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출지대 7月호] 권위적 예술계 이대로 괜찮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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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뉴스민은 ‘대구 아트 시사저널 표출지대’와 전재 계약을 맺고, 온라인으로 글을 게재합니다. 원본은 표출지대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대구미술관에 홍준표 현 대구 시장의 초상화가 걸렸다. 자신의 제국에 깃발을 꽂듯 ‘제왕’의 얼굴을 전시한 사건이 21세기 미술관에서 일어나리라고는 믿기 힘들다. 이 초상화는 전시가 시작된 지 일주일 후에 원래 있던 그림을 떼고 교체하는 전례 없는 방식으로 걸리게 되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사건에 대해서 관장도 없이 위태롭게 운영되고 있는 대구미술관은 작가의 뜻이라며 책임을 회피했고, 대구시 또한 관여한 바 없다며 어떠한 답변도 주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이 작품에 대해 의문을 품자 무능함을 드러내기라도 하듯 아무런 사전 안내도 없이 예정되어 있던 도슨트 프로그램을 없애 버렸다. 어느 누구도 책임지려고 하지 않으면서 예술은 예술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예술지상주의나 권위주의 시대가 아니다. 현대미술가들은 오직 아름다움을 위해 작품을 제작하지도 않으며 정치적 권위에 순종하지도 않는다.

홍준표 초상을 그린 노중기 작가는 ‘역사적 전환기마다 새로운 시대정신에 부응하는 적극적인 자세’로 작품 활동을 한다고 소개되었다. 하지만 현 시장의 얼굴을 단순히 재현한 그림 속에서는 어떠한 시대정신도 찾아보기 어렵다. 초상화는 주로 중세에 왕과 귀족들이 권위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방식으로 인물을 그대로 모방하는 미술이다. 비례와 균형을 중시하던 500년 전 회화 양식을 가지고서는 21세기 동시대의 요청에 부응할 수 없다.

작가는 이 그림을 전시한 이유를 ‘예술적 판단’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예술적 자유라는 말 뒤에 비겁하게 숨어서 홍준표의 권위를 드러내는 일은 사람들을 설득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순수한 예술적 판단인지, 혹여 표현의 자유를 앞세운 ‘홍준표 팬아트’는 아닌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노중기와 홍준표의 오랜 친분은 이러한 의문에 더욱 힘을 실어준다.

시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시립미술관에 사적인 제작 의도가 의심되는 작품을 걸어서는 안 됐다. 미술은 자본가나 권력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것이어야 하며, 미술관은 모두를 위한 공공시설이어야 한다. 홍준표가 대구 시장이라고 해서 대구미술관이 개인 갤러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자신을 시대의 아이콘으로 만들고자 자기 모습을 본떠 만든 예술품을 랜드마크로 만들어 버리는 독재자를 많이 알고 있다. 히틀러는 거리와 상점 그리고 개인 주택의 담벼락에 자신의 얼굴이 찍힌 포스터를 붙이게 했고, 거역하는 사람들은 수용소에 보냈다. 김일성은 1500평(5만제곱미터) 이상의 면적에 아흔 개가 넘는 전시관을 가진 본인의 기념관을 세우고 그 앞에 약 20미터 높이의 동상을 세워 평양 밖에서도 보이게 했다. 이는 권력자의 모습을 본딴 초상화 등이 전세계적으로 나타나는 우상숭배의 증표임을 증명한다.

홍준표의 초상화의 시립미술관에서 볼 수 있게 된 것이 과연 우연일까? 이 사건은 미술계가 수많은 권력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일이다. 누구보다 권력과 감시로부터 자유로워야 할 공공 미술관이나 지역 미술계가 정권의 권력에 꼼짝 못하고 있는 현실은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자신의 업적이나 공을 드러내기 위해 만들어진 예술은 권력가를 우상화하는 기술에 불과하다.

현대미술은 진정 시대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다수의 시민을 위한 미술이어야 한다. 어떤 권력 앞에도 굴하지 않는 미술만이 공공 미술관에 전시될 자격이 있지 않을까? 오늘날 미술의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때다. 미술이란 무엇이고 누구를 위한 것일까?

글_표출지대_박소현
그림_대구미술관 ‘2023 지역작가조명전 《노중기》’ 편집 도판
pyochuler@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