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중구 이인성 화백 공간 조성···예술계, “이쾌대·이상춘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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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중구(구청장 류규하)가 추진 중인 이인성 아르스 공간 조성사업을 두고 대구 문화예술계가 반대 성명을 냈다. 일제 식민체제에 순응한 이인성만을 조명하기보다 이쾌대, 이상춘 등 동시대 지역 미술가를 함께 조명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대구시와 중구에 ▲이인성 아르스 공간 조성 사업 및 이인성 기념 사업 즉각 중단 ▲지역의 다양한 근대미술가 조사 및 기록 ▲대구 미술문화의 균형 있는 발전 정책적극 수립을 요구했다.

지난 6월 27일 중구의회는 이인성 아르스 공간 조성사업 예산안 27억 원(특별교부금 15억, 구비 12억)을 통과시켰다. 지난해 2월 중구와 이인성 화백 유족 측이 체결한 업무협약에 따라 유족이 유품 및 연구자료를 기증하면 중구가 그의 예술정신을 기리는 공간을 에코한방웰빙체험관 건물에 조성하는 사업이다.

사업은 시작부터 논란을 빚었다. 지난해 말 이인성이 일제 식민지배에 순응해 친일 활동을 했다는 의혹과 사업 타당성 부족 등을 근거로 중구의회가 예산 35억 원을 전액 삭감했다. 이후 중구청‧중구의회 간 갈등, 중구의회 의원 간 갈등으로 확산되기도 했다. (관련기사=대구 중구청-의회 다툼 시작된 ‘이인성 아르스 공간 조성사업’은? (‘23.01.03.))

▲대구 중구에 위치한 에코한방웰빙체험관. 해당 자리에 중구청은 27억 원을 들여 ‘이인성 아르스 공간 조성사업’ 을 추진하고 있다. (사진=중구청)

중구 관광과 관계자는 “12월쯤 입찰을 통해 업체 선정하고 내년 말 조성 완료 계획”이라며 “이인성 유가족 측에서 유품을 기증하기로 하면서 추진된 사업이라 다른 예술가를 함께 조명하기는 어렵다. 이인성의 친일 논란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는 걸로 안다”고 전했다.

하지만 사업 타당성을 검토하는 과정부터 예산이 확정된 지금까지도 이인성 화백의 친일 행적에 대한 의혹은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중구의회 일부 의원들은 이인성 화백의 친일 논란에 대한 공부회, 근대 역사인물 연구모임 등을 통해 지역 예술가를 종합적으로 조명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김효린 중구의원(국민의힘, 성내2·3·대신·남산2·3·4동)은 “의회 연구모임에서 이쾌대, 이상춘 등 지역 예술가를 발굴해 연구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며 “중구청은 유족회에서 적극적으로 나서니 사업을 시작했다는 입장이지만, 관이 만들어진 밥에 숟가락을 놓는 역할만 해서야 되겠냐. 필요하면 관이 적극 나서서 조명받지 못한 이들이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의회에서 자료를 만들면 그게 초석이 돼 사업에 반영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인성 회화의 향토색’이 갖는 친일 논란

이인성 화백은 1912년생 대구 출신으로, 조선총독부에서 문화통치 일환으로 추진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14회 연속 참여했고, 총독부상을 포함한 다수 수상 경력으로 ‘천재 화가’라는 명성을 쌓았다. 이정아의 논문 ‘이인성 회화의 향토색 고찰’ (성신여대 미술사학과 석사, 2008)에 따르면 일제 식민치하 일본에 의해 줄곧 요구되었던 향토색이란 개념은 조선을 개화되지 못하고 비문명화된 곳으로 인식하게 함으로써 자신들은 발전되고 우월하다는 일본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수단으로 이용됐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이인성은 일제강점기 「경주 산곡에서」, 「가을 어느날」, 「정물」 등을 그린 화가로, 1929년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 주1에 처음 입선한 뒤로 1936년까지 입선과 특선을 거듭했다.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 논문은 이인성 회화의 향토색에 대해 “많은 학자가 그의 작품에서 표현된 향토색을 민족의 정체성 확립 또는 식민지 현실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라고 평가를 내리고 있으나 그에게 있어 향토색이란 조선식 양화의 세계를 표현하는 모티브였을 뿐 한민족에 대한 애착이나 조국의 정체성을 살리는 길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고 보인다”고 평가했다.

최유경의 논문 ‘한국근대미술의 향토론의 유행과 일본의 초선무속연구’(종교와 문화 제21호, 서울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2011)도 유사한 부분을 짚는다. 이 논문은 이인성의 작품을 예로 들며 “일본의 동화정책 일환으로 개최된 조선미전에서 일본인 심사위원들의 지방색, 조선색의 요구는 고유한 조선의 특색, 전통의 표현이라는 미명 하에 내선일체, 동문동종 등의 일본의 이상을 자연스럽게 조선인들이 수용할 수 있도록 유도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예술단체들, “이쾌대, 이상춘 있는데 왜 이인성만”

5일 지역 문화예술단체들은 보도자료를 내, 대구시와 중구청에 “지역의 다양한 근대미술가를 조사하고 기록하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지역의 문화예술계는 공공기관에서 미술사적으로 일제 식민주의에 순응한 미술가로 평가받는 이인성과 관련한 사업을 지난 수십 년간 진행해 왔고, 또 이인성 기념사업을 추진한다는 점에 심히 우려를 표한다. ‘대구의 근대미술가는 이인성밖에 없는가?’, ‘왜 또 이인성인가’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공간을 조성하려면 이인성뿐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화백들을 함께 다뤄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이들은 “이인성(1912년생)과 비슷한 연배의 이쾌대(1913년생)와 이상춘(1910년생)은 대구 출신으로 한국미술사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외면당했다”며 “역사적, 사회적 관점에서 민족주의 미술을 지향한 ‘리얼리스트’ 이쾌대와 예술을 통해 민족해방과 계급해방 활동을 했던 ‘아방가르디스트’ 이상춘의 예술정신은 일제 식민체제에 순응한 이인성의 미술보다 높게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시비와 구비를 들여 식민주의 미술가를 더 기록하고 기념하는 작업을 계속 해야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문화예술단체들은 보도자료와 함께 배포한 성명문에서 “미술사적 관점에 따라 ‘미술은 현실을 초월한 순수한 심미적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모더니즘 옹호자는 이인성을, ‘미술이 현실의 모순을 반영해야 한다’는 리얼리즘 대변자는 이쾌대를, ‘미술이 현실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는 아방가르디즘 주창자는 이상춘을 각각 상대적으로 높게 평가할 것”이라고 소개했다. 이들은 “공공기관에서는 최소한 이들에게 비슷한 비중을 두고 균형 있게 지원하여 시민에게 다양한 근대미술을 경험하고 평가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이인성 아르스 공간 조성 사업’ 반대 성명에는 극단도도연극과교육연구소, 극단함께사는세상, 대구경북독립영화협회, 디카(대구현대미술연구소), 로컬포스트, 온아트, 독립언론표출지대, 현대사상연구소 등 지역 예술단체가 이름을 올렸다.

김보현 기자
bh@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