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백성이 나라를 거부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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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4년 정초부터 삭주부(현 평안도 삭주군 지역) 형리刑吏(법의 집행을 다루는 아전으로, 형방이라고도 함)가 분주해졌다. 삭주부 내 백성들 관련 소송이나 관련 소장들을 정리해 보고하라는 삭주부사 노상추의 명命 때문이었다. 지방관의 가장 핵심 업무 가운데 하나가 소송을 빨리 처리하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백성들의 딱한 사정을 파악하는 데에도 이만한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며칠 동안 문서를 정리한 형리의 보고서가 올라왔다. 소장을 유형에 따라 분류한 보고서를 보면서, 노상추는 삭주부사의 차원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산재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진영장에게 보고하고 대책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이 가운데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바로 삭주부 내 많은 백성들이 유랑민으로 떠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일부 백성들이 유랑민이 되면 남은 백성들이나 친족들의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남은 백성들 역시 관아에서 빌린 돈으로 인해 언제 유랑민으로 변할지 알 수 없는 상태라는 점이었다. 삭주부 백성들은 이미 고을을 떠났거나, 혹은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몰리고 있었다.

이유는 분명했다. 원래 변방 백성들은 힘든 상황으로 인해 흩어져 유랑민이 되는 경우가 다른 곳에 비해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는 했다. 압록강을 국경으로 두고 있는 변방의 특성상, 남쪽 백성들과는 다른 어려움이 있다. 특히 국경의 생활이라는 게 항상 동원되어 있는 군인들과 다를 게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늘 군역을 져야 하는 상황이기도 하지만, 일상적인 생활을 하다가도 유사시에는 언제나 가장 먼저 동원되어야 하는 사람들이 바로 변방의 백성들이었다. 지역에서 군역에 동원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들에게 주어지는 부역의 강도 역시 다른 지역과 달랐다. 국경의 특성상 성벽을 쌓고 국경을 튼튼하게 하는 일 자체가 그들의 일이었다. 당시 삭주부와 같이 국경 지역 지방관 대부분은 무관들이 맡다 보니, 지방관이라고 해도 백성들의 삶보다는 국경을 튼튼하게 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지방관이 성벽이나 국경이 허술하다고 판단하면, 백성들은 힘든 부역에 시달려야 했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백성들은 떠나는 방법 외에는 대안이 없어지기 마련이다. 유랑민들이 느는 이유였다. 그런데 삭주부의 경우는 폐사군廢四郡 가운데 하나인 자성慈城 옆이어서 백성들 입장에서는 고을과 나라를 버리고도 피할 곳이 있었다. 다른 곳에 비해 유랑민들이 많은 이유였다. 물론 폐사군이라고 해서 조선 땅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조선의 군사력이나 법이 미치는 범위가 아니었다.

원래 폐사군은 압록강 이북 지역, 즉 지금의 만주와 간도 지역에 설치한 조선의 군현으로, 중국과의 국경선 경계가 정확하게 설정되기 전에 설치되었다. 그러나 여진족들의 소요가 워낙 많았고, 압록강 건너에 있는 군현이다 보니 조선에서도 여기에 즉각적으로 대응하는 게 쉽지 않았다. 결국 공지空地(지역을 비워 사람이 살지 않도록 함) 정책을 펼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이처럼 폐사군은 조선 영토 밖으로 이해되었지만, 삭부주 유랑민들 입장에서는 피난처로 이만한 곳도 없었을 터였다.

그런데 노상추가 좀 더 상황을 파악해 보니, 이처럼 많은 유랑민이 발생한 이유가 단순히 군역이나 부역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더 큰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관아에서 백성들에게 내어 준 빚 때문이었다. 과도한 빚은 현대인들에게만 위협적인 게 아니었다. 물론 관아에서 돈을 빌려주는 행위는 국경 지역의 어려운 경제 사정 때문이기는 했다. 사정이 궁한 백성들은 많은데 돈을 빌릴 곳이 마땅치 않자, 그나마 경제력이 유지되는 관아에서 급한 돈을 빌려주었던 터였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 정상적인 수준의 이자라 해도 백성들이 이를 관리하는 게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조선시대 일반적인 식리殖利(이자)는 대략 3할, 즉 30% 수준이었다. 현대에 사채를 통해 받을 수 있는 최대 이자보다 높았다.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집안이 넉넉한 민호도 한 번 관아에서 빚을 잘못 지면 망할 수밖에 없을 지경에 이르기 일쑤였다. 곤궁한 상황에서 관아에 빚을 내는 경우는 말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다.

실제 삭주부 상황은 심각했다. 당시 노상추의 기록에 따르면 삭주부 내에서 민간에게 놓은 각종 항목의 빚이 1만 6천 냥에 이르렀다. 당시 한양의 괜찮은 기와집 한 채가 100~150냥 정도였고, 봉화 지역의 경우 큰 규모의 기와집과 그에 딸린 초가집 2채, 그리고 넓은 밭 전체가 100냥에 거래되는 수준이었다. 다시 말해 한양의 기와집 160채에 해당하는 금액이 삭주부 백성들이 갚아야 할 빚이었다.

게다가 관아의 빚은 아무리 좋은 의도에서 출발해도, 이를 갚지 못했을 때는 더 큰 문제로 비화되기 마련이다. 개인 간 채무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채무를 상환하지 못한 백성은 국가를 대상으로 한 범죄와 동일하게 취급받을 수밖에 없었다. 지방관 입장에서는 악성 채무자로부터 빚을 받기 위해 감옥에 가두고 곤장을 치는 일이 많을 수밖에 없을 터였고, 갚지 못하는 백성들은 고을, 아니 아예 나라를 떠나야 했다.

국가의 존립 목적, 그리고 국가의 공무를 시행하는 사람들의 존재 이유는 백성들의 목숨과 재산을 보호하는 데 있다. 모든 정책은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시행되고, 이를 위해 국민들에게 의무를 부과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라가 백성들의 노동력과 재산을 착취하고 돈을 빼앗는 사채업자가 되는 순간, 백성들에게 나라는 더 이상 나라가 아닐 수밖에 없다. 조선의 백성을 포기하고 무법천지인 폐사군으로의 유랑을 선택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