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053] 9명의 ‘외계인’, 낯선 세계에 적응하기 6년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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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우리는 근본적으로 다른가?

많은 이들에게 추억의 명화이자 인생 영화로 기억되는 이탈리아 감독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는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어린 자식에게 필사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려는 눈물겨운 부성애가 펼쳐지는 작품이다. 그래서 해당 소재 영화치고는 직설적인 묘사를 상당 수준 자제하고 은유로 풀어내는 분위기가 시종일관 펼쳐진다. 하지만 작품 곳곳에서 삐죽 튀어나오는 끔찍한 시대상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후반부 강제수용소 장면보다 오히려 몇 곱절 몸서리쳐지는 순간이 기억난다. 주인공 귀도가 사모하던 교사 도라가 가문 간 약조에 의한 정혼자와 약혼 파티를 여느 장면이다. 파티장소인 호텔에서 웨이터로 일하던 주인공이 약혼식을 앞두고 마음이 쫓긴 나머지 평소와 달리 온갖 실수를 저지르는 장면이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지만, 그런 코믹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점점 우경화하는 시대상을 적나라하게 관통하는 찰나가 툭 튀어나오곤 한다.

도라의 동료 교사가 독일 연수 경험을 파티장에서 늘어놓는다. 추축국 중 우두머리인 나치독일의 선진적(?)인 교육 수준에 찬탄하던 그는, 독일 초등학교 1학년 수학 실력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그 문항 설명에 선량한 이들은 눈살을 찌푸리지만, 이미 파시즘에 경도된 다수는 박장대소하며 경탄한다. 바로 장애인 복지 수당에 허비하는 1년 예산과, 만약에 장애인을 사회에서 제거할 경우 절약할 수 있는 재원 산출법이다. 너무나 합리적인 자원 절약 아니냐는 교사, 맞장구치는 하객들의 풍경은 임박한 전쟁과 학살의 징후로 손색이 없다.

결국에 불길한 예상은 현실이 된다. 현대 이스라엘이 피해자 성격을 내세우고자 전가의 보도로 활용하는 홀로코스트엔 유대인만 해당하던 게 아니다. 전체주의와 우생학을 신봉하던 파시즘 체제는 이른바 ‘열등’한 존재를 무가치하다 여겼다. 그래서 인적 자원으로 쓺모가 없고 짐만 된다고 규정한 장애인과 소수자를 박멸하려 했다. 유대인이 가스실과 노역장에서 죽어갈 때 그 옆에는 집시와 슬라브 민족이 있었고, 성 소수자와 정치범 같은 ‘비국민’이 있었다.

인간성이 결핍된 기계적 합리주의는 그들이 규정한 ‘열등 인간’을 최대한 ‘활용’한 뒤 끝장내려 했기에 최대한 효율적으로 착취한 뒤 제거했지만, 장애인은 애초 논외였다. 강요되거나 은폐한 안락사가 은밀하고도 광범위하게 행해졌다. 마치 우월한 독일 민족에겐 원래 장애인이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처럼. ‘스파르타식 교육’으로 예찬하는 고대 도시국가 스파르타에서 허약한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5명의 검사관이 ‘건강한 시민’ 자격 심사 뒤 부적격 판정을 받은 태아는 절벽에 던져 ‘제거’했던 잔혹한 행태와 본질에서 다를 바 없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그저 과거 역사의 잊고픈 추악한 일화에 불과할 테지만, ‘장애인이 무용한 존재’이자 ‘공동체의 짐 덩어리’라는 대전제는 21세기 한국 사회에도 깊숙하게 뿌리를 내린 채다. 물론 대놓고 스파르타나 나치독일처럼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삭제’하진 않는다지만, 그런 인식이 계속되는 한, 장애인은 늘 ‘2등 시민’, 비장애인의 온정과 시혜에만 의존하는 존재로 규정될 수밖에 없다. 죽이는 대신에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로 격리하는, 즉 우리의 시선에서 ‘지우고픈’ 유혹에서 우리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9명의 ‘희망인’, 지역사회 상륙작전

‘가난은 나라도 어쩔 도리가 없다.’ 이 속설은 기성세대가 툭 하면 내뱉는 흔한 수식어다. 한국 현대사에서 숱하게 발견할 수 있는, 국가가 공동체 구성원을 보호하기는커녕, 억압하고 착취하는 ‘국가폭력’의 최종 가해자로 군림해 왔던 시간 동안 이는 세뇌하듯 주입된 논리다. 각자도생이 진리일 뿐, 국가의 시민 보호는 능력껏, 적당히 마음 내키면 수준에 머물곤 했다. 물론 너무 대놓고 그러면 사회가 무너지니 ‘모범시민’에겐 그런 본질이 피부로 느껴질 경우가 상대적으로 드물긴 했다.

하지만 국가가 내려다보는 시야에서 부담만 되는 존재들에 대해선 어땠을까? 먹는 입도 줄이고 국가 책임도 면할 겸 대한민국 국가는 전쟁고아를 ‘수출’ 산업 상품으로 써먹고, 도시 빈민은 부동산 투기 붐 때마다 보이지 않는 외곽으로 내몰았다. ‘부랑인’은 강제수용소의 판박이인 수용시설에 강제로 집어넣고, 장애인은 가족의 책임으로 오랫동안 전가했다. 먹고 살기도 힘든 시절에 생계 활동과 장애 가족 부양을 동시에 하기 역부족인 대다수 사례에서, 장애인 당사자는 대개 집 안에 감금되다시피 은폐되거나, 도저히 역부족이면 사회복지기관에 넘겨지는 운명이었다.

초반엔 무연고 부랑인으로 규정된 이들 위주이던 복지시설은 이해당사자 간 담합 과정에서 블랙홀처럼 장애인을 빨아들인다. 국가는 직접 관여해 책임지는 건 가능한 회피하려 했고, 민간과 종교기관이 부담을 짊어지길 기대했다. 이를 위해 관리·감독 기능을 소극적으로만 행사했다. 대신에 다양한 지원책 ‘당근’으로 대행과 위탁을 남발했다. 가족도 직접 챙기기보다 공인된 시설에 수용하는 게 편리해 보였다. 논리적으론 흠 잡을 게 별로 없지만, 가공할 사태가 여기에서 출발한 셈이다.

한국의 비리사학 문제가 사회적 환원이 아니라 부정과 탈법, 신분세탁이란 ‘잿밥’에 눈이 먼, 어딘가 뒤가 켕기는 기득권 집단의 대거 진출을 무방비하게 허용한 결과이듯, 사회복지시설 역시 비슷한 궤를 밟았다. 친일 경찰이나 독재에 부역한 자들이 번듯한 사회사업가로 변신하기에 이보다 좋은 게 없었다. 평범한 민간이나 종교단체의 경우라도 보는 눈이 없으니 직무유기와 일탈이 조장되기 딱 좋은 토양인 건 물론이다. 그 결과는 민주화 이후에야 서서히 빙산의 일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현세의 지옥이라 불리던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그런 참상은 전국 어디에나 존재했다. 대구엔 ‘희망원’이 바로 그랬다.

희망원의 진상은 조금만 검색하면 숱하게 쏟아지니 굳이 부연할 필요는 없겠다. 하지만 진실이 상당 부분 드러난 후에도 문제는 고스란히 남았다. 장애인 수용자 태반은 다른 시설로 옮겨지는 것 외에 대책이랄 게 없었다. 장애인 인권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탈시설’과 ‘자립’할 권리를 요구하며 근본적인 대안을 외쳤다. 그런 노력의 결과, 소수의 수용자가 시범적으로 지역사회에서 비장애인과 더불어 살 기회를 얻었다. 민아영 감독의 2025년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폐막작 <희망의 기록 2 : ‘나’를 찾는 시간>은 바로 그들의 6년간 기록이다.

‘이용인’, ‘00번’에서 자신의 이름을 되찾는 과정

영화에는 제목에 연결되는 부제목이 있다. “최중증·중복 무연고 장애인의 지역사회 정착기”란 문구가 따라붙어 있다. 평균 20에서 30년은 기본으로 희망원 내 장애인 거주 시설에 수용되어 살던 이들은 기본조건이 그랬다. 복수의 장애를 중하게 지녔고, 시설을 나와도 달리 의탁할 곳이 없기에 자립 생활 기회를 얻지 못했다면, 그저 다른 시설에서 이전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삶에 그쳤을 이들이다.

갇혀 살던 동물을 막상 철창에서 풀어놓으면 겁을 내며 웅크리곤 한다. 작품 속 공익제보자 증언과 미디어 보도만 들어봐도 이들의 처지가 동료 시민이 아니라 관리대상으로만 여겨진 것을 깨닫게 된다. 한 방에 00명, 관리자 1인당 0명 담당으로 숫자나 별명으로만 불리던 이들 중 9명은 이제 ‘동굴’에서 나와 낯선 바깥에서 ‘나’로 살아야 한다. 탈출을 꿈꿨을지라도 실제로 겪으면 당황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그게 수십 년 만의 외출이라면 더더욱.

초반에 자립 체험을 위해 자원활동가나 활동지원사와 어울리는 ‘희망인’들의 모습은 천차만별이다. 조심스럽게 자신이 거주하는 아파트 단지 마당에서 열린 미술체험 행사에 참여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한데 섞이는 이도 있지만, 주변에서 뜻을 금방 알아차리기 힘든 괴성만 질러대는 이도 있다. 늘 관리와 통제 대상으로만 존재하던 이들이 자율성에 서툴기에,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지역사회에 동화하길 기대하는 게 무리인 건 당연해 보인다. 과연 이들이 제대로 적응해 살 수 있을까? 영화는 그런 궁금증을 Q&A 묻고 답하기처럼 풀어내기 시작한다.

<1부 – 대구광역시립희망원은 어떤 곳이었나?>는 지역에 거대한 파장을 일으켰지만, 어느새 기억에서 희미해지는 희망원 사태의 실상과 본질을 간략하게 정리한다. 영화의 자기 완결성을 위해 필수적으로 거칠 몫이다. 1959년부터 당시 전국 각지에 산재하던 부랑인 수용시설로 출발한 이 거대 시설은 1980년 가톨릭 대구대교구에 위탁이 옮겨진다.

장애인 비중이 늘자 2009년, ‘글라라의 집’이란 별도 시설이 세워지고, 대외적으론 모범 운영시설로 국가 표창도 받는 등 상대적으로 잘 운영되듯 보였지만, 실상은 판이했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만 해도, 2010-2016년 기간 조사만으로도 309명이 시설에서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의문사 의혹도 적지 않았다. 용기 내어 인터뷰에 응한 공익제보자의 생생한 증언은 더욱 충격적이다.

6년의 시간을 관찰한 카메라, 깨달음에 도달하다

<2부 – 최중증·중복 무연고 장애인 9명, 거주 시설에서 나오다>는 그런 조건에서 인생 대부분을 그저 매일 반복하며 보내던 희망인이 ‘낙타가 바늘귀 통과하는’ 과정을 간신히 통과해 시설 밖으로 나오며 벌어지는 상황이 펼쳐진다. 2019년에 여론의 뭇매를 맞고 일부 진상이 드러나자 글라라의 집은 폐쇄 절차를 개시한다. 하지만 증언자들의 염려 그대로, 그저 다른 시설로 이관되는 게 고작이다. 만약 진상 규명을 위한 노력의 후속으로 탈시설 요구가 끈질기게 이어지지 않았더라면, 희망인 9명 역시 그랬을 게 뻔하다. 그렇게 인생 역전 기회를 얻은 이들의 첫 출발은 하지만 위태롭게만 보인다.

수십 년 동안 자기 생각과 기호를 주장은 고사하고 표현하는 게 금기시된 이들은 명확하게 의사를 표시하는 데 서툴기만 하다. 거의 평생 못하게 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한 사람의 시민으로 살아가려면 이제는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말처럼 쉽지 않다. 여전히 수줍어하며 지원사에 의존하기 일쑤거나, 혹은 한꺼번에 분출하는 욕구에 억지 부리듯 보이는 경우가 태반이다. 확인 가능한 의사 표현 대부분은 그야말로 ‘원초적 본능’, 즉 먹고 자는 등등에 머문다. 사회생활을 해본 적 없으니, 가게에서 계산을 먼저 하고 취식을 해야 한다는 기본예절을 갖추지 못해 온갖 소소한 사고가 발생한다.

우리는 종종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장애가 있는 동료 시민이 돌발행동을 일삼는 걸 목격하곤 한다. 놀라거나 당황스럽고, 혹자는 두려움을 표시하기도 한다. 당연한 즉자적 반응이다. 하지만 대개 실체적인 위험에 이르진 않는다. 주변에 보호자나 지원 인력이 늘 따라붙고, 장애인의 증상에 관한 기초상식을 다들 갖춘다면 어렵지 않게 대응 가능한 경우다. 그렇다면 문제의 원인과 책임이 과연 장애인에게 있는 걸까? 오히려 장애인 주변의 비장애인, 그리고 사회 전체가 바뀌어야 하지 않느냐는 주제가 묵직하게 제기된다.

<3부 – 개인별 지원, 삶의 변화를 만들다>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조금씩 전진하는 희망인과 주변의 노력을 관찰한다. 중증 중복 장애를 지닌 희망인이 대구광역시에서 일상을 영위하려면 활동 지원은 공기와도 같다. 그러나 자주 보도되듯, 현행 지원제도는 시간 제약으로 최소한의 가사와 외출 지원에 머물고 만다. 이래서는 곤란하다. 행정당국의 원죄를 추궁하며 제기한 덕분에 2021년, 희망인 9명에 대해 24시간 활동 지원 서비스를 대구시가 보장하는 결실에 이른다. 이 조치는 희망인 자립 생활에 전기가 된다. 화면에 6년이란 시간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처음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곁에서 함께 하던 이들의 표정도 여유로워진 티가 역력하다. 아마 영화를 보던 관객의 심정도 별반 다르지 않을 테다.

그런 ‘이심전심’은 이어지는 전문가 해설로 확신에 도달한다. 물리적 한계를 들이대며 늘 회피하던 방식, 즉 장애인을 최대한 좁은 공간에 제한하고 익숙한 활동만 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시행착오를 감수하며 비장애인과 동등한 무대에 개방하는 게 근본적인 대안이란 확신이다. 어려운 전문지식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확연히 자폐증상이 완화된 희망인들의 행동거지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탈시설 요구의 근본적인 핵심이자, 우리가 오랜 세월 당연하듯 믿어온 ‘우상’의 파괴가 필요한 이유를 더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진단과 전망, 무엇을 할 것인가? 혹은 해야 하는가?

이제 대망의 마무리로 접어든다. <4부 – 이제는 지역사회의 변화로>는 영화를 만든 이들의 소박한 소망이 만개하는 순간이다, 역경을 극복하며 ‘시민’의 일부로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희망인들의 해방된 기쁨과 함께 관련 활동가들의 후속 과제 전망이 찰싹 따라붙는다. 24시간 지원제도가 보편적으로 도입되기 전까지는 자립한 장애인의 안전문제는 늘 초미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시설에 갇혀 살든, 사회에 더불어 살든 갈수록 심각해지는 사회적 재난과 기후위기 대처는 화두다. 인접한 포항 대지진 당시 장애인들이 겪어야 했던 불안과 고초를 떠올리면 공감하기 어렵지 않은 문제다.

영화가 누차 지적한 것처럼, 지원체계 및 연결서비스는 여전히 걸음마 단계다. 여전히 잔여 복지 시각에 머무는 지역사회 내 자원 마련 부족이 핵심 원인이 될 테다. 장애인을 그저 비생산 인구, 자원 먹는 잉여로운 존재로만 치부하기 때문에 벌어진 현실이다. 제작진과 출연자 공히 입을 모아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을 촉구하는 데 여념이 없다.

희망원 퇴소자, 아니 ‘생존자’라 불러야 마땅한 9명의 희망인은 어찌 보면 로또 맞은 것처럼 행운을 잡은 극소수에 불과할지 모른다. 워낙 큰 사건이라 봉합에 급급하던 행정당국의 양보 덕분에 자립시범사업 참여 기회를 얻었고, 다른 시설 아니라면 딱히 보낼 연고도 없었기에, 그야말로 삼박자가 척척 맞은 정말 드문 사례다. 무슨 말일까? 바로 이 영화 속 희망인과 같은 가능성을 지닌 수천 수만 존재가 어딘가에 지금도 수용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뜻이다.

감독은 2022년, 본 작품의 전편이라 할 <희망의 기록 1>을 이미 선보인 바 있다. 두 편 모두 관련 영화제에서 호평과 주목을 받은 바 있다. 하지만 지역사회에 해당 연작은 거의 알려지지 못했다. 대개 이런 유형의 독립 다큐멘터리 작업은 그저 장애나 다큐멘터리 위주로 소개하는 극소수 영화제, 혹은 관련 단체 내부로만 유통되다 시효를 다하고 말기 때문이다. 여기엔 아무래도 소재 중심성에 그치거나, 영화적인 완성도보다 당장의 실용성을 추구하는 흔한 속성도 한몫할 테다. 물론 그런 특성을 통해 전국 곳곳에 포진한 장애인 단체 교육과 소규모 영화제 상영기회를 얻어 소중한 명맥을 잇고 있지만,

하지만 아쉬움은 남는다. 지역사회를 몇 년간 뒤흔들었고 현재도 온전히 해결하지 못한 중대 현안 관련 지속적인 관심의 부재는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희망원은 민간위탁을 받으려 하는 기관이 없어 울며 겨자먹기로 대구시가 떠맡았지만, 들쑥날쑥한 정책 방침 탓에 여전히 표류중인데 말이다. 그런 현실에 카메라가 가진 힘은 무시할 수 없는 동력이 될 텐데도. 그런 상황에서 지역사회 현안과 공조하며 기록 작업을 이어가는 다큐멘터리 창작층의 취약함은 늘 따라붙는 고민이 될 테다. 물론 장애 분야에만 한정된 쟁점일 리 없지만.

<작품정보>

희망의 기록 2 : ‘나’를 찾는 시간
2025 | 한국 | 다큐멘터리 | 41분
감독 민아영
제작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 (사)대구사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
(사)장애인지역공동체 부설 나로 장애인자립생활주택지원센터

김상목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