 전제는 현재 한국사회에서 대학 합격과 졸업장이 갖는 사회적 위상을 온전히 표상하는 셈이다.

◆ 청소년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게 용인되는 나라에서

1980년대에 이미 당대 청춘스타로 수많은 청소년들의 책상 한 쪽에 놓인 사진을 코팅한 책받침의 배경이 되었던 배우 이미연 주연의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나 속편인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 그 외에도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 반을 찾습니다>나 독립영화집단 ‘장산곶매’의 마지막 작업인 <닫힌 교문을 열며> (기이하게도 해당 영화의 결정적 장면 몇 개는 21세기 초 한국 상업영화판을 휩쓸던 ‘조폭코미디’ 시리즈의 상징 중 하나인 <두사부일체>에서 재연되기도 했다)에 이르기까지 입시지옥에 신음하는 청소년과 그들이 인질로 잡힌 학교현장을 다룬 작업이 적지 않은 사회적 파장을 만들긴 했지만 현실은 별로 바뀌지 않았다. 해마다 입시철 전후로 청소년들이 투신하는 등 극단적 선택을 하는데도 원인은 건드리지 않는다. 마치 고대의 희생제의를 보는 오싹한 기분이 들 만큼.

물론 ‘사회적 타살’ 수준으로 매년 확인되는 잔혹한 현실을 개선하고자 적지 않은 노력이 시도된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대입 문제는 이미 사회 시스템 전체의 문제가 되어버린 지 오래이니 시험제도 개선으로 해결되기란 요원한 상황이다. 어떤 식으로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듯 학벌 서열을 구분하는 작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교육계에선 수능의 현행 유지냐 입학사정관제도 확대냐 또는 수시와 정시 비율 배분으로 갑론을박이 거듭되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보다 더 심층적이고 거대한 구조개선에 달렸음은 외면되거나 간과되곤 한다. 워낙 심각한 문제이기에 전사회적인 동의 아래 ‘혁명적’으로 뒤엎거나, ‘가성비’의 한계로 더 이상은 현행 입시체계를 지속할 수 없게 되어야만 한다. 사실상 고등교육정책을 포기해버리는 ‘파국적’ 미래가 오기 전에는 근본적 변화는 불가능해 보일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세태는 당연히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며 구조화되어 구성원 전반에 내재화된다. 한국독립영화의 주 창작집단인 20-30대에게 수능은 자신은 물론 동세대적 공감이 확보될 수 있는, 역설적으로 마르지 않는 소재의 원천이다. 게다가 개별 국면은 다를지언정 위아래 세대에게도 쉽게 소통 가능한 배경이기도 하다. 하기에 다양한 방식으로 이미 입시를 소재로 다룬 무수한 작업이 탄생해 왔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명제는 한국사회에선 마치 ‘블랙홀’과 같은 대학입시로 치환된다. 문제는 빠져나올 입구인 ‘화이트홀’이 뚜렷하게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게 흔하게 시도되는 사례가 되다 보니 영화 창작에 접근하기 용이한 만큼 요구치 허들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이미 ‘클래식’의 반열에 든 고전영화들이 ‘레퍼런스’가 되었기에 후대 작품들은 자신들이 참고하거나 영향 받을 수밖에 없던 선례에 학자금 대출 마냥 빚을 지고 출발하게 된다. 당연히 이들은 끊임없이 비교당하는 운명에 처한다. <고백할거야>로 단편독립영화로는 이례적인 성공을 획득한 김선빈 감독은 신작 <수능을 치려면>에서 마침내 입시문제에 도전한다. 마치 전작의 주인공과 또래 친구들의 몇 년 후가 그려지는 듯하다. 나이가 차면서 그들이 좀 더 세상의 냉혹함과 맞닥뜨리게 된 설정이라 해도 과장이 아닐 테다.

▲영화 <수능을 치려면> [사진=호우주의보 제공]

◆ 고3 수험생, 수능 시험장을 향해 운전대를 잡다!

경상도 두메산골에서 일단의 고3 수험생들을 실은 합승차량은 정해진 순번에 따라 차례로 탑승객을 태우며 수능시험장으로 향하는 중이다. 영화 속 세상은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 속 ‘생사역’처럼) 밤에만 활동하는 좀비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수능 시험일에 직장인 출근시간이 조정되고 사회활동 전반이 통제되는 것처럼 영화 속 ‘좀비 아포칼립스’도 ‘신성한’ 수능에 감히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분위기다. 낮에는 좀비가 출몰하지 않으니 괜찮다는 발표만 믿고 합승차량 기사는 태평하게 고3 여학생들을 태우며 이동 중이다. 하지만 좀비영화의 전형적 공식처럼 안일한 전제는 금방 무너진다. 영화 속에서 좀비는 낮에도 출몰하기 시작한 것이다. 고정관념의 포로가 된, 차내의 유일한 ‘어른’인 기사는 얼마 되지도 않아 좀비의 습격에 먹이가 되고 만다.

그런데 이 상황에 반응하는 수험생들의 태도가 황당한 지경이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위기인데도 차내에 갇힌 아이들은 이러다 수능 못 치는 것 아니냐며 울고 불며 소동을 벌인다. 하지만 미성년자 청소년들에게 뾰족한 대안이 있을 리 없다. 그저 휴대전화로 가까운 경찰서에 신고하고 구조를 기다리는 게 최선으로 보인다. 하지만 인적 드문 동네라 그런지 아니면 극중 전개를 위해서인지 이들은 상식적인 대처법에는 별 관심이 없다. 대신에 각자 돌아올 답도 없건만 자신이 수능에 응시해야 할 절절한 사연을 늘어놓는다. 모두가 내 상황이 제일 절박하다며 목청을 높인다. 누구는 어차피 성적도 안 되지 않느냐, 누구는 집이 부자라서 괜찮지 않냐 등 하나마나한 소리가 이어진다.

▲영화 <수능을 치려면> [사진=호우주의보 제공]

이때 승합차 안에서도 ‘페이퍼’로 공부에 열중하던 ‘유리’가 갑자기 운전대를 잡는다. 자신은 반드시 수능에 응시해야 하고 2차 찬스(즉 재수)는 없다는 결연함과 함께. 하지만 아빠가 운전하는 것 눈대중으로 본 것뿐 유리는 운전면허 미소지자다. 아이들은 더 위험하다며 찬반논쟁을 벌이지만 다른 수도 없기에 무면허로 운전을 시작한다. 어떻게 차가 굴러가긴 한다. 그렇게 일행은 다음 태워야 할 순번인 ‘한별’을 우여곡절 끝에 픽업해 여정을 이어간다. 중간에 차가 퍼지기도 하고 좀비의 습격을 가까스로 떼어내기도 하면서 5명의 고3 수험생은 시험장으로 점점 다가간다.

◆ 장르문법과 코믹 설정 속에 담긴 세대적 발언

영화는 청춘학원물과 좀비 호러 장르를 조합하는 구성방식을 취한다. 거기에 수능시험이라는 한국사회 모순의 핵심을 갈등과 긴장의 핵심 뼈대로 세운다. 여기에다 아직 남은 빈자리는 블랙 코미디로 코어를 채워낸다. 사방에 피가 튀기고 좀비에 쫓기는데도 일행은 오직 제시간에 시험장에 도착하기 위한 목적에 우스울 만큼 맹목적이다. 각자의 사연은 다양하지만 모두 목숨을 걸더라도 오늘 수능을 치러야 한다는 합의만은 추호의 이견도 없이 단단하다. 하기야 누가 1년 더 그 압박감을 더 견디고 싶을까. 화면 속 세상은 슬랩스틱 요절복통인데 등장인물들이나 지켜보는 관객이나 이심전심 동감일 테다.

그런 극중 인물들의 고뇌를 아마 한국 바깥에선 단순히 ‘B급 장르’ 특유의 영화적 과장으로 간주하기 십상이겠지만 동시대 한국인들이라면 온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전 사회적으로 입시지옥을 체험한 당대 한국인들이라면 좀비에 쫓기면서도 수험장에 지각할까봐, 혹시 무면허 운전 때문에 흠이 잡혀 응시 취소를 걱정하는 등장인물들의 만화경을 ‘웃프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테다. 누군가에겐 강 건너 불구경하듯 팝콘과 콜라를 준비해 낄낄 웃으며 즐길 시간 죽이기 딱 안성맞춤 소재에 불과할 테지만, 현대 한국인들에겐 감정이 저절로 이입되고 실체가 확연한 ‘현실의 공포’로 기능한다. 우리가 외국을 배경으로 한 온갖 고어-슬래셔 공포영화는 편하게 잘 봐도 한국사회를 배경 삼은 잔혹 범죄물에는 몸서리를 치는 데에는 합리적 이유가 있는 법이다.

▲영화 <수능을 치려면> [사진=호우주의보 제공]

할리우드 장르영화라면 <수능을 치려면>의 결말은 빤하다. 온갖 고초를 겪은 끝에 마침내 시험장에 도착한 일행은 후배들의 환영과 건승 기원 이벤트 속에 교문을 통과하는 장면에서 서로 수고했다며 마침표를 찍을 것이다. 여기에 혹은 약간의 서비스 컷 성격인 후일담 에필로그가 더해지는 정도로 이야기를 마칠 테다. 하지만 <수능을 치려면>의 결말은 (그 추가된 부분에 대한 밸런스 문제를 차치하고 본다면) 이 영화가 그저 ‘장르영화’라는 마법의 주문을 끼얹었기에 현실 사회문제는 도외시해도 된다는 면죄부를 ‘치트키’로 써먹을 생각이 추호도 없어 보인다.

함께 수라지옥을 헤치고 나왔지만 등장인물 각자의 운명은 다를 수밖에 없다. 시종일관 코믹한 정서로 진행되는지라 간과하기 쉽지만 이 영화 속 인물 캐릭터들은 현실의 거울반영에 충실하게 구축되어 있다. 그런 실물감각 덕분에 영화 속 현실이 종결된다 해도 관객 누구나 생존자들의 그 이후에 대해 상상을 펼치게 되는 원동력이다. 함께 사지를 헤쳐 나온 다른 친구들 비중이 휘발되어 아쉽지만 ‘유리’와 그의 가장 큰 조력자 ‘수지’의 각기 다른 마지막 표정은 우리가 현실에 직면할 때 필연적으로 취하게 될 양가적 태도를 각각 표상하는 것처럼 보인다.

김선빈 감독은 코믹한 소재와 전개를 취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사회적 소재를 리얼리즘 표현으로 묘사하는 작업으로 세간에 알려진 대구 독립영화 흐름에선 상대적으로 예외적인 경향으로 언급될 정도다. 하지만 그의 작업들은 굳이 사회적 메시지와 주제의식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작업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뚜렷이 작가의 인장을 새겨 넣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 태도는 본 작품에서도 일관되게 유지된다.

▲영화 <수능을 치려면> [사진=호우주의보 제공]

<수능을 치려면>은 감독의 오래된 무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감독 역시 수십만 명의 또래들처럼 동일하게 수능을 치렀고 무의식중에 그 시절의 억압과 압박감은 잔존해 꿈의 소재가 되어왔다. 자신을 억누르는 악몽을 떨치기 위해 감독 스스로 그 무의식의 근원에 도달하려는 시도는 개인적인 테마를 넘어 세대를 초월한 보편성에 자연스럽게 안착한다. 사회적 주제를 자신의 시각으로 해석하고 조명하려는 작가주의와, 이를 대중에게 전달하기 위한 경로로서 장르형식 문법의 조화는 동시대 독립영화 창작자 개개인에게 수능처럼 필수적인 통과의례가 될 운명이다.

◆ ‘김선빈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1단계 완성

▲영화 <돌고래 마라톤> [사진=김선빈 제공]

김선빈 감독은 2019년 자신의 첫 단편 <돌고래 마라톤>을 세상에 선보였다. (해당 작품은 영화제를 통한 ‘등단’을 달성하진 못했지만 지역의 상영회에서 몇 차례 소개된 바 있다) 취업준비생들에겐 익숙할 토익 영어 스터디에 참석하는 주인공은 6명이던 스터디 멤버가 하나둘 빠지면서 평소 과연 스터디에 관심은 있나 의심스럽던 ‘석’과 단둘이 남게 된다. 그는 ‘돌고래 마라톤’ 로고가 박힌 티셔츠만 입고 다닌다. 공부도 잘 되지 않고 석이 계속 방해만 늘어놓는지라 자포자기 심정으로 그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한 주인공은 어느새 사실인지 거짓인지 분간하기 힘든 석의 말에 빨려든다. 격한 경쟁과 이익 추구가 지배하는 스터디 룸의 소우주에서 석이 들려주는 돌고래 마라톤의 전혀 다른 세상 이야기는 기묘한 찰나의 마법처럼 주인공에게 위로와 치유를 선사한다.

감독의 다음 이야기는 현재까지 그의 이름에 따라붙는 작업 <고백할거야> (2021년)로 이어진다. 아직 동료 남학생의 고백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주인공이지만 상대의 거창한 고백 이벤트에 성실하게 답하려 고심한다. 세상의 복잡다단함에 익숙하지 않은 청소년이지만 진심을 다해 뭐든 임하고 싶다. 그 고백에 대한 답변을 전하기 위해 남학생의 집으로 향하는 길은 마치 오디세우스의 모험처럼 험난한 위기와 고비로 가득하다. 하나 둘 장애물을 돌파해 사뭇 엉뚱한 고백을 하기 위해 주인공은 필사적으로 골목길을 달린다.

<고백할거야>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감독은 코로나19 시기에 위기에 처한 독립영화 창작자를 위한 영화진흥위원회의 단편제작지원 프로젝트에 선정된 10분 내외 단편작업을 병행한다. <E:/말똥가리/사용불가 좌석이라도 앉고 싶…>가 그 작업의 결실이다. 여기에선 영화감독을 꿈꾸지만 제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학원 보조강사와 일회성 현장 스태프로 살아가는 주인공이 자신의 유일한 영화에서 주인공을 맡았던 배우와 촬영현장에서 재회하는 상황이 그려진다. 실은 해당 배우와 주인공은 영화를 만들면서 의기투합하고 사적인 연인 관계가 되었다 헤어진 상태다. 퀴어 로맨스와 답답한 현실 진로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인공은 하지만 현장에서 도망칠 수도 없기에 우스꽝스러운 회피행동만 반복할 뿐이지만 결국 ‘대면’의 순간은 찾아오고야 만다.

▲<소녀탐정 양수린> [사진=필름다빈 제공]

소처럼 열심히 작업하던 감독은 연달아 2편의 작업을 후속으로 선보인다. <수능을 치려면>보다 조금 빨리 세상에 나온 <소녀탐정 양수린>은 고3인 주인공 ‘양수린’이 남자친구와 함께 엄마의 외도 증거를 모으려 벌이는 탐정 활동을 코믹하게 담았다. 처음엔 분노와 복수심으로 온갖 기행을 펼치며 수사를 진행하지만 그 과정에서 엄마의 내연남과 교감은 물론, 그동안 몰랐던 엄마에 대해 알아가며 성장하는 스토리다. 그리고 <수능을 치려면>까지 10대에서 20대에 이르는 한 명의 주인공의 인생역정처럼 감독의 작업은 하나의 소우주를 형성한다. 아마 다수의 동세대 창작자들처럼 김선빈 감독 또한 영화를 통해 세상에 자신을 알리고 성공하고픈 마음이 적잖겠지만 그 출발에는 자신의 길지 않은 삶에서 가장 격동적이던 시절, 그리고 여전히 현실 진로를 모색하는 본인의 초상을 표현하려는 동기가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아직 복잡한 세상의 냉엄한 질서는 잘 모르겠지만 어찌 되건 전력으로 부딪혀 보겠다는 결의(<고백할거야>)는 이제 ‘나’의 문제만으로도 골치가 아프던 자신이 주변 사람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경로를 거쳐 (<소녀탐정 양수린>) 스스로는 어찌할 수 없는 잔인한 세상의 법칙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입시철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돌파한다. (<수능을 치려면>) 하지만 대학 간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주변의 설득과 회유는 결국 임시방편에 불과했던 것이다.

▲<E:/말똥가리/사용불가 좌석이라도 앉고 싶…> [사진=김선빈 제공]

그렇게 속아서 대학생활과 다음 수순인 취업에 매달리지만 작금의 20-30세대가 처한 상황은 기성세대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런 방황 때문에 자신을 잃어가다 회복력을 찾는 과정(<돌고래 마라톤>)을 경유해 마침내 자신이 선택한 길과 사랑,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치지 않으려는 결의의 한 순환이 (<E:/말똥가리/사용불가 좌석이라도 앉고 싶…>) 비로소 완성된 것이다. 그렇게 감독 자신의 체험을 극화한 성장담은 한 개인의 일기를 넘어 세대적인 공감대를 획득할만한 성장 서사로 구축되는 중이다.

◆ 일기장을 넘어 자기 세대를 반영하는 기록자로서 성장통의 시간

<고백할거야>는 그 위트 넘치는 분위기와 적당한 레트로 복고풍 배경 덕분에 ‘한국독립영화’의 디스토피아 풍 분위기에 질린 이들에게 적지 않은 호의적 반응을 얻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해당 작품에서도 감독의 태도는 일부에게 오해받는 것과 별개로 현실도피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감독의 작업 본령이라 할, (본인의 경험을 반영한) 극중 주인공의 도전을 응원하고 고난을 위로하는 태도는 현실의 딜레마를 보다 깊게 구현하면서 점점 차갑고 잔인한 세계와 영화 속 현실이 근접되도록 이끌어간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감독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인식된 성공작 <고백할거야>의 재기발랄한 기운은 얼핏 헐겁고 산만해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수능을 치려면>은 돌파구로서 장르문법을 적극 도입하는 시도가 돋보이지만 좀비 호러 스타일의 법칙을 놓고 보면 허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무래도 장르영화 경력이 일천하기 때문일 테다. 거기에 제작여건의 제약이 더해지니 좀비 장르영화 초심자의 한계는 도드라지게 티가 난다. 하지만 이런 과도기적 실험을 통과의례로 거쳐야만 단발성에 그치지 않는 작가로 숙성이 가능한 일이다.

김선빈 감독이 자신이 성공을 맛본 틀에 갇히길 경계하며 익숙하지 않은 분야에 도전하려는 태도는 응원을 받아 마땅하다. 적어도 이 감독이 자신의 영화 속 세계를 달콤한 현실도피가 아닌 동 세대가 겪고 있는 집단적 현실의 확장으로 놓으려는 태도는 이번 작품까지 놓고 보면 의심 없이 확인된 것처럼 보인다. 감독이 2023년 잇달아 선보인 작업들은 그런 모색 과정에서 실패를 두려워 않고 도전한 분투의 산물일 것이다. 하기에 본 작업에서 시도는 좋지만 다소 헐거운 감이 느껴졌던 부분에 대한 정련과 숙성은 차기작에서 판가름이 날 테다. 일단은 기대해볼 만하다.

<작품정보>

수능을 치려면 Drive with Zombies
2023 | 한국 | 극 | 27분 53초
감독/각본 김선빈
주연 이승연(유리), 유은아(수지), 안연선(미소), 정유진(아리), 김다솜(한별)
출연 최인환, 김민선, 박지수, 한서진, 한예원, 이선재, 이세령
PD 김나빈
촬영/조명/D.I 전상진
녹음 김태휘
사운드디자인 이수현
음악 이성경, 한서진
편집 원창재
미술 진현정
분장 유은희
조감독 채미영
스크립터 정수연
배급 호우주의보

2023 25회 정동진독립영화제 제작지원작, 땡그랑 동전상(관객상)
2023 11회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 초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