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053] ‘참외따는 보민이’, 시골 청년세대의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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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등감과 질투심은 의심암귀를 낳는다. 조금만 생각 바꾸면 일어나지 않을 숱한 재앙이 거기에서 잉태된다. 삼국지연의 속 오나라 주유가 제갈공명을 두고 ‘하늘은 왜 주유를 낳고 공명을 또 낳았단 말인가!’라며 한탄했던 고사가,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노력파 살리에리가 난봉꾼 파락호이지만 천재인 모차르트 앞에서 느꼈던 분노가, 근래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애니메이션 <최애의 아이>에서 비밀을 숨긴 주인공 호시노 아이를 향한 B코마치 그룹 동료 멤버들의 선망과 증오가 뒤엉킨 감정이 모두 그렇다.

하지만 3자가 사후적으로 결과를 이미 알고 바라보는 것과 상황 속에서 당사자가 느끼는 감정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저 스스로 극복하거나 그렇게 살다 죽거나 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늘 남 사정을 비교하고 품평하는 걸 강 건너 불구경처럼 즐긴다. 수많은 책임지지 않는 말들은 보이지 않는 가시 혹은 돌멩이가 되어 타인을 찌르고 때린다. 누군가는 무덤덤하게 받아내지만 다른 누군가는 상처 입은 맹수처럼 포효하거나 속으로 울분을 삭힐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말 사소한 오해이거나 나만의 증오를 키우는 쓸데없는 짓으로 허송세월하는 사례가 종종 발생하곤 한다. 지나고 나면 대체 왜 그랬을까 허탈해질 만큼. 이번에 소개할 이야기는 참외밭에서 일어나는 그런 교훈극이다.

▲[사진=’참외따는 보민이’ 스틸 이미지]

◆ 참외가 익어가는 고향으로 돌아오니 라이벌이 기다리다

희주는 오랜만에 참외가 유명한 고향 성주로 돌아온다. 버스터미널에서 내리는 희주의 표정은 귀향자의 반가움과는 꽤나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한창 참외가 익어가는 무더위 가운데라 그런지 희주는 내리자마자 내리쬐는 햇볕을 불편한 표정으로 응시한다. 본가에 돌아왔지만 별로 썩 반기는 이는 없다. 또 돈타령하러 온 거 아니냐며 엄마는 오랜만에 만난 딸을 힐책한다. 이미 한두 번 겪은 상황이 아닌 듯하다.

엄마는 딸에게 동창 보민도 고향에 내려와 있다고 한다. 그리고 희주는 비닐하우스에서 참외를 수확하는 보민을 발견한다. 희주는 보민이 그러고 있는 게 의아하고 낯설다. 서울대학교 나온 걸로 동네사람 다 아는 바로 그 보민 아닌가. 보민은 희주에게 참외 품종 개량에 도전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보민은 ‘문과’ 출신이다) 오랜만에 만난 둘은 어색하게 안부를 나눈다. 희주는 서울에서 회사를 차렸다고 전한다. 둘은 따로 만나진 않으면서도 서로의 근황은 유심히 체크하는 관계였던 것이다. 희주는 보민에게 서울 오면 회사로 찾아오라며 명함을 내민다. 밥 한번 사겠다며. 특별할 것 없는 의례적인 만남이었지만 둘의 표정과 담화는 묘하게 엇갈린다.

▲[사진=’참외따는 보민이’ 스틸 이미지]

실은 희주는 자신이 대표로 있는 회사 사정이 어려워 집에 돈을 꾸러 온 것이다. 당연히 부모 입장에선 그렇게 손 벌리는 자식이 반가울 리 없다. 이미 들어간 돈이 제법 있는지 본가에선 더 이상 돈 나올 구석이 없다고 한다. 그래도 마음이 쓰인 엄마는 보민이네 집에 자금 융통을 부탁했다고 한다. 희주는 왈칵 화를 낸다. 하필 왜 보민이네에 부탁하느냐고. 흔쾌히 돈을 빌려준다는데도 희주는 전혀 반기지 않는다. 회사에서 수시로 걸려오는 자금 확보 여부 문의에 처했는데도 이 상황만은 피하고 싶다.

과거회상 장면에서 둘이 학창시절부터 라이벌 관계였다는 게 드러난다. 만년 1등과 2등의 전형적인 구도다. 문제는 언제나 1등은 보민이고 2등이 희주였다는 것이다. 반드시 1등은 알 수 없는 만년 2등의 속내가 있는 법이다. ‘쟤만 없었다면?’ 하는 그런 생각이다. 어릴 적 동네 문방구에서 팔던 출처 불명의 괴담 책자에 흔히 나오던 내용이다.

그래도 수확한 참외를 갖고 불편한 관계는 그만 청산하자며 먼저 찾아온 보민에게 희주는 못내 미안해진다. 그래서 그가 일하는 비닐하우스에 화해 차 찾아온 희주는 난장판이 된 하우스 앞에서 망연자실한 보민과 맞닥뜨리고 만다. 보민은 희주를 의심하며 대체 학창시절부터 자신한테 왜 그러냐며 꾹꾹 눌러왔던 분노를 터뜨린다. 희주는 사실 켕기는 게 있긴 하지만 하우스 건은 억울하다. 그러나 희주가 무심코 자기 엄마에게 본인이 우연히 알게 된 보민의 비밀을 들려준 게 퍼지는 바람에 상대는 그동안 참고 있던 감정이 격앙된 상태다. 둘은 한바탕 묵은 감정을 왈칵 쏟아내곤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 열등감에서 비롯된 상상의 대립구도가 우화처럼 묘사되다

▲[사진=’참외따는 보민이’ 스틸 이미지]

영화는 몇 겹의 소재를 레이어드 룩처럼 겹쳐 입으며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풀어나간다. 첫 번째 겹은 동네 영원한 라이벌, 보민 vs 희주의 끝나지 않는 전쟁이다. 물론 둘 중 하나가 패배를 인정해야 끝나는 외나무다리 혈투라기보다는 희주가 일방적으로 보민을 질투하는 형태이긴 하다. 나도 죽어라 열심히 노력하는데 왜 보민만 항상 일등이란 말인가. 희주의 가슴 속 원망이 환청처럼 들려올 지경이다. 하지만 둘 중 하나가 동네를 영영 떠나지 않는 한 이 영원한 서열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희주는 서울로 떠났고 어찌 되었건 남들 보기엔 자수성가한 장한 청년이 되었다. 그런데 하필 돌아오자마자 보민의 소식부터 듣게 되었으니 잠재된 열등감이 다시 소환된 셈이다.

외부자의 시선으로 본다면 희주의 행태는 그저 속 좁고 옹졸함의 극치다. 하지만 당사자 입장이 되어본다면 적지 않은 이들이 그에게 감정이입할 테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대적하기 어려운 운명의 상대, 정작 상대방은 날 라이벌로 생각하지도 않는다면 더 화가 나는 그런 관계다. 똑같은 노력을 기울인 끝에 ‘정정당당’하게 밀렸다면 덜 억울할 텐데 아무리 봐도 내가 노력은 더 한 게 맞는 것 같다. 괜히 얄밉게 (나는 미끄러진 상황에서) 합격비결 묻는 마이크 앞에 ‘잘 거 다 자고 공부했어요!’ 하는 그런 밉살스런 상대가 주변에 꼭 한둘 있지 않은가.

칼로 물 베기 같지만 작은 동네에서 수십 년간 쌓여온 유감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희주는 동네를 떠나 서울로 독립하면서 자신이 짧은 인생 내내 품고 있던 열등감에서 해방된 것처럼 생각했지만 고향으로 돌아오는 순간 마치 블랙홀에 휘말린 양 과거의 기억은 부활하고 만다. 정작 그의 가족을 포함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데도 말이다. 결국 결자해지, 자기 마음속에 둥지를 튼 소모적인 감정을 해소해야만 한다.

희주는 스스로 보란 듯이 성공하는 것으로 그걸 돌파하고자 했고, 젊은 나이에 (다소 무리해서) 또래라면 대개 선택할 안정적인 직장생활 대신 창업을 감행했다. 하지만 갈등이 해소될 가능성은 그렇게 이해 불가영역에 머물던 상대도 실은 나와 별로 다르지 않구나 하는 깨달음의 과정에 있음을, 그렇게 바깥이 아니라 모든 것의 출발이라 할 자기 마음을 정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사진=’참외따는 보민이’ 스틸 이미지]

◆ 개천에서 용 나기 vs 기울어진 운동장의 복잡성

극중에선 보민에 대한 희주의 질투어린 감정이 갈등의 축을 이루지만 배경을 살펴보면 보다 근본적인 구도가 설정된다. 부모세대와 자녀세대 사이의 격차라는 두 번째 쟁점이다. 구체적으로 묘사되지는 않지만 희주와 보민, 둘 다 동네에선 기대를 한 몸에 받았을법한 존재들이다. 둘의 경쟁관계는 어느새 동네에서 부모들의 자랑과 학업 및 출세 성취의 결과로 형성될 서열로 확장될 법하다. 보민은 동네 곳곳에 자랑스럽게 게시된 축하 현수막을 뒤로 한 채 서울대학교를 떠났다. 희주는 결국 서울대학교에는 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보민의 합격소식은 개인과 가족만의 것이 아니라 온 마을의 자랑으로 현수막이 걸리는 경사다. 그걸 매일 바라만 봐야 하는 실패자 희주의 심정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오로지 희주만이 짊어져야 할 짐이다. 애초에 경쟁구도가 형성되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희주는 덜 속상했을 테지만, 작은 마을에서 둘은 아주 어릴 적부터 주목받으며 경쟁해왔을 테다. 하지만 희주는 그저 질투와 저주만 한 것은 아니다. 한층 더 노력해서 비록 위태로운 경영상황이나마 자기 회사를 꾸려 대표님 소리를 듣고 있다. 그런데 늘 자신보다 한 단계 위에 있던 보민이 참외를 따고 있다. 희주는 회사 대표라는 사실을 자랑스레 강조하고 보민은 자신이 참외품종 개량중이라며 너스레를 부린다.

둘 사이의 관계는 부정적인 기운으로 감정소모를 불러왔지만, 경쟁을 통해 각자 대외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결과를 산출한 듯 보였다. 둘 다 또래들처럼 틀에 박힌 성공가도가 아니라 진취적인 모양새로 각자의 꿈을 펼치는 것처럼 보인다. 둘의 공식적인 대화 내용만 놓고 보면 말이다. 하나는 창업, 하나는 미래농업을 통해 각자의 블루오션 개척에 힘 쏟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눈썰미 좋은 관객이라면 곧 이들이 감추고 있는 무엇인가를 깨닫게 될 테다. 그 간극이 단순한 동네 라이벌 구도를 넘어 자녀세대, 청년세대의 고충으로 이야기를 확장시킨다.

알고 보니 둘의 상황은 마치 거울로 비춘 양 닮아 있다. 둘 다 서로에게 기만작전을 펼치지만 정작 금새 들통이 날 정도로 허술한 연막에 불과하다. 동네의 대견한 성공신화, 시골 출신 자수성가의 표상처럼 묘사되던 둘 모두 외양과 실질의 격차 속에서 모순을 껴안고 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게 바늘귀를 통과하는 난제처럼 되고만 상황이다. 지방이 아니라 수도권, 그중에도 ‘인 서울’, 서울 내에서도 강북이 아니라 강남, 강남 중에도 3구에 속해야만 기회가 열리고 부모세대의 자원이 이를 뒷받침해주는 세상이다. 수많은 통계와 지표가 이를 증명한다. 희주와 보민은 그 장벽을 능히 뛰어넘었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로컬 히어로’이지만 실상은 판이하게 다르다. 그 도전을 위해 가족의 제한된 자원을 소진한 희주는 늘 불안감에 시달린다. 그래서 보민에 대한 출구 없는 한은 더 깊어져간다.

▲[사진=’참외따는 보민이’ 스틸 이미지]

◆ 감독 자신이 포함된 세대의 딜레마를 우화적으로 풀어내다

작은 시골마을에서 머물기만 해서는 답이 없다는 판단 하에 주인공들은 서울로 향했다. 노력한 만큼 결과가 기다릴 거라는 믿음과 주변의 기대와 지원에 힘입어 말이다. 하지만 그런 신분상승 노력은 어느새 우연 & 조건의 영역이 되어버렸음을 (사회적 논쟁을 굳이 표면에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본 작품은 짙게 그려낸다. 성공을 위한 첩경인 우연과 조건 모두 한국 근현대사회에서 금과옥조처럼 받아들여지던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명제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상황이다. 공통적으로 물려받은 배경이 결정적 요소가 된다. 이미 출발점이 다르면 성공할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달라지는 세상이다.

그런 배경을 공유한다면 무한대립으로 치달으며 접점이라곤 없어 뵈던 희주와 보민, 두 사람의 공통분모는 의외로 거울반사와 다를 바 없다.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자식, 기성세대에게 의지하기엔 자존심 상하지만 자신들이 처한 난관의 해결을 위한 뾰족한 대책은 없는 세대의 곤혹스러운 상황이다. 두 주인공은 공통적으로 어떻게든 자신들을 믿고 기대해준 이들에게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다. 죽어도 솔직히 털어놓을 수 없는, 차라리 혼자 끌어안고 무덤까지 가고픈 그런 비밀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정작 원수처럼 지내던 둘은 서로 유일하게 그 비밀을 나눌 수 있는 관계라는 것을 한참 지나서야 직시하게 된다. 서로 너무나 닮은꼴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진실을 함께 깨닫고 공유해야만 한다. 그렇게 공통된 패배의 순간에 비로소 둘은 수렁에서 벗어나진 못해도 대나무 숲이라도 얻게 된다. 마침내 도시에선 볼 수 없을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함께 바라보며 희주와 보민은 너무 오래 끌어온 숙제를 마치게 된다. 결국 쓰라린 현실을 인정하고 공감할 때 화해의 여지를 찾은 것이다. 감독 자신의 고향, 부모님이 여전히 참외농사를 짓고 있던 어느 여름 성주에서 탄생한 영화는 화면의 안과 밖에서 모두 청년세대가 속한 사회적 현실을 거울처럼 담아낸다.

<작품정보>

참외따는 보민이 Korean Melon
2023|한국|드라마|23분
연출/촬영/조명/편집 차민선
출연 신소연(박희주 역), 정미형(최보민 역), 박지영(보민엄마 역)
PD 김난영
각본 강소연
녹음/사운드 김진홍
음악 서여정
미술 김희진
배급 호우주의보

2023 16회 여성인권영화제 피움초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