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운동가들] 사회복지사와 활동가 경계에서 주거 복지를 고민하다

#활동가 유경진을 만든 세월호·학생회·풍물패
#활동가로서의 ‘사회복지사’, 그리고 성장에 대한 고민
#선배 세대와의 가장 큰 차이, ‘후원자를 끌어올 수 있냐’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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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한때는 세상을 바꿔보겠다며 사회운동에 나선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운동가라고 지칭하는 사람은 줄어듭니다. 사회운동을 하는 운동가들은 오늘도 사람을 만나고, 제도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려고 애를 씁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운동권 특권 세력 청산은 시대정신”이라며 자신과 대립하는 정치인과 싸우기 위해 운동가들을 몽땅 폄훼하기도 합니다. 운동권이라는 어원은 독재정권 시기 민주화운동에 나선 학생운동가를 고립시키기 위해 만든 용어였습니다. 그들 중 대다수는 기득권으로 살아가지 않았고, 또 일부는 1987년 민주항쟁 이후 오늘날까지 사회운동을 이어가는 운동가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2020년대 사회운동을 시작한 운동가들도 있습니다. 2024년, <뉴스민>은 매달 1980년대 사회운동을 시작한 운동가, 1980년대 이후 태어난 운동가들의 삶과 더 나은 공동체를 바라는 운동가의 고민을 듣기로 했습니다. 

유경진과 나는 대학에서 처음 만났다. 사회대 학생회장과 학보사 기자였다. 대학에 공동체가 실종됐다는 이야기를 핑계 삼아 종종 수다를 떨었다. 그는 풍물패 이야기를 자주 했고 학생회 선배들이 대체로 그렇듯 취업 걱정은 없어 보였다. 대학 졸업 후 대구쪽방상담소에서 일한다는 이야길 들었고, 그로부터 몇 년 뒤 만났을 땐 스웨덴 유학을 준비 중이었다. 유럽의 복지제도를 경험하고 와서 그는 쪽방상담소로 돌아갔다.

대구쪽방상담소는 자원봉사능력개발원 부설기관으로, 쪽방 거주민을 대상으로 생계 지원, 상담, 의료 등을 실시하는 노숙인 복지시설이다. 노인, 아동, 장애 등 인구학적 특성에 기반한 지원이 대부분인 우리나라 복지 체계에서 주거 복지는 예산 규모, 관심도 등 모든 면에서 열악하다. 경진은 6년째 현장 지원, 사업 담당, 연구 등의 일을 하고 있다.

인터뷰는 1월 23일 저녁 대구 중구의 카페 ‘대화의 장’에서 진행됐다. 대학 시절의 학생회, 풍물패부터 해외 유학, 쪽방상담소까지 활동가 유경진을 만든 것에 대해 물었다. 카페가 위치한 북성로 골목 안쪽에는 쪽방이 길게 줄지어 있었다. 그는 “자주 오는 골목”이라며 모텔, 달셋방, 다방 같은 이름이 적힌 건물들의 특징을 한참 설명했다.

#활동가 유경진을 만든 세월호·학생회·풍물패

▲경진이 쪽방상담소에서 일해야겠다 마음먹은 건 현장을 본 순간이었다. “‘힘들진 않았냐” 물으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여기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문제에 내가 동의되는지가 결정에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답했다.

Q. 쪽방상담소에서 일하게 된 과정이 궁금해요.

2016년 3월에 당시 대구시에서 운영한 청년NGO활동가 지원사업으로 첫 인연을 맺었어요. 그해 인턴 활동을 한 뒤 다음 해 곧바로 채용됐죠. 쪽방상담소는 홈리스를 지원하는 기관이에요. 가장 아래에 거리 노숙이 있고, 그 위 단계가 쪽방이거든요. 단열이 안 되거나 과밀한 곳에 있거나, 혹은 더부살이를 하는 것도 모두 홈리스의 영역에 포함이 되는데 아직 노숙인 복지법에 거리노숙과 쪽방 정도밖에 안 들어와 있어요. IMF 때 거리 노숙이 급격하게 늘면서 지원의 필요성이 처음 제기됐고, 법 테두리 안에 들어온 게 2012년이죠.

사실 처음엔 노숙인 복지 영역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어요. 대학 수업에도 없었거든요. 사회복지를 전공하면서 장애인 복지론, 아동복지론, 여성복지론, 노인복지론 등의 수업을 들었지만 홈리스, 주거 복지에 대해선 들어본 적이 없어요. 빈곤 사회복지 과목이 있긴 했지만 메인 영역이 아니었죠. 그런데 우연히 현장을 만났고, 지금까지 일하고 있어요.

Q. 규모가 큰 복지관이 아닌 쪽방상담소에서 사회복지 활동가로 일하는 걸 선택한 데는 대학 시절 활동이 영향을 줬을까요?

전공은 사회복지였지만 수업을 열심히 듣는 학생은 아니었어요. 복학하고 다음 해인가, 세월호 참사가 터졌어요. 처음엔 실감이 안 나고 추모를 강요하는 분위기가 불편하다는 마음이 컸던 것 같아요. 그러다 같은 해 8월에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사고에 석연찮은 부분이 있어서 허망한 마음이 컸죠. 그리고 얼마 뒤 세월호 유가족 간담회가 학교에서 진행됐는데, 그들의 감정에 공감되고, 참사 관련 자료를 찾아보게 되더라고요. 그때가 중요한 전환점이었어요.

그리고선 사회대 학생회장을 했죠. 돌이켜보면 인간관계가 서툴렀고 책임감이 커서 압박을 많이 느꼈던 것 같아요. 상대의 기분을 고려하거나 내 행동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에 대한 고민을 할 줄 몰랐던 것 같아요. 여러 활동을 거치면서 사회화가 됐죠.

학생회가 끝나갈 때쯤 슬슬 진로 고민 시작했고, 우연히 대구시의 ‘청년NGO활동가 지원사업’에 참여하게 됐어요. 학생회를 했으니 ‘나 이제 빨갱이 사회로 들어왔나’라는 생각도 했어요. ‘시민사회단체 나쁘지 않을지도’라는 생각도 했고요. 대구참여연대에 갈거로 생각했는데 자원봉사능력개발원에 배정됐죠.

인턴으로 일하면서 ‘나 여기에서 계속 일하겠구나’ 알았어요. 그 전 대학 실습이나 자원봉사를 할 땐 ‘이건 진짜 아닌데’라는 생각을 한 적 없었거든요. 노인, 아동, 장애인, 여성을 만나도 그들의 문제에 완벽하게 동의가 안 됐어요. 그런데 쪽방의 현장 지원을 나가니 ‘여긴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는 느낌이 왔어요. 타깃 집단의 문제에 내가 동의했는지가 결정에 중요했던 것 같아요. 복잡하게 생각을 안 하는 성격이거든요. 쪽방을 청소하면서 ‘이 일 나랑 잘 맞을지도. 나 일 잘하는 것 같은데, 여기 사람들 나 좋아하는 것 같은데’란 생각이 드니까 그냥 해야겠다 싶었어요.

Q. 풍물패도 대학 시절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요. 활동가의 삶을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까요?

대학 1학년 때 풍물패 활동을 시작했어요. 사회대 풍물패 ‘울림터’는 학생회랑 관련 있는 동아리예요. 옛날 학생운동이 선전 수단으로 노래패, 몸짓패, 풍물패를 썼잖아요. 우리끼린 풍물패가 제일이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전통문화 계승이라든지 좀 더 저변이 넓다고 보는 거죠. 풍물패는 여름, 겨울 1년에 두 번 9박 10일간 전수를 가요. 연습이 메인이지만 아침에 눈 떠서 밤에 잘 때까지 밥해 먹고 교양을 하는 모든 과정에서 합을 맞춰요. 재밌지만 많이 싸웠어요. 극강의 팀플이죠.

졸업하고도 전수를 갈 수 있으면 따라갔어요. 사람은 계속 부족하고 전 재밌으니까. 물론 졸업한 선배가 가는 게 정상은 아니지만 계속해서 사람이 없었어요. 어떤 방식으로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제가 매번 연차를 모아서 전수를 따라가니까 뒤이어 졸업한 후배들도 편하게 따라오더라고요. 만약 인간 유경진에게 좋은 점이 있다면 그 8할은 울림터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공동체에 대해 고민하며 사람과 사람이 함께 해야 나아갈 수 있다는 걸 배웠어요. 어려운 여건이지만 계속 꿈꾸고 사람을 품어내는 공간으로 남아 있으니 저에겐 기댈 곳이 돼요.

#활동가로서의 ‘사회복지사’, 그리고 성장에 대한 고민

▲경진이 일하는 대구쪽방상담소는 자원봉사능력개발원 부설기관이다. 이들이 지원하는 쪽방은 일세 혹은 월세의 형태로 운영되며 개별취사, 세면 등 기초적인 부대시설이 없는 방을 뜻하며 독신 단위로 건설일용직, 행상 등과 같이 이동성이 강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한다. (사진=본인 제공)

Q. 이야기를 듣다 보니 직업인으로서의 ‘사회복지사‘와 활동가로서의 ‘사회복지사’. 그 경계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졌어요.

제가 속한 자원봉사능력개발원이 기관과 활동 사이 중첩되는 영역에 있기 때문에 저도 스스로를 활동가라고 규정하는 것 같아요. 법인이 어떤 활동을 하고 어떤 가치를 갖고 있느냐가 중요한거죠.

개발원은 처음부터 마이너한 영역에서 사업을 했어요. 자원봉사로 시작해 노숙인, 북한이탈주민 등의 영역으로 확장한 거죠. 딱 들어도 별로 돈이 안 될 것 같잖아요. 그럼에도 이 영역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법인을 만들었어요. 그렇다 보니 이 영역들이 좀 더 활동성을 가져야 했던 거죠. 쉽게 말하면 내가 먹을 건 내가 뚫어서 만들 수밖에 없으니 운동의 성격을 가져온 것 아닐까요.

예전에는 노숙인 복지를 한다고 해서 지자체가 돈을 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거리 급식을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일하는 사람들에게 월급을 줘야 했죠. 주기적으로 일하려면 정규직이어야 했고, 시설이 필요했어요. 그렇게 요구하며 투쟁하다 보니 법의 테두리 안에 들어오고, 지자체 지원까지 받아낸 거라고 들었어요.

Q. 실제 일해보니까 어땠나요? 기대와 다른 점도 있을텐데.

구조적 모순이 눈에 보였어요. 거리 노숙인은 당장 긴급한 지원이 필요해도 방(주소)이 있어야 지원돼요. 행정 편의 때문인데, 그렇다 보니 쪽방이 우후죽순 늘었죠. 노숙인들이 쌀을 받으려면 방이 있어야 하니, 가장 싼 쪽방을 구해요. 고시원, 모텔을 달세로 사는 식이죠. 거긴 사람이 살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 아니잖아요. 거기서 오는 충격이 있었고, ‘대한민국이 기능적으로 잘 돌아가지 않는구나’ 느꼈어요.

그래도 복지는 정치 지형에 따른 영향이 덜한 편이에요. 빈곤 문제 접근은 진보 진영이 잘하는 것도, 보수 진영이 잘하는 것도 아니거든요. 정권이 바뀌고 선거가 있는 것과 별개로 예년과 비슷한 수준으로 무관심하죠. 이슈가 생기면 예산이 좀 늘긴 해요. 코로나19가 발생하면 ‘어디 돈 줄 데 없냐, 어려운 이웃 없냐’고 우리에게 물어보러 오는 것처럼요.

언론도 마찬가지잖아요. 가장 더울 때, 가장 추울 때 신입이 와서 따끈따끈한 현장 아이템, 어려운 이웃 없냐고 물어보죠. 연결해 준 쪽방 아저씨들도 인터뷰를 해봐야 변화가 없다는 걸 알아요. 많이 해봤으니까. 그래도 중간에서 소통한 복지사들이 눈에 밟히니까 해주는 거죠. 문제의 본질과 별개로 소비되는 부분이 좀 막막하긴 해요. 물론 우리가 진짜 던지고 싶은 아이템을 던졌을 때 와서 깊숙이 봐주면 고맙죠. 그래도 몇 년 겪으니까 빈곤 포르노식 접근이 대부분이라 실무자로서의 피로감은 있어요.

Q. 활동 3년 차에 다녀온 스웨덴 유학은 어땠나요? 마침 코로나 시국이었죠.

선배들이 해외 선진지를 다녀와서 새로운 계획을 추진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선 외국에서 공부하고 싶단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일을 잘하려면 특별한 경험이 필요하겠단 생각도 하던 참이었고요. 스웨덴 룬드에서 사회복지 정책을 공부했는데 사실 빡세진 않았어요. 학교 안보다 밖에서 자원봉사를 하면서 느낀 게 더 많았어요. 복지 제도가 실제 삶에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봤죠.

우리나라는 최저 주거기준이 있어도 감독이 부실해서 홈리스가 쪽방, 고시원으로 이동했잖아요. 스웨덴은 좀 더 체계적으로 복지 제도가 움직여요. 다만 아이디 카드(주민등록증)가 있는 홈리스는 별로 없는 대신 이주민 홈리스가 계속 늘고 있다는 문제가 있죠. 국가에서 그들을 지원하고는 있지만 턱없이 부족하죠. 아침에 밥이 아닌 커피와 빵을 주는 모습이 기억나네요. ‘빈속에 커피 괜찮을까’ 생각하면서 자원봉사를 했어요. 스웨덴어를 공부했는데 정작 자원봉사를 할 땐 루마니아어를 다시 배워야 했죠. (웃음)

#선배 세대와의 가장 큰 차이, ‘후원자를 끌어올 수 있냐’

▲인터뷰가 진행된 카페 근처 골목에는 쪽방이 길게 줄지어 있었다. 경진은 모텔, 달셋방, 다방 같은 이름이 적힌 건물들의 특징을 설명했다.

Q. 올해로 6년 차 활동가죠. 지금 일에서의 가장 큰 화두는 뭔가요?

일에서 가장 중요한 건 성장과 그에 뒤따르는 보상이라고 생각해요. 금전적 보상이 아니어도 연차가 쌓일수록 권한이 커졌으면 좋겠어요. 직급에 맞는 업무와 권한이 주어지고 그에 맞는 보상이 이뤄지는 시스템이어야 하는데, 체계적이지 않다고 느낄 때가 있어요. 많은 부분에서 관계 중심으로 일이 이뤄지고,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뭉뚱그려서 넘어가게 되기도 하거든요. 이게 지속되면 건전한 조직 문화가 쌓이지 못하겠죠. 많은 활동가 조직의 고질적인 문제인 것 같아요.

오늘 업무시간에는 구글 스프레드시트에 캘린더 등을 연동한 연차 사용 프로그램을 만들었거든요. 연차 신청서를 한글 문서 파일로 쌓아두는 것보단 시스템화 해두면 그만큼 시간을 절약해 다른 중요한 업무를 볼 수 있잖아요. 날짜와 시간, 이름만 기입하면 한글 문서도 만들어지고 캘린더에도 자동으로 입력돼요. 앱도 만들어서 연동시켜 놓았어요. 이렇게 조직에 필요한 부분을 건의하고 직접 해결하려 해요,

활동가 단체에선 돈으로 보상을 주기 어렵고, 일하는 사람들도 그걸 바라고 오지 않아요. 그럼에도 ‘너는 훌륭한 일을 하고있어, 우린 함께 갈 수 있어’라는 동기부여를 줘야 하는데 많은 부분에서 아쉽죠. 영향력을 주고 받으며 같이 일하고, 책임지는 걸 좋아하는 성향이라 더 고민이 쌓이는 것 같아요.

Q. 선배 세대와 환경적 차이를 느낄 때가 있나요?

‘내가 말발이 설 수 있을까, 선배를 이길 수 있을까’라는 고민과 맞닿아 있는 질문 같아요. 선배 세대와 우리 세대의 가장 큰 환경적 차이는 ‘후원자 수’라고 보거든요. ‘나를 믿고 돈을 내는 후원자 수’는 우리가 선배 세대를 절대 이길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죠. 아무리 일을 잘해도 그들 세대의 인맥이나 후원 자원만큼을 확보할 수 없으니 말발이 서지 않아요. 밥벌이랑도 직접적으로 연관되니 전망을 그릴 수도 없죠. 개인의 능력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시대가 달라서예요.

제가 속한 자원봉사능력개발원도 그래요. 기본적으론 위탁사업을 운영하지만 자체 사업을 만들고 사람을 데려가려면 후원 베이스가 튼튼해야 하거든요. 1년에 한 번 후원행사를 하면 당장 티켓 판매 수로 티가 나요. 결국 실적이잖아요.

게임, 인터넷 방송을 좋아하다 보니 스트리머랑 비교하게 되는데요. 그들은 별풍선을 1,000원만 쏴도 후원자를 위해 이름을 불러주고 춤을 춰주잖아요. 우리 세대는 기브 앤 테이크가 확실해요. 주머니에서 나가는 금액만큼 나에게 돌아올 걸 계산하죠. 일반 사람들이 사는 세상의 논리를 어느 정도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걸 어떻게 내재화해 갈 것이냐의 문제인 만큼 아예 새로운 방법을 발굴해야 하는 시점 같기도 해요. 이슬아 작가가 매일 한 편씩의 일기를 배송하는 형태로 센세이션을 일으켰잖아요. 가치를 말하면서도 돈을 벌고 있죠. 물론 단체가 말하는 가치와 후원자의 후원이 일대일 교환 가능한 부분은 아니죠. 그래도 변화하는 환경을 외면하고 갈 순 없다고 봐요.

후원 자원을 많이 당겨올 수 있는 사람이 어젠다를 쥔다는 건 변하지 않아요. 선배 세대만큼 후원자를 당겨올 것인가, 새로운 방식을 찾을 것인가 우리 세대도 답을 찾아 나가야겠죠.

Q. 스스로를 활동가라고 규정하나요?

절반은요. 사회복지사 직업 특성상 급여가 나라에서 나와요. 돈값은 해야 한다는 생각이 항상 있어요. 나머지 절반을 활동가라고 규정하는 이유는 ‘주체적으로 좀 더 나은 사회를 고민해야겠다’. ‘고정된 판 위에 서 있지만 계속 두드려야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계속해서 정책이나 주변 활동가의 고민에 관심을 가지려 해요.

김보현 기자
bh@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