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훈련도감의 집단파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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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말은 부의 상징이었다. 양반들은 으레 말을 타고 개인 기사에 해당하는 견마잡이(견마지로를 다하겠다는 말은 여기에서 나왔다)로 하여금 말을 끌게 했다. 요즘 차라리 흔하기까지 한 외제 고급 승용차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야말로 말은 복식과 함께 양반 권위의 상징이었으며, 그만큼 비쌌다. 그런데 이 같은 고가의 말은 국가 차원에서 양반의 권위에만 동원되는 게 아니었다. 전근대 시기 가장 빠른 이동 수단이 말이었고, 이는 전쟁에서 중요한 자산이었다. 실제 이를 전술적으로 잘 활용하면 몽골처럼 세계를 제패할 수도 있었다.

전근대 시기 그래서 말은 지금의 전투기나 전략 자산들처럼 국방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이를 전술적으로 활용하려면 말을 타고 전쟁을 수행하는 기마병이 필요했고, 이들은 전근대 시기 전쟁의 핵심 전력이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 직업 군인의 편제로 만들어진 훈련도감 역시 활이나 총포 등을 다루는 병과와 더불어 말을 타고 전쟁을 수행하는 기마병을 별도로 둔 이유였다. 그런데 정조 시기인 1791년 음력 7월, 이들 기마병들을 중심으로 집단 파업 사태가 발생했다. 군인들의 파업인지라, 조정에서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조선시대 마병馬兵들은 원칙적으로 자신이 탈 말을 스스로 마련해야 하며, 유사시에는 이렇게 마련한 자신의 말을 타고 전투에 임해야 했다. 요즘처럼 군복과 생활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국가에서 보급해 주는 것과 달리, 조선시대 군역은 군에 종사하는 자신의 경제적 문제까지 포함되었다. 이 때문에 실제 군에 징집되는 정병 한 명당 그들의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는 보인 두 명을 둘 정도였다. 그런데 말은 다른 문제였다. 워낙 고가이다 보니 나라에서 받는 녹봉만으로는 말을 사서 유지하는 게 불가능했다. 요즘 관점에서 보면, 전차병이 자신의 전차를 사서 입대해야 하는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훈련도감의 기마병들은 국가의 녹봉을 받는 직업 군인들이기 때문에 이러한 녹봉을 통해 말을 사서 관리하는 게 원칙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박한 녹봉으로는 말을 마련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그러다 보니 그들은 말이 필요할 때마다 궐 밖의 직소에서 말을 가진 다른 기마병의 말을 빌리거나 세내어 활용했다. 어떤 경우에는 아예 훈련도감의 몇몇 기마병들이 돈을 모아 번을 설 때 사용할 말을 세내어 함께 사용하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상황은 군사 준비 태세 차원에서 보면 심각한 문제였다. 말 없는 기마병들을 전술적으로 활용할 수는 없으니, 그만큼 전술적 공백의 발생은 필연적이었다. 국가 차원에서 보면 기마병들이 말을 소유하지 않은 게 문제였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너무 적은 녹봉으로 인해 발생했다.

문제는 당시 이러한 사실을 모두 알고 있지만, 그 누구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래된 폐단이어서, 어떤 측면에서는 그러려니 했던 면도 있었을 터였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채제공蔡濟恭은 좀 달리 생각했다. 그는 당시 무사를 잘못 뽑아 파직된 훈련대장 조심태를 대신해 임시로 훈련도감을 관할하는 도제조를 맡았다. 그는 소문으로 들은 기마병의 실태가 어떠한지 궁금해서 초관哨官들의 우두머리인 행수초관 이인묵과 소임초관 민종혁에게 관련 조사를 맡겼다. 그런데 이들 역시 훈련도감의 초관들인지라 좌의정의 명을 거역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 스스로가 엮인 문제인 데다, 이로 인해 벌을 받게 되면 그보다 억울한 일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채제공은 다시 믿을만한 중군들에게 이 사실을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그러자 이들은 말을 빌려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적으라며 초관들에게 통문까지 돌렸다. 대부분의 초관들이 이를 거부했지만, 3명 정도의 초관이 이 사실을 모른 채 자신의 이름을 기입 했고, 이로 인해 이 3명에게 말이 없는 것처럼 드러났다. 이렇게 되자 행수초관은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초관들을 규합하여 24명 연명으로 체직해 달라는 청을 올렸다. 형식은 청하는 모양이었지만, 전문 기마병들이 다른 직으로 가겠다는 것이니 실제 집단 파업이었다. 이 보고를 받은 체제공은 적잖게 당황했고, 결국 왕에게 이 상황을 보고했다.

상황을 짐작했던 채제공 입장에서는 차마 이들에게 엄격할 수 없었던 데 반해, 군율을 중시하는 정조의 판단은 엄했다. 그는 연명한 24명 모두를 파직했다. 그리고 이 일을 주도한 행수초관 이인묵과 소임초관 민종혁, 홍장환에게는 곤장 30대를 쳐서 교동부 병사로 종군하게 했다. 비록 초관이라 해도 엘리트 군인들이었던 그들에게는 가혹한 처사였다. 그리고 나머지 21명 역시 모두 곤장 10대 씩을 때린 후 파직 조치했다. 군율이야 엄하기 마련이고, 만약 전시 상황이었다면 사형에 해당할 수 있는 죄이니 할 말은 없었다. 이렇게 훈련도감 소속 기마병들은 집단 파업으로 인해 벌을 받았고, 훈련도감에는 기마병 공석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이를 기록한 노상추 역시 원칙을 중시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런 그의 눈에도 이번 처사는 문제가 많았다. 이 사태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말을 사서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하게 급여를 주지 않은 조정이었기 때문이다. 군율을 잡는다고 기마병 문제가 해결될 수 없는 이유이다. 게다가 당시 최고의 군율을 유지하고 있었던 훈련도감마저 이러한 상황이니, 다른 곳의 기마병은 어떨지 말할 필요도 없을 듯하다. 국방의 문제는 국가가 책임져야 하고, 그러한 책임을 위해 국가 차원에서 해야 할 의무 역시 분명하다. 그런데 국가가 국가의 의무를 잊은 채 그 의무를 백성에게 돌리면, 그로 인해 발생하는 일은 사안만 다를 뿐 행태는 늘 같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