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053] 24회 대구단편영화제에서 이야기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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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독립영화의 네트워크 허브, 대구단편영화제

대구를 대표하는 영화축제, 대구단편영화제가 개막했다. 2000년 대구경북독립영화협회 출범과 함께 시작된 대구단편영화제는 중간에 유실되지 않고 올해로 24회를 맞았다. 타 영화제와 비교적 덜 겹치는 8월 중하순의 적절한 타이밍, 단편영화에 집중된 상영작 라인업, 매년 소개되는 단편독립영화 우수작 중간결산 기회, (타 대도시에 비해 영화 관련 인프라가 부재한) 대구 로컬 독립영화 소개창구로서 고유한 기능과 위상을 축적해 나가는 중이다.

2010년대 중반 이후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수준으로 전국적으로 주목받는 준수한 로컬 독립영화가 줄이어 탄생하고, 해당 작품의 감독들이 장편영화 연출과 극장개봉까지 도달하면서 지역 독립영화의 산파 역할을 수행하는 대구단편영화제 역시 여전히 타 지역에 비해 미약하긴 하지만 일정한 조명과 함께 예산지원 등에서 상승곡선을 그려왔다. ‘가성비’를 따지는 요즘 한국사회 분위기에 견줘보더라도 지방정부에서 1억 원 지원받아 이 정도로 성과를 내고 조명되는 행사는 흔치 않다. 정규 영화관련 교육기관이 부재한 현실에서 자신의 재능을 시험해 보려는 청년 영화인들이 수도권으로 떠나지 않고 지역 내에서 창작활동을 수행하는 것은 물론, ‘엑소더스’까진 아니라도 지역으로 귀환하는 사례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2020년 코로나19 이후로 얼어붙은 영화산업 여파로 고갈된 영화발전기금, 현 시장 체제 하에서 위축된 문화예술 지원정책 등으로 인해 2023년 대구단편영화제는 전년 대비 약 2할의 예산이 삭감된 상태로 허리띠를 졸라매고 악전고투 중이다. 평범한 가계경제도 갑자기 20% 이상 수입이 줄어들면 파탄에 직면하게 마련인데 하물며 지역 대표 영화축제가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최근 미디어에서 심심찮게 언급되는 (독립영화 지원기구의 주축인) 영화진흥위원회에 대한 현 정부의 곱지 않은 시선과 지원정책 축소라는 음울한 분위기 속에서 안 그래도 ‘사람을 갈아 넣는다!’ 표현이 심심찮게 등장할 만큼 평소에도 겨우 돌아가던 영화제 준비인력들의 피곤에 전 모습을 올해 영화제 안팎에서 목격할 수 있다. 그럼에도 영화제라는 틀 안에서 발견되는 지역 생산품(?!) 로컬 독립영화의 매력과 기대치는 퇴색되지 않는다.

물론 치밀한 상업적 고려와 갈고 닦은 전문가들의 솜씨로 완성된 제도권 블록버스터에 비해 저예산에 아직 경험이 짧은 청년세대 영화인들이 만든 영화들은 투박하고 설익었다는 편견에 시달리곤 한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상업영화가 감히 시도하길 망설이는 다양한 표현과 소재 구사는 물론 주요 창작계층인 청년세대의 초상이 담긴 사회학적 자료로서도 로컬 독립영화의 매력은 그냥 지나치기엔 그 매력이 만만치 않다.

◆ 지역을 떠나는 게 아니라 유입되는 청년세대의 초상, <처음>

▲영화 <처음> 스틸 사진

대개 수도권이 아닌 ‘지역’에서 청년세대는 희망 없는 일상을 보내거나 언제고 떠날 기회만 찾는 존재로 설정된다. 하지만 절대량으로 해당 경우가 더 많은 게 사실이라도 일방적이지만은 않다. 특히 웬만한 대기업이나 산업공단 못지않게 한국사회에선 대학교나 군부대 주둔지가 ‘지방소멸’을 억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대구경북 지역사회에서 대학교의 효능은 결코 작지 않은 몫이다. <처음>의 주인공 역시 서울에서 다니던 대학을 자퇴하고 대구지역 대학으로 옮겨온 경우다. 한때 ‘교육도시’ 소리를 들을 정도로 대학 밀집도가 높은 대구와 경산 등 인근지역에서 어렵잖게 볼 수 있는 사례다. 그런데 어떤 사연을 품고 남들 기 쓰고 서울로 진입하려 애쓸 때 주인공은 굳이 ‘지역’으로 내려오게 된 걸까? 그 배경이 영화의 출발점이자 궁금증을 유발하는 결정적 요소로 작용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수하는 버스터미널에 내려 배낭을 메고 트렁크를 끌며 목적지로 향한다. 그가 도착한 곳은 대학가, 어지간히 급하게 내려온 건지 그는 아직 따로 거처도 마련하지 못한 상태다. 당장 짐을 풀고 잠을 잘 곳을 구하기 위해 수하는 부동산 사무실 바깥에 잔뜩 붙어 있는 임대매물을 살펴본다. 마침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으로 타이밍을 포착한 부동산업자가 그런 주인공을 사무실 안으로 들인다. 순진한 학생에게 부실매물을 떠넘기는 청춘잔혹사의 시작인가 싶지만 다행히 얼렁뚱땅 전개이긴 해도 부동산업자는 수하에게 제대로 방을 구해준다. 예정보다는 꽤나 비싼 월세 방이지만 창문이 두 개나 달려서 기분이 좋다. 수하는 이것저것 필요한 물품을 구하러 자취생의 영원한 친구, 다이소 매장을 찾는다.

이것저것 잔뜩 사들고 나온 수하는 어느 카페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곳에는 만리타향에서 수하가 유일하게 안면이 있는 선배 은재가 아르바이트 중이다. 은재와의 대화를 통해 수하가 서울에서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대구로 학교를 옮겨 내일 개강이라는 정보를 관객은 접하게 된다. 수하는 그냥 오기 좀 그랬다며 다이소에서 구입한 작은 선물을 내민다. 오랜만에 만난 선배와 함께 첫날을 보내고 싶지만 은재는 밤늦게야 일이 끝난다고 한다. 아쉬움을 품은 채 수하는 방으로 돌아와 이것저것 짐 정리를 한다.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열어보니 옆집 이웃이 벽간소음 주의를 신경질적으로 주문한다. 수하는 뒤숭숭한 첫날밤을 맞이하지만 그래도 낙관적으로 새로운 ‘처음’에 잘 적응하겠다고 다짐한다.

◆ 설레고 불안한 첫 느낌을 급속 동결하려는 영화적 욕망

이 영화의 제목은 곧 이야기의 경로와 범주를 규정한다. 주인공은 낯선 공간에서 완전히 새로운 출발의 첫날을 맞이한다. <처음>의 한글제목은 ‘처음’, 영문제목은 ‘replay’다. 한글제목이 보편적이고 넓은 범위를 소화한다면, 영문제목은 보다 직설적이고 작품이 커버하려는 영역을 명확히 정리하는 기능을 담당해 역할분담을 구체화한다. 선배와의 대화를 통해 관객은 수하의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할 수 있지만, 그가 왜 잘 다니던 인-서울 대학을 자퇴하고 멀리 대구까지 내려오게 되었는지는 따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런 해설과 서사 대신에 이 단편영화는 오롯이 주인공의 (모종의 결심에 의한) 새 출발로서 ‘처음’이라는 순간을 화면 한가득 재현하는데 집중한다. 선택과 집중이 확실하게 전해지는 태도다. 관객 누구나 낯선 환경에서 (자신의 의지로 결행했다 해도) 겪게 되는 첫날은 두렵고 당황스러운 법이다. 모든 상황을 온전히 홀로 감당해야 하는 순간,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나만의 감정 선 표현을 극대화하는데 영화를 만든 이들은 승부수를 던진다. 나머지 세세한 묘사나 현실세태 반영 같은 건 부차적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의 태도는 확고하고 단호하다.

주인공에 대해 관객은 그가 어떤 연유로 무모한 도전을 감행하는지 추리하겠지만 그런 추적자의 태도를 취할수록 본 작품의 온전한 소화와는 점점 동떨어질 뿐이다. 대신 주인공이 두리번거리며 모든 게 낯설고 새로운 풍경을 마치 눈으로 온전히 저장하려는 듯 골똘히 응시하는 순간, 주변 모든 것을 관찰하며 호기심에 취하는 찰나를 바로 곁에서 함께 체험하듯 느끼고 지각하면 족할 일이다. 거기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파악하려 든다면 궤도를 이탈하고 말 테다.

<처음>이라는 단편영화를 소화하기 위해 복잡한 생각은 굳이 할 필요가 없다. 영화는 어떤 감각, 그리고 특정한 이미지를 재현하는 데에 모든 걸 걸고 있다. 제작진이 머릿속으로 그려내던 최초의 청사진, 그 온전한 구현에 승부수를 던지려 한다. 영화 속 세계는 얼핏 3월과 9월 초에 우리가 대학가 근방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는 흔하디흔한 풍경에 불과하지만, 주인공 수하의 겁먹은 사슴 같은 두 눈이 향하는 건너편에 과연 무엇이 자리하고 있을까 주목하는 순간 상상력은 무한 개방되기 시작한다. 관객은 구체적으로 인지하지는 못하더라도 주인공과 함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보태게 될 테다. 그리고 관객은 어느 순간 문득 어렴풋하게 주인공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은 심정이 된다.

수하는 어떤 중대한 결심을 실행에 옮겼다. 이를 위해 아마 부모나 주변에서 권장해 왔던 인생의 안정된 진로를 생애 최초로 이탈해 생경한 미지의 세계로 탈주했을 것이다. 주인공의 결단에 관한 배경에 관해 관객은 몇 가지 상상의 날개를 펼칠법하다. 어떤 추정이건 가능하지만 굳이 정답을 찾을 필요는 없어 보인다. 다만 그의 결단과 도전이 큰 암초를 만나지 않고 순탄하게 흘러가기를, 그리고 원하는 것을 달성할 수 있기를 응원하게 될 뿐이다.

◆ 어떤 청춘의 이미지를 구현하는 배우의 얼굴에 주목!

주인공 수하 역을 맡은 이세령 배우는 대구경북 독립영화들에서 근래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며 지역 영화판에서 주목을 한 몸에 받는 중이다. 그런 기대치 때문인지 올해 대구단편영화제 개막식 사회를 맡기도 했다. (본 칼럼에서 일전에 소개했던) 김은영 & 황영 감독의 <눈을 감고 크게 숨 쉬어>와 이다운 감독의 <민수의 정석> 같은 근작들에서 지역 청년세대의 방황하는 초상을 실감나게 재연했던 이 배우는 이번 작품에서는 정반대로 지역사회에 새로 진입한 이방인 포지션을 취한다. 지역독립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로서는 이채로운 존재감이지만, 불안한 청년세대의 초상이라는 역할모델은 동일한 셈이다.

영화 속 주인공의 연기는 아직 세계의 비정함에 치이기보다는 모든 걸 흥미로운 모험으로 여기는 청년세대의 반짝반짝 빛나던 순간을 온전히 구현한다. 낯선 풍경이 두렵긴 하지만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이루고 싶은 단호한 의지로 결행한 주인공의 도전을 응원하고 싶게 만드는 ‘두리번두리번의 미학’ 같은 깊이가 상당한 성취로 기억에 남는다. 여기에 근래 한국독립영화속 정형화된 캐릭터이자 세대적 반영이기도 한 ‘내가 제일 불행하기에’ 남의 사정엔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청년세대의 부정적 초상을 극복한 캐릭터가 신선하게 다가온다. 자기복제 수준의 정형화 대신, (자신도 비록 무엇 하나 보장된 게 없지만) 새로 입주하는 또래 학생에 대한 호기심이나 클레임을 거는 옆집 이웃과 친해지기 위해 고심하는 주인공의 태도는 한 줄기 시원한 바람처럼 괜히 관객의 마음 한구석을 여유롭게 만든다.

어느 순간 <처음>의 주인공 수하가 청춘영화의 아이콘 이미지 중 하나로 기억되는 이와이 순지의 <4월 이야기> 속 대학신입생 주인공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영화의 주인공은 추운 북쪽 홋카이도에서 따뜻한 남쪽으로 학업 때문에 이사를 왔는데 수하 역시 서울에서 대구로 새로운 학교 때문에 내려왔다. 그렇게 놓고 보면 공통점이 제법 많다. 하나 아쉬운 점이라면 <4월 이야기> 속 대학풍경의 낭만과 서점의 운치 있는 분위기에 비해 <처음>의 배경인 2023년 현실의 지역 대학가는 술집과 원룸만 가득할 뿐 서점이나 과거 대학문화의 잔향은 도무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게 수하 또는 이 영화의 문제는 아니지만.

◆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은 예전의 그곳이 아니다, <사라지는 것들>

▲영화 <사라지는 것들> 스틸 사진

<처음>이 타지에서 대구로 유입된 청년세대의 첫날을 보여준다면, <사라지는 것들> 속 주인공은 모험과 기회를 꿈꾸며 지역을 떠났다가 마음처럼 풀리지 않는 상황에 지쳐 어머니의 품처럼 고향에 귀환한 청년세대에 속한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끝내 어머니를 만나지 못하는 것처럼, 그의 기대와 고향의 사정은 같지 않다. 영화는 그런 딜레마를 소리 높여 개탄하기보다는 연민 가득한 주인공의 산책 여정으로 은유한다.

서울로 유학을 가 영화를 전공하는 수연은 소리를 채집하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 짐을 꾸려 고향 대구로 향한다. 매미소리가 절정에 오른 한여름, 한적한 교외에 위치한 수연의 본가에는 아무도 없다. 상황을 확인한 뒤 트렁크를 집에 놔둔 채 수연은 근처 천변에서 헤드폰을 낀 채 동시녹음 작업을 시도한다. 바지를 둥둥 걷고 개울에 들어간 주인공은 하염 없이 졸졸 흐르는 물과 바람의 소리를 채록하는 중이다.

그런 수연 앞에 6년 만에 보는 고향친구 경민이 나타난다. 20대 초반에 어울리는 복색을 입은 수연과 달리 경민은 공장 작업복을 입고 있다. 대학 영화과에 진학한 수연과 달리 경민은 고등학교 졸업 후로 거제 조선소에서 용접 일을 했다고 한다. 오랜만에 만난 경민과 간단한 근황을 나눈 뒤 수연은 소리 채집을 그만두고 함께 주변을 산책한다. 둘은 보이는 풍경에 깃든 옛 추억을 나누며 변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이 동네가 개발 때문에 급속하게 변해간다며 이야기를 나눈다. 둘은 천연덕스럽게 별 것 아니라는 듯 대화를 이어가지만 무심코 대화를 끼어서 듣던 관객은 툭 튀어나오는 진실에 접하면 당혹스러울 테다. 그렇게 수연과 경민은 아마 그들에겐 마지막이 될 이야기를 계속한다.

◆ 사람이 바뀌듯 공간도 변화를 거스를 수 없다는 증명

▲영화 <사라지▲영화 <사라지는 것들> 스틸 사진
는 것들> 스틸 이미지

<사라지는 것들>은 상실에 대한 이야기다. 누구나 고향을 떠날 때에는 돌아올 생각이 없지 않고서야 흔히 누구나 기대하는 정답고 그리운 풍경을 상상하는 법이다. 언제가 될 진 몰라도 ‘금의환향’이라는 고사성어가 괜히 탄생한 게 아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 거의 대부분의 경우 불가능한 꿈이다. 수연이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은 원래 한적한 시골이었지만 이곳 또한 근래 대구를 뒤덮은 재개발 열풍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아직 과거의 정취를 간직한 한적한 금호강변을 경계로 반대편에는 살풍경한 고층 아파트단지와 공사를 위한 타워크레인이 거대한 골리앗처럼 수연과 경민의 시선을 압도한다. 무더위라 공사가 중단되었는지 주변에 인적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가운데 두 친구는 동네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선문답을 나누지만 그 대화의 정취는 스산하고 애처로운 기운만 가득하다.

서울에서 자신이 원하는 소리를 찾아내는데 좌절을 겪고 오랜만에 내려온 수연은 고향을 떠날 때는 큰 꿈을 안고 정체된 고향을 지긋지긋해 했을 테다. 하지만 타향의 삶은 험난하고 그가 택한 영화의 길은 처음 꿈꾸던 것과는 달리 그리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일종의 구원을 바라며 오랜만에 장비 챙겨 돌아왔을 테다. 하지만 그런 기대 속에 되돌아온 고향 역시 남한 전체를 뒤덮은 개발 열풍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수연이 품을 들여 채록한 소리에는 온통 공사현장 가득한 굉음이 간섭해 딱히 쓸 만한 게 없는 눈치다. 물론 수연이 녹음이 아니라 영상을 기록했다 하더라도 화면 속 어디 한 구석이라도 사방 어딜 가나 곳곳에 삐죽삐죽 솟구친 콘크리트 덩어리와 강철 기둥들을 피할 순 없어 보인다.

그렇게 마치 타락한 것처럼 변모한 동네 주변 풍경은 하지만 사회학적 분석이나 데이터 해설 같은 딱딱하고 정석적인 수단과는 다른 방법론으로 관객에게 전달된다. 풀냄새로 가득하던 자연스러운 후각적 자취는 동네를 양분한 과자공장의 홈런볼 과자의 냄새로 대체된 지 오래다. 우리가 어릴 적 밤하늘을 보며 반짝반짝 빛나는 존재들이 별이라 생각하던 것들 대부분이 실은 살풍경한 쇳덩어리 인공위성이었던 것처럼, 사실은 생긴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인공적인 요소들이 마치 원래부터 자연에 존재했던 것 마냥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주변 환경의 변화 못지않게 변모한 건 수연과 경민의 관계다. 둘은 과거에 꽤나 가까운 사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6년 만에 재회한 둘은 옷차림부터 다른 세계에 속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또래 대학생들처럼 백 팩을 메고 어울리는 복색을 한 수연 vs 두툼한 작업복을 차려입은 경민, 둘의 대비는 다른 세계의 이질감으로 자연스럽게 기능한다. 함께 강변에 앉아 이것저것 근황 토크를 하면서도 수연은 경민이 자꾸만 자기 곁으로 거리를 좁히자 간격을 유지하고 일정범위 내로 들여놓길 주저한다. 하지만 조금 지나자 못내 미안한지 어색하게 손을 내밀기도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경민이 수연의 손을 잡아주지 않는다. 지극히 일상적인 관계의 미묘한 변화만으로 둘 사이의 보이지 않는 장막이 온전하게 펼쳐지는 느낌이다.

▲영화 <사라지는 것들> 스틸 사진

둘의 관계와 상황은 영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산천이 변해버린 것처럼 두 친구의 현재도 세계의 거대한 균열에 의해 나뉘어져 있다. 그 틈새는 수연의 노력으로 극복하기 불가능한 성격에 해당한다. 그 구조적 장벽 탓에 수연이 할 수 있는 건 오직 사과와 기억에 불과하다. 하지만 고작 ‘불과하다’고 하는 게 과연 옳은 태도일까. 마치 막을 수 없는 도도한 강물의 흐름처럼 <사라지는 것들> 속에는 연민과 사과의 질감이 가득하다. 지극히 은유적으로 암시되는 불가항력 상황 앞에서 관객들 또한 체념으로 자기위안을 일삼을 만하다. 우리가 소중한 것들을 떠나보내는 과정에 그저 순응해버린 건 아닌가를 영화는 집요하게 파고든다. 이 영화를 만든 이들은 마치 작품 속에서 경민이 적당한 힐책을 덧붙여 수연에게 던지던 질문처럼 다르게 생각해볼 것을 전하려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 소멸해가는 존재들에 대한 애도의 기운이 넘실대다

영화의 배경은 대구광역시에 살아도 대다수는 가볼 일 없을 가창 주변 일대다. 무심코 차를 타고 지나갈 때는 늘 단조롭고 한산해 보이는 동네다. 하지만 그 한적한 공간에도 지난 몇 년 간 우리 지역 전체를 뒤덮은 고층아파트단지 개발의 광풍이 침투한 지 오래다. 본 작품은 영화의 주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 당연한 사실을 증언하는 자료로도 2차적인 효용으로 기능한다. 흥미로운 발견 지점이 아닐 수 없다.

이 영화의 주인공 수연은 시종일관 소리의 ‘기록’이라는 행위를 시도한다. 그런 패턴을 인지하게 되면 이 영화의 종막에서 그의 녹음기에 담긴 소리를 수연이 확인하는 순간은 어떤 감흥을 구현하기 충분하다. 그리고 영화의 핵심축이라 할 경민과의 만남 직후 수연이 자신이 처한 상황 전체에 대해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선회 또한 녹음작업에 대한 그의 태도 변화로 자연스럽게 암시된다. 녹음장비를 거둬들이는 대신 옛 친구와의 산책을 선택하는 결단으로 나아가는 분기점은 눈여겨봐야 할 결정적 순간이다. 고향에서 그가 처음에 구하려던 껍데기 대신에 진정으로 간직하고 기억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 각성하고 수용하는 과정이 물 흐르듯 연결된다. 굳이 소리 높여 현실의 파국을 규탄하거나 계몽적 해설을 덧붙이지 않더라도 영화가 선보이는 잔잔한 애도와 연민의 태도를 통해 우리는 많은 것들을 갈무리할 수 있다.

최근 <지옥만세> 등의 장편개봉작에서 주역을 담당하며 브레이크 타임에 들어선 오우리 배우가 미스터리한 경민 캐릭터를 맡아 호기심을 증폭시킨다. 그의 상대이자 이야기의 주축으로 관객을 대신해 화면 속에서 변화를 목격하고 받아들이는 수연 역은 서서히 잠재력을 개화 중인 오은재 배우가 소화해낸다. 영화 내내 단 둘이서만 화면을 채우지만 주변 배경과 혼연일체 마냥 어우러지기에 그리 여백은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한 폭의 풍경사진 속에 그들의 기억투쟁을 새겨 넣은 작업으로 영화는 완성되었다.

◆ 다양한 결로 지역사회와 청년세대의 초상을 담아낸 영화들의 향연

<처음>과 <사라지는 것들>의 크레디트를 통해 흥미로운 지점을 관측할 수 있었다. 전혀 연결되거나 세계관을 공유하지는 않지만 두 영화의 제작진이 상당부분 겹치는 데다 주제의식의 표현방법론이 통하는 구석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마 품앗이 형태로 작업을 상호 지원하는 것은 물론 영화 속 이야기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토론을 거듭한 결과일 테다. 자기 세대들의 초상을 스크린에 구현하는 데 현실의 또래 집단이 실용적으로 협력한 예시인 셈이다.

영화제에서 한국 영화계의 대들보로 성장한 이들의 초기 작업을 확인하는 건 즐거운 예습이자 복습의 순간이다. 그와 함께 지역 내에서 공통의 작업으로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경쟁하는 동료 집단의 존재는 흥미로운 관찰의 대상으로 유효성을 획득한다. 아울러 그 작업의 결실에 담긴 지역의 풍경과 변천사는 더할 나위 없는 기록 자료의 가치를 지닌다. 대구단편영화제와 영화제가 소개하는 내용물에 주목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작품정보>

처음 Replay
2023 | 한국 | 극 | 21’53”
감독/편집/미술 진여온
출연 이세령(수하 역), 김도영(은재 언니 역), 신숙희(주인 아주머니 역),
손호석(부동산 사장 역), 김현진(이삿짐 가족 딸), 이효미(옆집 여자 역)
각본 권민령, 진여온
PD/촬영 권민령
조명 김만준
동시녹음 이명형
사운드/음악 장준구(루크사운드)

2023 24회 대구단편영화제 애플시네마 경쟁, 개막작

사라지는 것들 Fade Out
2022 | 한국 | 극 | 13’14”
감독/각본 권민령
출연 오은재(수연 역), 오우리(경민 역)
PD 우정아
편집/미술 진여온
촬영/조명 김만준
동시녹음 박철형
사운드 김한슬

2023 2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아시아단편 경쟁
2023 24회 대구단편영화제 애플시네마 경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