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054] 진짜 ‘진짜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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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통합’, ‘빛의 혁명’, ‘진짜 대한민국'”

일요일 저녁 일을 마치고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TV 화면에서 결연한 낱말들이 쏟아졌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수락 연설이다. 듣기에 좋은 말이라 생각하면서도, 빛의 혁명을 완수하자는 말에 이르러서는 막막하고 답답한 마음도 한편에서 자라났다. 연설문에 모든 말을 다 담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무려 ‘빛의 혁명’을 완수하겠다는데. 지난 넉 달 동안 첨예하게 다뤄진 광장의 요구를 어느 정도는 언급해야 하지 않았나 해서다.

그의 연설에는 어떤 이에게는 다소 불편할 첨예한 광장의 목소리는 빠져 있다. 차별 당하는 성소수자들은 광장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했다. 고용불안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하청 노동자들은 노동권 증진과 함께 노조법 2, 3조 개정을 요구했다. 여성은 여성 혐오, 성차별이 없고 여성이 안전한 사회를 요구했다. 장애인들은 이동권 보장과 탈시설 권리를 요구했고, 그리고 시민으로 취급조차 되지 못하는 이주민들은 사람을 죽거나 다치도록 몰아세우는 강제 단속 제도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양손의 떡을 놓고 싶지 않은 정치인으로서는 하기 어려운 말일 테다. 어느 한쪽의 표를 깎아 먹을지도 모르는 말이니. 그렇지만 ‘빛의 혁명을 완수하겠다’라는 말은 앞의 이야기들과 분리할 수 없는 말이다. 각자의 빛나는 것을 들고 광장에 나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빼놓고 ‘빛의 혁명’을 말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시민들은 광장에서 민주공화국을 재건하자는 말과 함께, 각자의 삶의 위기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 문제를 ‘먹사니즘’이나 ‘잘사니즘’이라는 말에 욱여넣을 수 없다.

대선 후보 수락 연설이 있었던 27일은 전국 각지에서 이주민들이 이주노동자 메이데이를 열던 날이다. 응원봉을 든 시민의 광장에 함께 했던 이주민들은 윤석열 파면 이후에도 여전히 일상이 아닌 벼랑 끝에 서 있다. 영장 없이 이주민을 검문해 체포하고, 추방할 수 있는 강제 추방 제도 때문에 이주민들이 죽거나 심하게 다치고 있다. 얼마 전 경산에서 강제 단속 탓에 다리와 척추에 골절상을 입은 이주노동자는 병원비가 없어 퇴원 후 원룸에 홀로 지내고 있다. 이주민 단체 활동가들이 간병과 통원 치료를 지원하고 있지만, 앞으로의 병원비도 생각하면 다친 이주민은 눈앞이 캄캄해진다.

그래도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단속을 피하다 사망하는 사례도 부지기수다. 인천에서는 단속을 피해 이주노동자가 목재 더미에 숨었는데, 숨은 그 장소에서 사망해 8일 뒤에 발견됐다. 목재에서 나온 화학 약품 탓으로 추정된다. 출입국관리법개정으로 외국인보호소에 장기 구금된 난민 신청자들을 석방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법무부는 갑자기 장기 구금 난민 신청자들을 무더기 강제송환에 나섰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어떤 난민신청자는 추방 절차 진행으로 본인 동의 없이 보호소에서 공항으로 수갑을 차고 이송됐다가, 항공사 직원이 ‘본인 의지로 탑승하는 것이냐’며 확인하자 송환은 무산됐다고 한다. 윤석열 퇴진 이후, 이주민이 겪는 계엄 상황과 같은 일상이다.

이주민들의 문제는 지역소멸 위기에 허덕이는 지역민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낙후한 산업단지에서 사업주들은 미등록 이주노동자 고용에 따른 처벌을 감수하면서도 그들을 고용해 일을 시키고 있다. 위장 하도급 형태로 공장을 운영하면서, 이주노동자를 불법으로 파견받아 사용하는 형태도 만연하다. 경북 한 지역 공단 원룸 밀집 지역에서는 집주인들이 집 주변을 돌면서 감시하는 모습이 자주 확인된다. 미등록 이주민 단속으로 세입자가 추방되는 것을 우려한 집주인들이 단속반을 감시하러 나선 것이다. 비극인지 희극인지 모를 상황이 유구하게 반복되는 동안에도, 이주민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는다.

윤석열 파면 이후에도 광장은 이어지고 있다. 그 광장은 한국옵티칼하이테크 해고 노동자들이 477일째 고공농성을 벌이는 불탄 공장에, 탈시설을 외치며 고공농성 중인 성당 종탑 위에, 임단협 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고공농성 중인 조선소 하청노동자의 철탑 아래에 광장이 있다. 이 모든 곳들이, 이곳에서 벌어지는 비극적, 희극적 참상들이 바로 ‘진짜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빛의 혁명을 완수하겠다’라고 말하려면, 이승만, 박정희 묘역을 찾아 참배하는 것보다 지금의 ‘진짜 대한민국’을 직시하고, 여전히 이어지는 광장을 먼저 찾아주길 바란다.

박중엽 기자
nahollow@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