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운동가들] 복지운동 진지 구축에서 노년운동 꿈꾸는 은재식

#지질학도의 장래를 바꾼 보육시설
#보육원에서 만난 아이들, 그람시의 진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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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한때는 세상을 바꿔보겠다며 사회운동에 나선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운동가라고 지칭하는 사람은 줄어듭니다. 사회운동을 하는 운동가들은 오늘도 사람을 만나고, 제도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려고 애를 씁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운동권 특권 세력 청산은 시대정신”이라며 자신과 대립하는 정치인과 싸우기 위해 운동가들을 몽땅 폄훼하기도 합니다. 운동권이라는 어원은 독재정권 시기 민주화운동에 나선 학생운동가를 고립시키기 위해 만든 용어였습니다. 그들 중 대다수는 기득권으로 살아가지 않았고, 또 일부는 1987년 민주항쟁 이후 오늘날까지 사회운동을 이어가는 운동가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2020년대 사회운동을 시작한 운동가들도 있습니다. 2024년, <뉴스민>은 매달 1980년대 사회운동을 시작한 운동가, 1980년대 이후 태어난 운동가들의 삶과 더 나은 공동체를 바라는 운동가의 고민을 듣기로 했습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사회운동가로 나서는 이들이 많지 않다고들 한다. 여전히 고군분투하는 운동가들이 있지만, 2024년 사회운동가를 선망하는 이들은 10년 전, 20년 전보다 줄었다. 대구에서도 그렇다. 80년대 대학에 다녔고, 90년대 시민사회운동을 시작해 현재까지 활동하는 운동가들은 그 이후 세대와 비교하면 여전히 중책을 맡고 있다. 단체에서 대표를 맡거나, 사무처장을 맡거나. 흔히 정치권에서 지칭하는 ‘X86’과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여전히 정계에 들어가지 않고, 사회운동을 하는 ‘X86’이다.

▲2018년 11월 [사진제공=복지연합]

은재식 우리복지시민연합 사무처장도 ‘X86세대’의 일원이다. 특이한 것은 그가 80년대 후반부터 ‘복지’라는 화두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1987년 6월항쟁을 전후한 한국 사회는 많은 운동가들에게 혁명의 시대였다. 먼지 쌓인 책장에 있을 ‘사회구성체’ 논쟁이 활발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혁명을 꿈꾸던 이들에게 사회복지는 ‘개량주의’의 산물에 불과했다. 소련 붕괴와 함께 시민사회운동이 시작할 때도 복지는 중요한 의제가 아니었다. 시간이 흘러 21세기에 접어들자, 복지는 누구도 외면하기 어려운 의제가 됐다. ‘사회복지’라는 단어는 그대로지만, 시민들이 받아들이는 어감과 의미는 달라졌다. 그것이 ‘20세기 운동가들’ 편에서 은재식을 첫 번째로 꼽은 이유다.

▲2012년 9월 무상급식 조례제정 촉구 대구시의회 9일간 단식 중인 은재식(왼쪽) [사진=은재식 제공]

우리복지시민연합(복지연합)은 복지운동단체다. 사회복지시설 비리 고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강화, 장애인 탈시설 운동, 복지아카데미, 사회복지사 처우개선 운동, 친환경의무급식 실현 단식농성, 사회복지영화제 개최 등 셀 수 없이 많은 활동을 해왔다. 복지연합이라는 단체의 활동은 겹겹이 쌓여 열거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복지 사각지대에 놓여 있던 시민의 궂긴 소식이 들어오거나 대구시가 예산을 삭감하거나, 지방의원 비리를 살펴볼 때면 한 곳에 전화를 건다. 우리복지시민연합이다” 지난해 후원의밤을 앞두고 기자가 복지연합의 소식지 월간 <함께하는 세상>에 기고한 내용 중 일부이다.

그렇다면 사회운동가 은재식은 어떻게 살았을까. 은재식은 1998년 11월 21일 창립부터 현재까지 사무처장을 맡고 있다. 전신인 우리사회복지연구회(1994년), 사회복지시설연구회(1992년)부터 상근 활동을 시작했으니, 33년째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지질과학을 전공했던 은재식은 왜 운동가로 살게 됐을까. 내년이면 환갑을 앞둔 은재식은 사회운동을 어떻게 전망하고 있을까. 2월 1일 복지연합 사무실에서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2024년 2월 1일 우리복지시민연합 사무실에서 만난 은재식.

#지질학도의 장래를 바꾼 보육시설

30년 넘게 복지를 의제로 사회운동을 하게 된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물었다. “지금까지 할 거라고 생각을 안 해봤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은재식은 1984년 경북대 자연과학대학 지질학과에 입학했다. 졸업 이후에는 서울대 대학원 지질과학과 석사과정을 마쳤다. 대학원 졸업 후 1992년 대구로 돌아와 대학 선·후배들과 ‘사회복지시설연구회’에서 상근 활동을 시작했다. 자연과학을 공부하던 은재식의 삶을 바꾼 것은 동아리 ‘한마음’이다.

▲1991년 사회복지시설연구회 회원총회 [사진=은재식]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사회복지시설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면서 자원활동을 했어요. 바람쐬러 가듯이 가벼운 마음으로 1주일에 한 번 가면 되는 거니까. 당시 사회와 대학 분위기가 매일 최루탄 터지고, 돌 던지고 그랬죠. 학생운동 핵심 멤버는 아니지만, 사회과학 공부를 하면서 복지시설에 가보니까, 너무 부조리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모를 잃은 아이들과 만나면서 우리 사회에 가난이 세습되는 현장을 봤어요. 당시 동아리 활동을 같이하던 친구가 서구 비산동에 비영리 탁아소를 만든다고 해서 함께 참여했어요.”

은재식은 대학원에서 지질과학을 전공하면서도 매주 대구에 내려와 탁아소 만드는 일에 동참했다. 비슷하게 활동하던 단체들이 전국적으로 있었고, 서울지역에도 ‘시설문제연구회(1988년 창립)’라는 단체가 있었다.

“대학원을 다니며 시설문제연구회 활동에도 참여했어요. 전국 사회복지시설 직원들한테 노동조건, 근로기준법, 각종 사회복지시설에서 나오는 정보를 신문으로 발행하는 데 참여했죠. 91년~92년 전국적으로 우리처럼 활동하는 단체들이 사회복지 쪽에 대선 공약을 어떻게 만들 것이냐를 갖고 대책위를 만들었어요. 건강보험, 국민연금. 각종 사회복지시설 문제를 다뤘는데 거기에 장애인 운동하는 단체도 있었죠. 88패럴림픽 거치면서 장애운동하는 조직들이 생겨났어요.”

대학원을 마치고 진로를 고민하던 은재식은 92년 어느 신문에서 본 환경운동연합 연구원 모집 광고를 보고 환경운동을 고민했다. 전공이 지질과학이어서다. 대구에 내려와 선·후배들을 다시 만난 은재식은 1992년 8월 사회복지시설연구회에서 상근 활동을 시작했고, 1994년 7월 우리사회복지연구회 창립으로 이어졌다. 가장 궁금한 질문을 했다. 기껏해야 대학을 갓 졸업한 사회 초년생들과 대학생들이 모여서 만든 작은 단체가 월급은 줄 수 있었을까.

“월급은 없었죠. ‘장애인복지신문'(1989년 4월 7일 장애인 당사자가 직접 창간한 신문)에서 인터뷰하러 온 적이 있어요. 당시 후배들이 서울에서 집회 마치고 장애인복지신문 기자와 술을 마시다가 대구지사를 맡겠다는 약속을 하고 온 거예요. 후배들이 생각하기에 활동비가 생기지 않겠느냐는 소박한 취지였어요. 92년 처음 내려와 상근을 시작하니까, 취재하러 다니면서 그쪽 사람들도 만나보고 분위기 파악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그때 김명희 씨(은재식의 배우자)와 2명이 기자 일을 시작했어요. 주 1회 나오는 신문이 한 달에 3,000원을 구독료로 받았는데, 장애인복지신문 부수가 대구에서 많을 때는 800부 정도 나갔던 것 같아요. 그때 알게 된 구족화가들의 크리스마스카드 판매 대행을 맡았어요. 94년부터 팔았는데 95년에는 판매액이 2,000만 원을 넘겼어요. 주문이 밀려 들어와서 차가 필요해서 50만 원을 주고 중고차를 사기도 했어요. 96년부터 판매는 그만했어요. 그렇게 활동비를 충당했죠.”

▲장애인복지신문 기자로 활동했던 은재식. 기사는 1996년, 97년. [사진=장애인복지신문 축쇄판 촬영]

월급 없는 직장, 은재식도 2024년까지 활동을 할 거라곤 생각치 못했다.

“결과적으로 제가 총대를 멘 셈이 됐죠. 지금도 후배들이 후원그룹으로 남아있기도 하고, 그때 안 했으면 이 활동이 남아 있겠느냐고 가끔 만나면 이야기해요. 부모님에 대한 고민은 많이 됐어요. 내가 결정해서 가는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돌아가신 아버님은 실망했다고 하셨는데, 어머님은 후원회원이세요. 성격상 미래에 대한 계획을 상세히 짜놓지는 않아요. 사회복지 쪽에 진지를 한번 구축해 보면 재미있겠다고 큰 틀에서 생각하고 시작한 거죠.”

#보육원에서 만난 아이들, 그람시의 진지론

1990년대 초반은 아직 복지라는 의제가 보편화되기 전이다. 은재식과 같은 80년대 대학생에게도 복지는 일상적 주제는 아니었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던 이들에게 ‘복지’는 비판 대상이었던 ‘사회민주주의’적 의제에 불과했다. 학생운동의 중심에 있지 않았다고 했지만, 은재식에게는 그런 시각이 없었는지 물었다.

“사회구성체 논쟁을 한다던가, 우리보다 투철하게 논쟁한 사람도 많겠지만 저는 맴돌았어요. 주변에 학생운동을 한 친구도 다양한 사람들이 있어요. 봉사활동 하러 다니던 보육원을 늦은 밤 갑자기 찾아갈 때가 있었어요. 한겨울에 난방비도 제대로 지급 안 되고, 불도 안 들어오는 아주 좁은 방에 여름 이불을 덮고 자는 모습이 기억에 많이 남았어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 사회 민중의 모습을 저는 거기서 봤어요. 대학원을 졸업하고, 호황기였던 터라 갈 수 있는 직장도 많았는데, 그때 막연히 생각이 났어요. 내가 사람들한테 이야기했던 것을 실천하는 일을 해야겠다.”

1990년대 초반은 소련의 붕괴 이후 많은 학생운동가들이 혼란에 빠진 시기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진지론 영향을 받은 것이냐고 물었다. 은재식은 그렇다고 했다. 전공이 지질학이라 10년, 20년 정도는 아주 짧은 시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와 함께 활동하던 동아리 후배의 석사학위 논문 주제도 그람시와 사회복지운동이었다. 1

“아무도 안 하던 분야잖아요. 주로 학생들이 모인 단체였는데, 단일대오와 같은 조직도 아니고, 하나의 목표가 정립된 모임도 아니었어요. 뒤죽박죽이었어요. 그렇지만 그람시의 진지론으로 가야 한다, 대구라는 동네에서 우리는 진지를 구축하자고 했던 것 같아요. 어떻게든 사람을 모으고 사회복지운동을 키우자, 각자가 진지를 갖고서 깊게 연계하면 되지 않겠냐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94년 우리사회복지연구회로 조직을 개편했어요. 그때 함께하던 후배가 그람시를 주제로 논문을 쓴 것도 지역에서 사회복지운동을 다룬 처음이었을 거예요. 사무국장을 맡으면서 임원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해서 경북대 사회학과에 온 김규원 교수를 무턱대고 찾아갔어요. 흔쾌히 맡아주시겠다고 하면서 이후에도 복지연합 대표를 맡으셨어요. 탁아소 운동, 영유아보육법 투쟁을 했고, 회원도 늘리게 됐어요.”

1994년 우리복지사회연구회 사무국장 명함을 들고 현장으로 뛰어든 은재식은 당시 민중운동, 노동운동과 만나면서 낯선 시선도 받았다고 한다. 87년 6월항쟁 이후 시민사회단체가 하나둘 생겨났다. ‘복지’가 낄 틈은 많지 않았다. 그렇지만 IMF 구제금융사태를 겪으면서 복지에 대한 한국 사회의 고민과 더불어 사회운동의 고민도 확장됐다.

▲1994년 우리사회복지연구회 시절 사회복지대학 강좌에서 [사진=은재식 제공]

“1987년 이후 여성단체도 생기고, 낙동강 페놀 사태로 공해추방연합(환경운동연합의 전신)도 생기고,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1989년 창립, 대구경실련 1990년 창립)도 생겼어요. 당시에 대구지역 시민사회는 삼각편대, 경실련, YMCA, 흥사단이었죠. 우리는 그때 신생 단체였죠. 또 복지라는 태동 자체가 사회민주주의의 산물이고, 노동자 탄압을 무마시키기 위해 떨어져 나온 거기 때문에 생소했죠. 민중운동 단체에서도 낯선 시각으로 봤고요. IMF 맞으면서 실업 문제가 대량으로 생겼고, 1998년 전 국민 대상 국민연금 제도가 도입돼요. IMF를 마주했는데 실업자가 대거 발생하니, 낼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거죠. 실업자대책위원회에 함께 참여했어요. 200만 명의 실업자가 나온 상황에서 복지시스템이 하나도 안 갖춰져 있었던 거죠. 생존권 위기에 내몰린 걸 보면서 사회운동진영 내에서도 복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봐요. 우리사회복지연구회도 연구회라는 이름을 떼자고 했고, 1998년 11월 21일 우리복지시민연합을 창립하게 됐어요.”

그람시도 이탈리아 공산당 정치인이었다. 은재식이 유럽 복지국가의 모델을 살펴봤다면 정당도 선택지에 있지 않았을까. 은재식은 “정당운동을 할 만한 우리 조직 역량이 안 됐어요”라고 명징하게 답을 했다. 함께 진지를 구축했던 사람들 때문일까. 운동가 은재식에 대해 질문했지만, 대답의 근저에는 함께 활동했던 동료들까지 포괄하는 조직적 판단의 묻어났다. 케케묵은 고집이지만,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사회운동을 하던 운동가들이 활동하던 단체에서 소통 없이 현실 정치로 뛰어드는 일이 흔해진 시기에 흔치 않은 대답이다.

▲2000년 우리복지시민연합 사무실에서 [사진=은재식 제공]

“개인적으로는 당시 시민운동의 도덕성, 정치적인 중립성에 대한 엄격한 잣대가 있기도 했어요. 내가 조직의 실무책임자인데 정당에 가입하게 되면 명목상 제약이 있었어요. 시민사회운동이 정치적 개입을 어디까지 할 것이냐가 화두가 되기도 했어요. 기득권의 반격이기도 했지만, 실질적으로 우리 역량이 안 됐어요. (당시 민주노동당이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했잖아요?) 우리가 생각하는 정치적인 지향점이 통일되어 있지 않았어요. 사회복지시설 비리, 인권침해 문제 대응하기도 버거운 상황에서 그 부분에 대해서는 논의가 따로 없었어요. 회원조직으로 운영하는 곳이기 때문에 지향점 정립 없이는 불가능했죠.”

대학생 은재식의 봉사활동 경험은 운동뿐만 아니라 결혼으로도 이어졌다. 대학 졸업 후 보육원 보육사로 있던 김명희 씨를 만났다. 우리사회복지연구회 시절인 1995년 총회에서 보육원에 있는 아이들을 가정에서 키우자는 안건이 통과됐고, 부설 ‘해뜨는집’ 운영을 그해 9월 시작했다. 은재식은 그렇게 위탁가정과 함께 1997년 결혼 생활도 시작했다.

“아이들을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느냐는 질문이 나왔어요. 우리가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 집이 필요하다고 해서 북구 대현동에 사글세를 얻었어요. 그게 대안가정운동의 시작이었어요. 김규원 대표가 100만 원 후원하고, 또 다른 선배가 돈을 보탰어요. 10개월 후 돈이 떨어지니까, 전세를 얻자고 했죠. 아이들이 갈 곳이 없으면 안 되니까요. 그때 집에 가서 결혼 조건으로 미리 돈 좀 달라고 어머니에게 부탁했어요. 그렇게 반지하를 얻었고, 그때 생후 4개월 된 아이가 첫째 딸이에요. 2002년 대안가정운동본부로 우리복지시민연합 부설로 만들었고, 2007년 사단법인 대안가정으로 분리했어요. 성장기 아동들이 집단 생활하는 것에 대한 대안이 필요했어요. 지금 장애인 탈시설 문제를 이야기하는데, 입양이나 가정위탁도 탈시설 운동의 일종이에요.”

▲1997년 결혼식을 치르고 있는 은재식 [사진=은재식 제공]
▲배우자 김명희 (사)대안가정 사무국장과 함께 [사진=은재식 제공]

#노년세대 운동을 고민하는 은재식

20대 후반 직업적 운동가가 된 은재식도 환갑이 내년으로 다가왔다. 복지연합을 거쳐 간 활동가도 많았지만, 은재식의 경로로 운동가가 되길 바라는 시대는 아닌 상황이다.

“2024년이 됐는데, 결과적으로는 젊은 층 유입이 적고, 시민사회운동이나 시민운동에 대한 기대랄까, 메리트도 떨어지잖아요. 하루 이틀 만에 만들어진 건 아닌 것 같고, 누적된 결과가 아닌가 싶어요. 보수언론들의 시민운동 헐뜯기도 있지만, 그것 말고도 시민운동 전반적으로 미래에 대한 대응전략이 많이 부족한 것 아닌가 싶어요. 최근 경기가 위축되고, 회원수도 확장이 안 되고, 참여하는 시민도 적어지는 것이 한꺼번에 이렇게 겹치니까 당장 전략 수립은 쉽지는 않아요. 그렇더라도 늦었지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죠.”

지난 과거를 돌이켜보면서 아쉬운 점은 없었을까.

▲2006년 3월 보건복지부 전국 1호 주민감사청구 기자회견 [사진=은재식]

“어느 직업을 가졌든 60이 되면 퇴직하고 그러잖아요. 그때쯤 되면 긍정적인 측면도 있고, 아쉬운 측면도 누구나 있겠죠. 시민운동을 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때그때 이슈를 한 가운데서 경험했다는 장점은 있어요. 다만 아쉬운 부분은 사람관계, 조직관리, 경영과 같은 부분에서 경험 없이 운동 이런 부분에 대한 경험이 부족한 상황에서 운동가로 살다보니 현재 위기에 대한 대처 능력이 떨어질 수가 있어요. 사회의 변화에만 관심을 가지고, 주변에 있는 사람끼리 만나다 보니 현세대의 변화나 요구에 둔감한 측면도 있어요. ‘은 처장이 기업이든 다른 쪽에 있다가 들어왔으면 조금 더 역량을 발휘할 수 있지 않았겠나’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운동에 부족한 부분이 아닌가 생각해요.”

쉽지 않은 숙제 앞에서 은재식도 쉽사리 답을 내놓지는 못했다. 2006년 장애인 활동보조서비스 제도화 운동에서 처음 봤던 은재식은 늘 활기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사회운동의 어려움을 이야기할 때만큼은 조심스러웠다. 운동조직도 변화해야 하고, 처우도 개선해야 하는데 조건은 만만치 않다. 쉬지 않고 말을 뱉어내는 은재식이 고민에 찬 모습은 오랜만이었다. 특히, ‘우리복지시민연합=은재식’이라는 이야기가 스트레스라고 했다.

“‘우리복지시민연합=은재식’은 30여 년간 활동의 결과이자 활동가 재생산의 어려움을 표현하는 말이죠. 활동 계기, 이념, 세대, 젠더 등의 차이를 극복하기에는 경제적 활동기반이 취약하고 간극이 너무 많이 벌어져 이를 해결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우리복지시민연합=은재식’의 등식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단체의 다양한 노력과 더불어 헌신성 있는 활동가가 필요해요. 이것이 조화롭게 될 때 단체의 지속가능성은 높아지고 축적된 노하우와 인적관계 등이 이어질 수 있어요. ‘우리복지시민연합=은재식’을 인식하면 할수록 오히려 단체와 개인활동은 위축될 수 있어요. 제2의 ‘우리복지시민연합=○○○’이 나올 수 있도록 기반을 다지고 시스템을 구축하는 노력을 함께해야죠. 이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갈등도 있고 어려움도 있겠지만, 사람이 있다면 조직이 책임지고 나간다면 어렵지 않은 과정이라 생각해요.”

한국사회 고령화는 사회운동도 마주한 문제다. 사회운동가와 이를 지탱하는 저변도 고령화를 맞았다. 20세기 운동가들은 어느덧 60을 전후하고 있고, 이를 지지하던 시민도 같이 나이를 먹었다. 은재식도 환갑을 목전에 두고 있다. 그래서 그는 고령화된 사회에 필요한 운동을 고민하고 있다.

“고령화되면서 실버산업 이야기를 하는데 운동도 마찬가지죠. 연령대로 보면 노인들이 주체가 되는 운동이죠. 인권적인 측면이든, 제도 감시도 마찬가지죠. 노인이 주축이 되는 운동은 잘 없는 것 같아요. 장애인 당사자 운동이 2000년대 중반부터 확장됐고, 노동인권, 청소년 문제가 운동으로 만들어지는데 노인은 없어요. 노인회가 있지만, 다른 목소리는 잘 나오지 않아요. 대구지역 노인은 보수적이라고 젊은 사람들은 터부시하고, 세대 간 갈등을 조장하는 부분도 많죠. 건강한 목소리를 내는 것도 해야죠. 갈수록 해야 할 일이 많아지면서, 실제로 해야 할 운동이 뒤로 밀리는 것 같아요. 앞으로 노년세대 운동을 구체화하는 일을 꼭 해볼 생각이에요.”

천용길 기자
droadb@newsmin.co.kr

  1. (은재식은 그람시적인 시각에서 본 사회복지운동이라고 기억했는데, 제목은 ‘한국사회복지운동에 관한 정치사회학적 고찰(김상호, 경북대학교 사회학과 석사논문, 1994)’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