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승규의 독일생명평화기행] (4) 에베르트 재단에서 느낀 여당의 무게

허승규 녹색당 부대표의 독일생명평화기행

09:42
Voiced by Amazon Polly

[편집자 주=허승규 녹색당 부대표는 2023년 7월 2일부터 14일까지 13일 간 독일로 생명평화기행을 다녀왔다. 독일은 녹색당이 연립정부 일원으로 참여하고 있고,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도입된, 한국의 녹색당 정치인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독일 역시 최근 극우정당 지지율이 20%를 넘기도 한, 완벽한 사회는 아니다. 2주 동안 허승규 부대표가 경험한 독일의 모습과 우리 사회에 남긴 과제를 매주 연재한다.]

[허승규의 독일생명평화기행] (1) 경북 녹색당 정치인에게 독일은?
[허승규의 독일생명평화기행] (2) 프랑크푸르트 지하철역에서 만난 반려동물
[허승규의 독일생명평화기행] (3) 녹색당은 하루 아침에 집권한 게 아니다
[허승규의 독일생명평화기행] (4) 에베르트 재단에서 느낀 여당의 무게

▲베를린 장벽과 북한 대사관 [사진=허승규]

베를린 장벽과 북한 대사관을 지나다

독일녹색당 간담회를 마치고 자유시간이 생겼다. 기행 시작 이후 해가 떠 있을 때 첫 자유시간이었다. 또래 청년들과 독일의 랜드마크인 브란덴부르크문, 유대인 추모비 공원 등을 둘러보았다. 분단과 통일의 흔적인 체크포인트찰리에도 들렀다. 만약 독일에 가면 베를린에서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이 베를린 장벽이었다. (나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에 태어났다.)

베를린 장벽에서 셀카를 찍으면서 소원을 성취했다. 베를린 장벽 근처, 과거 동베를린 지역에 북한대사관이 있었다. 묘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대한민국 시민 입장에서 가장 멀고도 가까운 나라는 북한이 아닐까. 해방의 기쁨도 잠시, 38선이 그어지고, 서로 다른 체제가 수립되었다. 동족상잔의 전쟁을 마친지 70주년이 흘렀다.

한민족이라고 하지만 북한 사회는 너무나도 이질적이다. 녹색당의 정치인으로서, 현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인 복수정당을 허용하지 않는 일당독재 체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반공이데올로기로 민주주의를 억압했던 한국 권위주의 체제는 분명 극복해야할 역사지만, 세습 군주정을 닮은 휴전선 건너의 체제가 대안일 수는 없다. 진보적 가치를 자주와 통일로 좁게 해석해온 이들과 국경을 넘어 지구 뭇 생명들의 평화를 추구하는 녹색은 긴장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 헌법은 평화적 통일을 지향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통일보다 평화가 상위 가치다. 통일 그 자체는 목적이 아닌 수단이다. 한반도 평화라는 목적을 위해 정치적으로 다른 체제를 지향하는 두 개의 나라가 어떻게 평화 체제를 구축할 것인가? 우리와 국경을 마주하는 나라는 자유로운 왕래가 불가능하고, 시민사회 간 연대와 협력도 불가능하다. 소수의 집권세력과 대화를 통한 위로부터의 평화 체제 논의만 가능한 현실이다. 현실을 생각하면 답답하지만, 그럼에도 세상은 상상하고 도전하는 행동에서 변화가 시작되었다. 녹색과 평화의 한반도를 나는 언제 즈음 경험할 수 있을까?

언젠가 다가올 현실을 생각하며 담대한 상상을 품는다. 베를린 산책 이후 저녁식사를 겸해서 뮌헨 맥주를 마셨다. 독일에서 마신 맥주는 매번 맛있었지만, 뮌헨 맥주는 더욱 맛있었다. 며칠 뒤 뮌헨에서 마실 진짜 뮌헨 맥주를 기대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에서 [사진=생명평화아시아]

사회민주당의 정치재단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 방문

다음날 기행단은 사회민주당(이하 사민당)의 정치재단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이하 에베르트 재단)을 방문했다. 사민당은 현재 올라프 숄츠 총리가 속한 제1당이다. 기독교민주연합(이하 기민당)과 함께 독일의 양대 정당이다. 독일 최초의 정치재단인 에베르트 재단은 바이마르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을 지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숨지기 직전인 1925년에 설립했다. 1925년이라니! 그럼 연계정당인 사회민주당은? 무려 1875년이다! 조선에서 운요호 사건이 일어났던 그해에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독일 사회민주당이 창립했다. (독일녹색당은 1979년에 창당했다.) 선거철마다 이름을 바꾸고 이합집산하는 한국의 정당들이 생각났다. 오죽했으면 2012년에 창당된 한국녹색당이 당명을 가장 오래 써왔다. 전통과 역사의 정당과 연계된 정치재단에 들어서니 경건함이 느껴졌다.

사회민주주의는 혁명적 사회주의의 폭력성을 배격하고, 정치적 자유와 평등이 보장된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사상이다. 민주주의 체제 내에서 사회주의의 이상인 경제적 평등을 실현한다. 한국 인근에 사회주의를 추구했던(또는 말로만 내세웠던) 중국, 북한, 소련 등의 일당독재체제와 전혀 다른 모습이다.

독일 사민당도 처음부터 사회민주주의를 추구하진 않았다. 독일 제국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나치제국에서 전후 독일 사회를 거치면서, 독일 사민당은 현대 민주주의 체제의 주요 원리를 수용해왔다. 선거를 통한 정치세력 간의 자유로운 경쟁으로 권력을 얻으며, 평화적 수단에 의한 정권교체만 가능한 원리 말이다. 나아가 독일은 정당지지율 대로, 민심 그대로 의석수를 배분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까지 도입해서,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했다. 이처럼 독일 민주주의의 발전과 함께 독일 사민당도 여러 번 집권하면서 독일의 국민정당으로 거듭났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초상화 [사진=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

독일 사회민주당의 성장에는 가난한 노동자들이 차별받지 않고 평등한 교육 기회를 누릴 수 있길 바란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의 정신이 함께 했다. 에베르트 재단은 창립 초기부터 해온 장학사업과 함께, 다른 정치재단처럼 시민교육, 싱크탱크, 국제협력 사업 등의 활동을 한다. 세계 100여개 국가에 지부를 설치하여 민주주의 증진과 국제평화를 위한 활동을 해왔고, 1989년 서울에 한국사무소를 다시 열었다.

한편 1994년부터 세계 각지에서 인권 증진을 위해 탁월한 공헌을 한 개인이나 단체에게 상패와 상금 2만 유로를 주는 에베르트 인권상을 수여하고 있다. 에베르트 인권상은 2017년도 수상자로 박근혜 퇴진 촛불에 참여한 ‘한국의 1000만 촛불시민’을 선정하면서 한국 사회에 크게 알려졌다. 단체나 개인이 아닌 특정 국가의 국민이 수상자로 선정된 것은 인권상 제정 이후 처음이다. 촛불 집회에 수시로 참여했던 나를 포함해서 기행단원 모두 에베르트 인권상 수상자임을 새삼 깨달았다. 당시 촛불 정신을 매일노동뉴스에 기고했던 우리 지역 국회의원도 에베르트 인권상 수상자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 간담회 [사진=허승규]

오늘을 마주하는 여당의 소명과 내일을 준비하는 야당의 소명

에베르트 재단의 한국 담당관인 헤닝 보어셔스와 간담회를 시작했다. 그는 20년간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담당했다. 최근 독일 사회의 화두인 기후위기 대응과 에너지정의 실현에 관한 주제를 주로 나눴다. 이는 경제체제를 새롭게 전환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독일 신호등 연정은 2045년까지 탄소중립을 목표로 하며, 이를 위해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비율을 80% 달성해야 한다. 지금보다 태양광 발전은 4배, 풍력 발전은 2배로 늘려야 한다. 불과 6년 반밖에 남지 않았다. 또, 2038년까지 탈석탄 정책을 목표로 한다. 여론이 받쳐줘도 쉽지 않은 목표다. 문제는 신호등 연정의 에너지정책에 대한 여론의 지지가 단단하지 않다.

담당관은 국민들과 정책 소통의 한계를 주요 원인으로 꼽았으며, 최근 미디어 환경도 불리하다고 진단했다. 러시아발 에너지 위기로 난방비 문제가 심화되었고, 극우정당인 대안당이 급부상하고 있다. 신규 건물 건축 시 가스 난방을 규제하고 100%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는 법안이 연방의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그는 여러 번 신호등 연정의 에너지정책에 대한 어려움을 반복했다. 그럼에도 어려움 또한 집권여당이 감당해야할 과제이며, 계획이 실패하더라도 노력해야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사민당과 독립적인 재단 담당자의 발언이었지만, 집권여당인 사민당의 무게가 느껴졌다. 본인들에게 주어진 권력의 크기와 여론의 간극이 느껴지고, 언젠가 정권을 내려놓게 될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다가옴에도, 지금 주어진 정치적 과제를 헤쳐 나가야 하는 무게랄까.

어려움을 이야기하면서도, 냉소적인 느낌은 들지 않았고, 웃음과 유머를 담고 있는 담당관은 훈련된 정치인이란 인상을 주었다. 정권교체의 순간까지, 정권을 만들어준 시민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정치의 소명이다. 결과에 대한 판단은 시민들과 역사의 몫이다. 정치의 바다에서 에베르트 재단은 사민당과 한 배를 탔다.

지금 독일이 겪고 있는 위기를 제1야당인 기민당이라고 해서 잘 해결해나갈 수 있을까? 내가 기민당 지도부라면, 위기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야당 신세가 기회일 수 있겠다. 대안권력인 야당은 새로운 정책을 실제로 집행할 수 있는 ‘실행 능력’과 시민을 설득할 수 있는 ‘소통 능력’을 겸비해야 한다. 당장 준비되지 않았다면 야당 시기는 책임을 피하면서, 실력을 키울 수 있는 시기다.

나는 2018년, 2022년 녹색당 안동시의원 후보로 출마했고, 낙선했다. 낙선자보다 당선자에게 더 많은 정치적 책임과 역량이 요구된다. 2026년 지방선거까지 1010일 정도 남았다. 나를 포함한 안동녹색당의 조직적 역량은 어떠한가. 내일 당장 임기가 시작된다면, 나는 준비된 실력을 보여줄 수 있는가.

내가 속한 지역당은 기초의원 1인을 당선시키고, 당선된 기초의원의 의정활동을 뒷받침할 수 있는 조직적 역량이 있는가. 다른 지역당은 어떠한가. 남은 1010일간 해야 할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전에 2024년 국회의원 선거가 있다. 150년 역사의 독일 사민당의 고민과 내가 속한 한국녹색당의 과제를 연결하며 간담회를 마무리했다.

다음 일정은 독일녹색당의 전설적인 정치인, 위르겐 트리틴 연방의원과의 간담회다. 1954년생인 위르겐 트리틴은 독일녹색당의 창립 주역이며, 1998년 적록연정 출범 당시 환경부 장관을 역임했다. 독일의 탈핵에너지전환을 이끌었던 환경부 장관이었다. 아베 신조, 앙겔라 메르켈, 홍준표와 동갑인 위르겐 트리틴은 은퇴한 정치인이라 생각했는데, 여전히(!) 현역 연방의원이다.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대표가 여전히 국회의원이란 느낌이다. 독일녹색당의 거장과 만남을 앞두고 맛있는 점심식사를 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