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규 칼럼] 대문 없는 마을의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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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향은 두메산골이다. 작년에 대구시로 편입한 군위군 광현2동이다. 60년 전인 1963년, 서른 가구가 살았던 이 동네에서 놀라운 축복이 열여섯 번 일어났다. 한 해에만 필자를 포함해 열여섯 명의 아기가 태어난 것이다. 격세지감이다. 또 하나 놀라운 것은 예나 지금이나 모든 집은 대문이 없다는 점이다. 마을 사람들은 누구 집이든 무상출입이 가능했다.

온 동네가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아이들은 누구 집이라도 거리낌 없이 드나들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집 건너 또래 친구가 살고 있으니 어느 집일지라도 제 집 다니듯 다니며 놀았다. 요즘 아파트나 주택가 구석진 곳에 있는 작은 놀이터를 볼 때마다 가슴 아프다. 어떤 아파트는 피트니스센터를 내세우지만, 어른을 위한 시설이다.

산골 마을은 한집안 같다. 아기가 태어나면 온 동네가 기쁨이 넘친다. 칠남매의 막내인 필자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왕복 사십리 길을 걸어서 미역을 사왔다고 한다. 대문이 없는 관계로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고추를 달고, 여자아이면 숯을 단 새끼줄을 담과 담을 이어서 걸었다. 이웃집 부모들은 밥상머리에서 새끼줄에 담긴 뜻을 알려주면서 “아기가 갓 태어나 자고 있으니 조용하자”고 아이들을 훈육했다.

동네에서 누군가 세상을 떠나면 모두가 슬픔에 잠긴다. 지금처럼 단톡방이 없고 ‘입톡방’이 뉴스를 전한다. 소식을 접한 부모들은 “이웃과 슬픔을 함께하면 슬픔이 줄어든다”는 취지로 아이들을 도닥거려 준다. 그리고 아버지는 상여를 준비하는 일을 거들고 어머니는 상갓집에서 일을 돕는다. 이를 보면서 자라는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이웃과 함께 사는 것을 체득한다. 산교육이다.

마을에서 가장 큰 잔치는 결혼식이다. 온 동네가 축제 분위기다. ‘음식 품앗이’로 축하해 준다. 축의금 대신 식혜처럼 만드는 데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을 만드는 등 결혼식 준비를 돕는다. 어린 아이에게는 초상집이든 잔칫집이든 맛나는 음식이 최고일 수 있다. 버릇없는 아이들이 있어도 어른들은 모른 척한다. 작은 버릇을 고치는 것보다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인성을 길러 주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새해도 벌써 열흘이 지났다. 어린 시절 고향에 대문이 없어서 이집 저집 뛰어다니며 놀았던 것이 아니라 어른들의 열린 마음 덕분임을 새삼 깨닫는다. 동네 아이들과 함께 보고 듣고 느끼며 배웠던 것을 돌아보면서 그동안 아파트에 살면서 층간 소음에 민감했던 것을 뉘우친다. 위층에서 아이들의 뛰놀던 소리가 거슬려 괴로워하기도 했다. 우리 집이 시끄럽다고 아래층의 항의들 듣고 아이들을 지나치게 다잡았다. 분명한 것은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는 소음이 아니라 희망이라는 사실이다.

아이들은 한 가정을 넘어 우리나라의 희망이다. 새해는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는 여건 조성에 힘써야겠다. 먼저 아이들을 위한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놓겠다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