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의 시적 여정] (3) 뱃전에 머리 대고 울던 것은 여인을 위해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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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황규관 시인이 연재하는 ‘김수영의 시적 여정’은 매달 5일, 20일 뉴스민에 연재한다. 인용된 작품의 전문 수록은 저작권자와의 협의를 마쳤습니다.]

“급작스럽게 조제남조(粗製濫造)한 히야까지 같은 작품”이라고 자학한 또 다른 작품인 「아메리카타임 지」에는 드물게 자신의 과거를 회고하는 구절들이 몇 등장한다. 1연 1행~2행에서는 김수영의 만주 생활의 흔적이 묻어 있다. 다만, “흘러가는 물결처럼/ 지나인(支那人)의 의복”이 다음 행인 “나는 또 하나의 해협을 찾았던 것이 어리석었다”와 어떻게 공명하는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또 하나의 해협을 찾았던 것”과 2연 3행의 “나는 수없이 길을 걸어왔다”는 의미론적으로 조응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시적인 표현인 “그리하여 응결한 물이 떨어진다/ 바위를 문다”는 어쨌든 이 작품을 가까스로 유지시켜 주는 버팀목이며 동시에 “또 하나의 해협을 찾”으며 “수없이 길을” 걸어온 것에 대한 어떤 긍지를 표현한다. 평생에 걸쳐 김수영의 이 긍지는 그의 설움이나 비애와 부딪쳤고, 이 부딪침을 통해 일어난 영혼의 방전 현상을 그는 썼다.

문제는 3연의 “와사(瓦斯)의 정치가여” 이하이다. “와사(瓦斯)”는 가스(gas)의 일본어 표기라는데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이 뜬금없는 문구는 읽기에 혼란을 가져온다. 더군다나 “와사(瓦斯)의 정치가”는 “활자처럼 고웁다”. 이 작품을 쓰던 “해방 후의 혼란기”는 그의 “텐더 포인트”였던 것을 감안하면 그 “혼란기”에 대한 통칭으로 “와사(瓦斯)의 정치가”를 쓴 게 아닌가도 싶다. 김수영의 시에는 적을 친구로 돌리는 역설(paradox)의 한 수가 자주 숨어 있는 점을 감안해서 읽으면 “와사(瓦斯)의 정치가여/ 너는 활자처럼 고웁다”를 전혀 이해 못할 것도 없다.

최하림이 쓴 『김수영 평전』(실천문학사)에 의하면, “김수영이 일본으로 간 것은, 집안에서는 ‘유학’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처음으로 열렬히 사랑했던 고인숙을 따라간 면이 클 것이라고 보고 있다. 특히, 그렇게 생각한 이는 김수영의 노모다. 아들의 마음과 성미를 잘 아는 노모는 경성제대나 연희전문, 보성전문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고 하기보다는 그의 가슴을 뜨겁게 태웠던 그의 사랑이 그를 충동하고 유인했을 것이라는 것이다.”(49p) 사랑의 결과가 어찌 되었는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시인의 노모가 막연하게 “그 사람이 마음의 상처를 입었던 것 같애”라고 한 말로 미루어, 순탄치 못했으리라 짐작될 뿐이다.”(50p) 첫사랑에 대한 감정은, 평전에 의하면, 제법 길게 지속되었다. 또 1953년에 쓴 「낙타 과음」이란 산문의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창 밖에는 희고 노란 빛을 띤 낙타산이 바라보인다”라는 문장에는 다음과 같은 부기가 붙어 있다.

낙타산은 나와는 인연이 두터운 곳이다. 낙타산 밑에서 사귄 소녀가 있었다. 나는 그 소녀를 따라서 지금으로부터 약 15년 전에 동경으로 갔었다. 내가 동경으로 가서 얼마 아니 되어 그 여자는 서울로 다시 돌아왔고, 내가 오랜 방랑을 끝마치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 그는 미국으로 가버렸다. 지금 그 여자는 미국 태평양 연안의 어느 대도시에서 결혼 생활을 하고 있으며, 영원히 이곳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편지가 그의 오빠에게로 왔다 한다. 나와 그 여자의 오빠와는 죽마지우이다.

최하림은 그 여성은 바로 고인숙이고, 고인숙의 오빠는 김수영의 “죽마지우”인 고광호라고 했다. 또 “그 뒤 김수영이 여러 여성들과 사랑을 나누었음에도 고인숙을 잊지 못했”다고 한다. 낭만적이었던 김수영의 첫사랑은 「아메리카타임 지」를 쓰던 순간에도 그의 가슴에서 일렁이고 있었던 것 같다. 이 같은 전기적 사실을 감안하면 3연의 “내가 옛날 아메리카에서 돌아오던 길/ 뱃전에 머리 대고 울던 것은 여인을 위해서가 아니다”가 어떻게 나왔는지 유추 가능하다. “뱃전에 머리 대고 울던 것은 여인을 위해서가 아니다”는 구절에는 사랑의 파토스를 드러냄과 동시에 자신의 삶을 그 파토스 아래에 꿇어앉히지 않겠다는 의지도 엿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아메리카에서 돌아오던 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연히 김수영이 “아메리카”에 간 적은 없다. “아메리카”는, 해방 이후 일제가 이식한 근대와 ‘다른’ 근대, 즉 ‘아메리카식’ 근대를 표상하며, 이 당시 김수영은 이 ‘아메리카식’ 근대와 자신의 ‘뿌리’를 형성한 근대 이전의 시간 사이에서 힘겨운 길을 모색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4연에서 “오늘 또 활자를 본다/ 한없이 긴 활자의 연속을 보고/ 와사의 정치가들을 응시한다”는 바로 그 점을 말하고 있다.

이 같은 정서는 같은 해에 쓴 「가까이 할 수 없는 서적」에서도 드러난다. 김수영에게 모더니즘은 식민지를 벗어난 이 땅의 문학이 받아들여야 할 단순한 사조가 아니었다. 그에게 모더니즘은 문학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관계되는 것이었다. 더불어 그것은 열렬히 추구해야 할 이념도 아니었다. 오로지 그것은 현실로서의 근대였던 것이다. 「연극하다가 시로 전향-나의 처녀작」에서 고백했듯 박인환이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계획했을 때 김수영도 김병욱과 함께 참여하려고 했다가 김경린과 김병욱 사이에 “헤게모니 다툼으로 병욱은 빠지게” 된 틈을 타 자신도 하차하게 되는데, 무엇보다도 박인환의 “모더니즘을 벌써부터 불신하고 있던” 차라고 분명히 적었다. 이 말은 일찍부터 김수영이 모더니즘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증언해준다. 김수영에게 모더니즘, 즉 근대는 가까이할 수도 없고 멀리할 수도 없는 엄연한 삶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가까이 할 수 없는 서적이 있다
이것은 먼 바다를 건너온
용이하게 찾아갈 수 없는 나라에서 온 것이다
주변 없는 사람이 만져서는 아니 될 책
만지면은 죽어버릴 듯 말 듯 되는 책

—「가까이 할 수 없는 서적」 부분

그것은 “용이하게” 접근할 수 없는 무엇이지만 그렇다고 모르쇠 할 수도 없는 현실이었다. 이 시에서 김수영이 “주변 없는 사람이 만져서는 아니” 된다고 말할 때, 거기에는 박인환, 김경린처럼 모더니즘을 단순한 외적 양식으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는 비판이 숨어 있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자신도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는 고백이 되기도 한다. 그 책은 “캘리포니아라는 곳에서 온 것만은” 확실하다. (「아메리카 타임 지」에서 말한 “아메리카”가 여기에서는 “캘리포니아”로 등장한다.) 이렇게 김수영이 모더니즘을 ‘아메리카 문명’으로 인식한 것은, 해방 공간의 역사적 상황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일제 식민지 당국이 물러가고 미군정이 들어선 사실은 곧 미국의 문물과 문화가 이 땅의 곳곳에 침투하기 시작했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미국 문물과 문화에 대한 예민한 비판 의식은 아마 이때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메리카 문명’이 이 땅의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 것을 김수영은 “치욕”이라고 느낀 것이 분명하다.

김수영의 ‘아메리카 문명’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한순간의 정서가 아니다. 훗날의 일이지만 대한민국 근대 시사에서 전무후무한 욕설이 등장하는 「거대한 뿌리」(1964)에서도 그것은 드러나고, 1963년에 쓴 「물부리」란 산문에서도 “시단에서까지도 외국에나 갔다 온 영어 나부랭이나 씨부리는 시인에게는 점수가 후하다”며 ‘아메리카 문명’에 대한 이 땅의 식민적 근성을 비아냥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수영은 그 “치욕”을 감내한다. 아니 도리어 그 “치욕”에 매혹되기도 했다. 그래서 “어린 동생들과의 잡담도 마치고/ 오늘도 어제와 같이 괴로운 잠을/ 이루울 준비를 해야 할 이 시간에/ 괴로움도 모르고/ 나는 이 책을 멀리 보고 있다”. 여기서 핵심은 ‘멀리 보다’는 상태다. 보긴 보는데, 가까이서 보지 않고 멀리서 본다. 김수영에게는 “이 책”을 멀리서 보는 것이 그나마 “바로 보마”(「공자의 생활난」)의 실천이었던 것이다. 괴로움도 모르고 보고 있다가 다시 “나는 괴롭다”. 이 모순된 상황을 “이를 깨물고” 사는 일이 김수영의 모더니즘의 출발점이었다. 여기서 다시 “이를 깨물고 있네!”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느낌표까지 붙일 정도로 강조한 것은, 이 이중 상황에 대한 괴로움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가까이해서도 안 되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자신이 매혹되어가고 있는 솔직한 심정이 “이를 깨물고 있네!”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마지막 결구는 반복으로 채워진다. “가까이 할 수 없는 서적이여/ 가까이 할 수 없는 서적이여.” 여기에서도 매혹되지만 저어하려는 이중 정서가 담겨져 있다. 변주 없는 반복은 그게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면, 시적 화자의 딜레마를 드러내는 데 유용하다. 이렇게 1947년에 생산된 김수영의 작품들은 “아메리카”로 표상되는 근대의 문물과 문화 앞에서 분열을 앓고 있었다. 시간의 불가역성을 그가 모를 리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이라는 타자를 통한 ‘새로운’ 시간도 섣불리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시란 것은, 이 불가역적인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다른 시간을 상상하며 창조하는 일을 제 사명으로 한다. 이때 시인이 먼저 체험해야 할 시간은 아이온의 시간이다. 크로노스의 시간을 분절하여 아이온의 시간, 즉 크로노스의 시간을 발생시키는 내재적 평면으로서의 시간을 느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문제는 김수영 시의 심층에 깔린 초월론적인 바탕을 더듬어야 ‘간신히’ 파악 가능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감안해야 할 것은 김수영 자신의 삶이 해방 공간의 혼란기에 의해 직조되고 있다는 크로노스적 상황이다. 김수영의 작품을 구체적인 현실, 또는 정치적 상황과 떼어서 살피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정치는 단순한 현실정치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정치에 대한 직접적인 발언은 4·19혁명 직후부터 5·16쿠데타 직전까지에 국한되긴 한다. 대체적으로 비평가들과 연구자들은 김수영 시의 바탕에 깔린 정치적 감각이 마치 4·19혁명을 기점으로 드러난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이는 시인의 내면 상태를 상상하기보다 작품화된 물증을 주로 살필 수밖에 없는 ‘학문의 속성’ 때문에 벌어진 일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