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이장(移葬)의 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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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화장이 일반적인 장례문화로 자리잡은 시대에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전근대 시기 장례에서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는 묫자리를 선택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묫자리 선택보다 더 어려운 일은 묘를 다시 옮기는 일이었다. 장례 과정에서 최선을 다해 묫자리를 선택했다면, 더 좋은 묫자리가 나왔다고 해서 장례를 치른 묘를 대뜸 옮기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었다. 한번 정해진 음택(陰宅: 묫자리)은 옮기지 않는 게 원칙인 이유도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옮겨야 해도 챙겨야 할 게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옮기는 시기나 시간, 사람도 중요하며, 이미 정해진 음택과의 관계 등을 고려하다 보면, 어지간하기만 해도 그냥 두는 게 좋은 선택이었다.

1761년 음력 10월 27일, 하양현감을 지냈던 김경철은 이 어려운 선택을 했다. 이장의 명시적인 이유는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 없지만, 그는 낙옹대로 알려진 평평한 땅을 평상시에 봐 두었던 터였다. 그리고 평소 친분이 있던 최흥원에게 진작부터 이 땅을 봐 달라고 부탁을 해 왔다. 그러나 최흥원은 이장을 하는 날이 되어서야 김경철을 따라나섰고, 그가 오랫동안 준비했던 낙옹대 전경을 그제야 볼 수 있게 되었다. 기록이 없어 낙옹대가 정확하게 어디인지 알기는 어렵지만, 당시 최흥원의 기록에 따르면 풍광이 좋고 평평하게 넓은 지역이었다.

그러나 풍광이 좋고 평평하게 넓은 지역은 산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지, 음택으로서 적합한 조건은 아니었다. 당시 주위 사람들의 평도 그랬던 터라, 김경철은 최흥원을 졸라 한 번쯤 그 땅을 봤으면 했다. 자신이 결정에 힘을 실어 줄 사람이 필요했던 터였다. 그러나 이미 이장은 진행되는 중이라, 최흥원 입장에서는 특별히 나쁜 말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안면에 못 이겨 이장하는 날 낙옹대를 찾는 데 의미를 둔 이유였다. 말 그대로 낙옹대는 반석과 같이 평평한 지형이었다. 낙옹대의 네 모퉁이는 발처럼 생긴 작은 산록도 있어 산과 경계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김경철은 낙옹대 중간 작은 흙 둔덕 아래가 장사 지내기 좋아, 그곳으로 이장을 진행한다고 했다. 넓고 평평한 데다 멀리 들과 강물까지 보이니, 풍광은 그만이었다.

그러나 최흥원이 보기에도 이곳은 죽은 이가 머물 음택으로서 길지는 아니었다. 뒤 산세가 평평하고 완만하기 때문에 땅의 기운이 묘로 사용될 지점에 맺히지 않았다. 음택은 산의 기운이 한곳에 모여야 하는데, 뒤에 있는 완만한 산세는 기운 자체가 없어 보였다. 특히 이러한 산의 기운은 왼쪽으로 청룡의 기운이 흘러야 하고, 오른쪽으로는 백호의 기운이 흘러야 전통적으로 좋은 묘터였다. 그러나 평평한 땅이어서 이 같은 기운의 형상도 뚜렷하지 않았다. 게다가 오른쪽 백호의 기운이 흘러야 하는 곳은 땅이 아래로 처져 있어, 건너편 들과 강물이 모두 보였다. 그쪽으로 모든 기운이 빠져 나가고 있었다.

김경철도 글 꽤나 읽은 사람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최흥원으로서는 그의 판단을 이해할 수 없었다. 최흥원이 가진 최소한의 풍수 지식만으로도 확연하게 발견되는 문제점을 김경철인들 알지 못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이장을 막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이미 원래의 묘는 파 버린 상태였다. 내심 진작 확인하지 않은 게 치명적인 실수였다고 한탄하고 있을 무렵, 그는 비로소 김경철이 이장을 서둔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낙옹대로 묘를 이장한다는 소식이 돌자, 아랫마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평상시 낙옹대를 마을의 쉼터이자 생활의 터전으로 삼았던 사람들이었다. 이장을 막아설 요량으로 모였지만, 묘 주인이 누군지 확인한 그들은 절망했다. 하양현감까지 지냈던 김경철의 권력이면 낙옹대에 묘 하나 쓰는 게 어렵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특정 산에 산소가 생기면 그 일대의 산에 대한 권리가 일차적으로 산소 주인에게 주어졌다. 특히 권력과 가까운 사족들은 그 지역 지방관과 손을 잡고 묘를 빌미로 산의 관할권을 주장하기 때문이었다. 풍수 좋은 곳을 찾아 다른 지역에 묘를 쓰려는 사족들을 그 지역민들이 거세게 막는 기록들이 많은 이유이다.

이미 묫자리는 만들어졌고, 이장은 진행되고 있었으니, 마을 사람들로서는 하루아침에 낙옹대를 빼앗긴 셈이 되었다. 이제 김경철은 넓고 평평한 낙옹대와 그 주위의 풍광을 자기가 가질 수 있게 된 셈이었다. 돌아가신 선친의 묫자리로서는 그닥 좋을 게 없는 자리였지만, 그 묘를 빌미로 살아 있는 사람들이 그곳에 터를 잡기는 좋았다. 마을 사람들 입장에서는 김경철의 권력을 이용해서 낙옹대 옆에 있는 왕대나 지켜야겠다는 현실적인 판단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낙옹대는 김경철이 차지했으니, 그 옆에 있는 왕대에 다른 사람들이 장사 지내는 것을 막아 달라는 부탁으로 그들의 불만을 가름했다. 이를 본 최흥원은 불편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눈에 보이는 이익을 위해 죽은 선친의 묘까지 이용하는 처사를 보니, 돌아가신 선친인들 편할까 싶었다.

조선시대 사족이나 양반들에게 있어서 음택은 욕망의 대상이었다. 풍수 좋은 곳에 돌아가신 분을 모심으로써, 후대가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탓이다. 당연히 권세를 누리는 집안의 묫자리를 훔쳐 몰래 장사지내는 경우도 많았고, 좋은 음택을 찾아 돌아가신 이를 모시려는 사람들과 지역민들의 싸움 역시 적지 않았다. 그런데 그 싸움 이면에는 묘의 주인에게 산의 관할권을 인정했던 당시 관례가 만든 현실적 욕망도 존재했다. 죽은 이가 영면해야 할 장소이지만, 이를 차지하는 만큼 현실적인 이익도 주어졌기 때문이다. 묫자리가 가진 길지만큼이나, 산 사람의 눈에 보기 좋은 곳이 선택되는 이유였다. 하긴 우스갯소리로 요즘은 주차하기 좋은 곳이 최고의 길지라고 하니, 묫자리가 돌아가신 분을 중심으로 선택되지 않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