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교협 시사 칼럼] 용왕과 자라의 최후 / 서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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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를 알 수 없는 고전소설 <토끼전>에는 각기 다른 욕망을 추구하는 토끼·자라·용왕이 등장한다. 이 가운데 용왕은 강력한 욕망의 소유자로 제시되어 있다. 용왕이 토끼의 간을 구하고자 한 것은 최고 통치자로서 지위를 지속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조선 시대 서울에서 목판으로 간행된 <토끼전>의 이본(異本, version)인 <토생전>에 등장하는 용왕은 2,000살에 가까운 나이에 1,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통치자로 군림한 존재로 제시되어 있다.

1913년 유일서관이 발간한 <토끼전>의 또 다른 이본인 <불로초(不老草)>라는 작품에는 용왕이 오랜 기간 술과 여색을 너무 탐했기에 병이 든 것으로 제시되어 있다. 이처럼 <토끼전>에서 용왕은 오랜 기간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는 삶을 영위하고도 더욱더 그와 같은 삶을 지속하려는 인물로 제시되어 있다. 용왕이 토끼의 간을 먹겠다는 것은 타인의 희생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용왕과 마찬가지로 자라 역시 그릇된 욕망의 소유자로 제시되어 있다. 용왕이 토끼 간을 구한다는 소식을 접한 자라는 자발적으로 토끼를 데리러 육지로 가겠다고 나선다. 자라의 행위는 자신의 지위를 좀 더 상승하고 싶었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라의 욕망은 <토끼전>의 또 다른 이본 가운데 조선 시대 전주에서 목판으로 간행된 <퇴별가>에서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용왕이 자신의 병을 치료할 토끼 간을 구하러 갈 신하를 찾을 때 대부분의 신하는 용왕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러나 부와 명예에 대한 욕망이 강했던 자라는 아내와 모친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발적으로 육지로 가서 토끼를 용궁으로 데리고 온다. 자라에게 자신의 욕망은 역시 타인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으로 용왕의 욕망과도 맞물려있다.

<토끼전>의 주인공인 토끼에게도 욕망은 있다. 토끼가 자라의 감언이설에 설득된 것은 토끼의 잠재되어 있던 욕망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토끼는 산중에서의 삶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자라의 끊임없는 유혹에 토끼는 설득당하고 만다. 토끼가 벼슬을 하러 용궁에 간다고 했을 때 가족과 친구들은 만류했다. 벼슬을 하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토끼 역시 부와 명예에 대한 욕망이 있었기에 자라의 등에 업혀 멀미로 똥물을 토하면서까지 용궁으로 간다. 토끼에게도 욕망은 있었으나 토끼의 욕망은 타인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용왕이나 자라의 욕망과는 다르다.

▲<토끼전>에 등장하는 토끼는 민중을, 자라와 용왕은 지배층의 모습을 드러낸다. <토끼전>의 서사는 민중과 지배층의 욕망이 서로 얽혀 진행된다. (사진=한국은행 유튜브)

<토끼전>에서 용왕·자라·토끼가 추구했던 욕망은 모두 실현되지는 못했다. 용궁에서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토끼는 벼슬은커녕 용궁에 도착하자마자 죽을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자라가 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러주지 않아 간을 육지에 두고 왔다고 용왕을 설득한 토끼는 탈출에 성공하여 자신의 간을 지킬 수는 있었다.

<토생전>과 <별토가>에서 자라는 자결한다. 심지어 <별토가>에서 자라는 욕망 실현을 위해 자신의 아내를 토끼에게 내어 주는 무능하고 어리석은 존재로 제시되어 있다. <토생전>과 <별토가>에서 자라는 욕망을 추구하다가 파멸하는 대가를 치른다.

용왕 역시 끝내 토끼 간을 얻지 못했다. <토생전>과 <별토가>에서 토끼 간을 얻지 못한 용왕은 병을 고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종결된다. <불로초>에서는 토끼가 육지로 돌아온 후 용왕의 소식은 더이상 알 수 없다. 용왕은 자신의 욕망에 눈이 멀어 똥과 오줌을 누듯이 간을 누기 때문에 간을 두고 왔다는 말도 안되는 토끼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는 어리석은 모습을 드러낸다. <퇴별가>에서 용왕은 토끼가 준 똥을 먹고 병이 낫는 것으로 우스꽝스럽게 제시되어 있다.

<토끼전>의 또 다른 이본인 <토공전>에서 용왕은 끝까지 토끼 간을 포기하지 못하고 옥황상제에게 도망간 토끼를 잡아 달라고 호소한다. 옥황상제는 토끼는 죄가 없고 용왕이 잘못한 것으로 판결했다. 판결을 받고도 용왕은 토끼를 살해하고자 계획한다. 결국 용왕의 토끼 살해 계획은 실패하지만 <토공전>에서 용왕은 자신의 잘못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범죄자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토끼전>에 등장하는 토끼는 민중을, 자라와 용왕은 지배층의 모습을 드러낸다. <토끼전>의 서사는 민중과 지배층의 욕망이 서로 얽혀 진행된다. 토끼의 욕망과 자라 및 용왕의 욕망은 달랐다. 자라와 용왕은 자신들의 욕망 실현을 위한 토끼의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지배층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민중이 희생될 수는 없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을 지닌 지배층의 욕망 실현을 위해 민중이 희생되는 사건은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지금 이 시대 발생하고 있는 여러 형태의 전쟁과 분쟁의 이면에는 권력을 지닌 어리석은 자들의 이기적인 욕망이 내재 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토끼전>은 지금까지 다양한 변화를 겪으면서 전승되는 작품이지만 특히 조선 후기에 널리 향유된 작품이다. 판소리 <수궁가>로도 향유되기도 했다. 조선은 역성혁명으로 세운 나라답게 통치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왕권의 교체는 빈번했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과 같은 큰 전쟁을 치른 후에는 더욱 혼란스러운 국정을 맞이하게 되었다.

시대적 상황 속에서 지배층은 유교 이념을 내세우면서 통치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유교 이념 중심의 일방적인 통치는 지배층에 대한 민중의 불만을 야기했기에 동학란을 비롯하여 여러 형태의 민란과 변란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중세 유교 이념에 입각한 억압적 통치는 민중의 불만을 자아냈으며 전쟁 및 당쟁으로 인한 지배층의 갈등과 부패로 민중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으며 삶의 터전을 잃은 유랑민이 발생하기도 했다.

누구나 욕망은 있지만 권력을 지닌 통치자의 이기적인 욕망은 민중의 삶의 터전을 황폐하게 할 뿐 아니라 목숨까지 위협할 수 있다. <토끼전>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향유된 작품이다. 주인공들이 모두 인간이 아닌 짐승으로 제시된 것도 작품이 드러내는 문제의식이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이다. <토끼전>에 제시된 토끼·자라·용왕의 모습은 비단 조선 시대의 현실에만 국한된 상황은 아니다. <토끼전>이 조선 시대 본격적으로 향유된 작품이지만 지금까지 다양한 형태로 변모하면서 전승될 수 있었던 것은 대중들의 공감과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세계 곳곳 그리고 각계 각층에서 자라와 용왕처럼 어리석고 무능한 통치자들의 이기적인 욕망으로 인해 희생당한 그리고 희생당할 위기에 처한 토끼들은 존재한다. <토끼전>에서 토끼는 목숨을 보전했지만 이기적인 욕망을 추구했던 자라와 용왕은 결국에는 조롱과 비판을 받고 죽음에 이르렀다. 이처럼 오래된 한국의 고전소설 <토끼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라와 용왕처럼 타인의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이기적 욕망의 소유자들은 반드시 그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리고 토끼는 결코 그 어떤 순간에도 간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을.”

서혜은 경북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