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의 플라톤 추방] 애도에 실패하고 얻는 금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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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형렬의『너의 이름만으로 행복했었다』(두엄,2023)는 소설가로 더 많은 작업과 성취를 이룬 소설가 겸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이다. 첫 시집『꿈에 보는 폭설』(청하,1990)의 표제작인「꿈에 보는 폭설」에는 눈 내리는 산정을 오르는 한 떼의 젊은이들이 등장한다. “스물다섯 살”로 특정된 이들은 동계 훈련 중인 군인들로 추정되지만, 군인이 아니라도 괜찮다. 쏟아지는 흰 눈 위에 코피를 흩뿌리며 산정을 오르는 청년의 이미지는 세계의 불가해성을 이해하려는 청춘기의 열정과 희생을 떠올려 준다. “눈길을 간다, 천둥을 치면서/ 얼마나 많은 가뭄이 우리의 가슴을 적시는가/ 서로의 가슴에 벼락을 때리면서/ 눈 내리는 산에 불을 지른다”

『꿈에 보는 폭설』에는 불안과 비애의 정서가 압도적이지만, 여기에 더해야 할 중핵은 한이다. “막냇누이는 밤새도록 울었습니다/ 나는 놀라 잠 깨어 말했습니다/ 그냥 울었습니다/ 오빠가 죽었다고/ 나는 까닭을 몰랐습니다/ 오빠는 뿌리치고 산으로 뛰쳐 올라가/ 싯누런 구렁이가 되어 불붙었다고……/ 막냇누이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오빠는 恨이 많아 구렁이가 되어 죽었다고/ 꿈속에서 울었습니다/ 울다, 울다 꿈속을 달려나온 막냇누이는/ 겨우 잠든 내 얼굴을 보며 울었습니다/ 내 이렇게 살아 있다고, 울지 말라고 해도/ 오빠는 구렁이가 되어 새까맣게 타죽었다고/ 막무가내 울었습니다// 아, 정말 막냇누이의 꿈처럼/ 나, 그렇게 죽을 수 있다면!”(「편지 11」) 한은 모호한 개념이지만, 시인에게 그것은 꿈의 좌절이다.

좌절된 꿈은 시인을 불안과 비애를 넘어서야 당도할 수 있는 죽음으로 이끈다. “유해상자를 받았다/ 상자를 열어 진달래 산, 진달래 흙,/ 큰소리로 나는/ 붉은 넋을 부르며 상자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봄」), “병의 병도 없는/ 죽음의 죽음도 없는/ 기쁨도 희망도 슬픔도 없는, 없는/ 저 적멸…… 청산으로 가자”(「편지 9」) 이처럼 죽음에 깊이 끌린 것에 시인도 놀랐나보다. “시를 쓰면 죽음이 옵니다./ 그래도 푸른/ 나는 스물아홉 살,/ 어디서 죽음은 옵니까?”(「다시 버리는 詩」)

시선집도 아니면서, 첫 번째 시집에 실려 있는「첫눈」이 토씨하나 틀리지 않은 원형 그대로 세 번째 시집에 실려 있는 것이 이례적이다. “만 원짜리 종이돈 다섯 장을 가지런히 펼쳐놓고/ 야간여상 2학년 막냇누이는 손뼉을/ 칠 듯 말했다/ “털실을 사고 싶어요!”// 그날, 첫눈이 내렸을까?/ 방바닥에 떨고 있는/ 11월 한 달치 누이의 노동만큼// 첫눈은 내려서/ 어머니의 수심을 힘껏 가리고/ 털실을 사 안고 돌아오는 누이의 발뒤꿈치 밑에서/ 꽃잎 하나쯤 감추고 있었을까?” 시인은 이 시를 세 번째 시집에 재수록하면서 첫 시집에 실었을 때는 없었던 “1979년”이라는 년도를 제목 밑에 달아 놓았다. 그리하여「첫눈 – 1979년」은「첫눈」이 갖지 못한 사실성과 기록성을 갖게 되었다.

시인이「첫눈」을 재수록하게 된 데에는 3년 전에 이 시 속의 막내 누이가 세상을 버린 사정이 있다. 이 누이동생은 오빠가 죽는 꿈을 꾸고 꿈속에서 울다가 깨어나 잠든 오빠를 보고 다시 울었다던 바로 그 누이가 아닌가. 시인은 여러 편의 ‘제망매가(祭亡妹歌)’를 노래하는 것으로 누이를 기억하고자 한다. “나는 다 알고 있고, 나는 잊은 적이 없다/ 네가 낮에는 양초공장에서 일하고 밤에 청옥공민학교를 다닐 때”(「패랭이꽃 1985」)

프로이트에 따르면, 애도는 망자에 대한 몰입을 거두어 다른 대상에 쏟는 것을 말한다. 그런 끝에 남아있는 사람은 상실로 인한 우울증이나 망자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런 상태를 정상적인 애도 혹은 성공한 애도라고 말하는데, 뒤집어 보면, 성공한 애도란 망자를 완전히 잊는 것을 말한다. 때문에 성공한 애도는 실패한 애도이며, 실패한 애도가 오히려 성공한 애도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다시 말해 성공한 애도는 망자와 우리의 기억을 ‘똥’으로 만든다. 반면 실패한 애도가 망자와 우리의 기억으로 풍요로워질 때, “모든 이별은 금강석”(「편지, 누이에게」)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