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우리가 사랑이다 – 성주촛불 300일에 부쳐 /김수상

11:38

[우리가 사랑이다]
성주촛불 300일에 부쳐

김수상

삼백일, 삼백일이다

삼백일이면 엄마 뱃속에 있던 아기가
세상을 다 얻는 시간이고

빌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돌부처도
몸을 돌려 앉는 시간이고

성밖숲의 왕버들이 수만 개의 잎들을 달고
다시 피어나는 시간이고

소성리 할매들의 주름이 하나 더
늘어나는 시간이다

삼백일, 삼백일이다

우리가 외친 구호는 광화문의 구호가 되었고
우리가 밝힌 촛불은 전국의 횃불로 타올랐다
우리가 부른 노래는 항쟁의 양식이 되었고
우리가 낭송한 시들은 사랑의 피가 되었다

우리가 밝힌 촛불의 촛농을 다 끌어 모으면
작은 산 하나를 쌓고도 남았을 것이다

군청 앞마당에 무릎을 꿇고
교복을 입은 어린 딸과 함께
1인 시위를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손에 손을 잡고 인간띠잇기를 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던 때가 어제 같은데

피를 적셔 쓰던 혈서도
삭발의 머리카락도
다 떠나보내고
이제 우리만 온전히 남아서
지켜온 촛불이 삼백일이 되었다

우리의 촛불은 씨앗불이다
우리가 예언하고 일을 도모하면
원하는 대로 다 되었다
개누리당 장례식을 치렀고
박근혜의 탄핵을 외쳤다
감옥에 갈 연놈들은 감옥으로 보냈고
권좌에서 끌어내릴 놈들은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아직 질긴 놈 몇몇이 독사눈을 뜨고 살아남았지만
머지않아 그들의 더러운 음모는
밝은 햇빛 아래 다 드러날 것이다

촛불을 들면서
우리는 뼈아픈 자기반성을 했고
세월호가
제주의 강정 마을이
밀양이
청도 삼평리가
평택의 대추리가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이
바로 우리 성주의 삶과 직방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당신과 나 사이에 놓인 땅은 모두가 거룩한 사랑의 땅임을
몸으로 깨달았다

분열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경전철과 고속도로의 물질공세에
금방이라도 항복할 것 같았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물질이 아니고 사랑을 믿는 사람들이다
물질만 믿으면 사랑이 도망가지만
사랑을 믿으면 물질이 저절로 온다

우리는 한여름의 땡볕과
한겨울의 북풍한설에 강철처럼 단련된 촛불들이다
외롭고 눈물 나는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우리를 서로 보듬어 안아주며
여기까지 왔다
아무도 사랑의 힘에 대해 믿지 않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믿으며
울고 싶은 울음을 꽉 참고
여기까지 왔다

우리를 비웃은 사람들조차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우리의 사랑을 믿고
우리가 노래하지 않아도 우리의 노래를 이제는 듣는다
소성리로 성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밥과 반찬과 라면과 생수들의 연대를 보아라
세숫대야라도 두드리며 평화오라고
외치는 금연 할매의 눈물을 보아라
낡은 유모차로 미군의 트럭과 맞서며
결국은 싸워 이기는 소성리 할매들의 투쟁을 보아라
원불교 교무님의 길거리 기도와
천주교 신부님의 길거리 미사를 보아라
우리들 항쟁의 뜨거운 다큐멘터리, 파란나비효과를 보아라
아이들이 고사리 손으로 쌓아올린 소성리 평화의 돌탑을 보아라
끝없이 이어지는 평화동맹군의 발걸음, 발걸음을 보아라

미래의 역사는 말하는 자들의 몫이 아니라
경청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어두운 구석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허공에서 스스로 하늘 감옥을 짓고 외치는
노동자의 말을 들어주어야 한다
사람들이 썰물처럼 다 빠져나가면,
아픈 관절을 만지며 쓸쓸히 남아있을 소성리 마을회관 할매들의
사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성밖숲의 왕버들이 몸을 뒤집으며 웃는다
소성리의 민들레가 웃고
소성리의 엉겅퀴가 웃고
소성리의 아카시아가 웃는다
자기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80명이 두려워 8,000명의 병력으로
작은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부식트럭에 기름을 몰래 싣고
승용차 뒤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시누크 헬기로 장비를 실어 나른 저들이 움찔하며 물러나고 있다
우리가 뭉쳤기 때문이다
거짓은 겁이 많기 때문이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쟁하는 사랑기계다
우리는 소성리 할매들의 주름을 등에 업고 싸우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사랑의 기억만 데리고 평화의 나라로 가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이긴다
우리는 사랑이다
할매는 웃고 사드는 울어라!
사드는 가고 평화여 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