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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경북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대경인의협)가 창립 30주년을 맞아 지난 14일 기념식과 학술토론회를 열었다. ‘모두의 건강과 모두의 의료, 새로운 30년의 약속’이라는 슬로건 아래 열린 이번 행사는 지난 30년간 협의회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새로운 다짐을 나누는 자리였다.

대경인의협의 출발은 199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전국적으로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가 결성되었고, 대구경북 지역에서도 민주화운동과 사회참여 의식을 지닌 의사들 사이에서 지역 조직의 필요성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경북대, 영남대, 계명대 등 대학 출신 젊은 의사들과 선배 의료인들이 뜻을 모았다.
1994년 말부터 본격적인 준비모임이 시작되었고, 수차례 논의를 거쳐 1995년 4월 8일 115명의 발기인이 참여한 가운데 창립발기대회를 열었다. 이어 6월 1일, 대구 범어동 다래웨딩홀에서 136명의 회원이 모여 공식 창립대회를 개최했다.
창립 초기부터 대경인의협은 단순한 의사단체가 아니라 “시민과 환자, 그리고 사회적 약자를 위한 의사 실천 조직”을 표방했다. 창립 직후 열린 ‘의사와 환자 관계의 새로운 정립을 위한 시민 대토론회’는 그 상징적인 첫 걸음이었다.
IMF 외환위기와 의료제도 개편 국면, 의약분업 논란, 이주노동자 진료사업 개소, 노숙인 진료활동, 송전탑 및 사드 배치 반대 현장 진료지원 등 의료현장의 경계를 넘는 실천이 30년 동안 이어졌다. 특히 코로나19 시기에는 미등록 이주민 아동의 예방접종 공백을 메우기 위한 자체 예방접종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이를 국가 예방접종 사업 확대의 계기로 만들기도 했다.
“세상이 아프면, 의사도 아파야 한다”는 의식은 여전히 이들의 실천을 이끌고 있다. 30주년 행사에서 김동은 진료사업국장은 “앞으로도 소외된 이웃 곁에서 진료 가방을 메고 어디든 뚜벅뚜벅 함께 걷겠다”고 다짐했다.
이어진 학술대회는 ‘한국 의료와 의사의 정체성’을 주제로 심도 있는 발표와 토론이 진행됐다. 최은경 경북대 의대 의료인문학 전공교수는 발제에서 한국 의사 집단의 역사적 형성과정이 전문 직업성보다는 개업주의와 기업가주의 성향으로 고착됐다고 진단했다.
최 교수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민간 병원 중심의 의료체계 발전 과정이 이러한 구조를 만들었으며, 집단적 자율통제 전통이 약했던 점도 한국 의사의 정체성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최 교수는 “의사들은 개업과 병원 소유를 통해 자산을 축적하는 자영업자로 성장했으며, 이는 서구의 전문직업성 모델과는 다른 경로”라고 지적했다
이상원 대경인의협 전 학술국장은 토론에서 의사 개인의 개업 준비 과정을 상세히 소개하며, 개업 이후에도 자영업자로서 평생 비용·수익 논리에 따라 의료를 운영하게 되는 현실을 지적했다. 공공의료 기관조차 재정 논리에 따라 운영되는 한국 의료 시스템의 구조적 문제 역시 강조됐다. 특히 상업주의와 전문가로서의 자부심이 동시에 공존하는 한국 의료의 독특한 모순을 짚었다. 이 전 국장은 “의사라는 꿈으로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자영업자가 되어 있다”고 토로했다
김진우 대경인의협 청년사업국장은 젊은 의사들의 집단 행동 배경으로 ‘엘리트 의식’과 ‘소득 감소에 대한 불안감’을 지목했다. 의과대학의 집단적 교육과정과 의사사회 내 평판 문화가 집단 동조를 강화하고 있으며, 일부 전공의들이 피부미용 시장으로 이동하는 현실도 시장주의의 한 단면임을 지적했다. 김 국장은 “명분도 필요 없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집단 행동의 동력이 강해졌다”고 밝혔다.
이상원 기자
solee412@newsmi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