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돋보기] 주왕산 ‘무장애탐방로’를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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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이 많이 쪘다. 3층 계단을 오르는데도 숨이 찼다. 동네 뒷산에 소풍 가자는 학부모들의 제안도 고사했다. 조금 움직이는 것이 그렇게 힘들 수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몸무게는 인생 최고의 지점을 갱신하기에 이르렀다. 바쁘다는, 힘들다는 핑계로 피하던 운동을 더 미룰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러 마침 본업보다 산악인으로 전향을 꿈꾸는 한 신문사 기자의 제안으로 몇 명의 멤버를 구성해 등산을 시작했다.

시작은 가벼운 경주 남산이었다. 그 후로 이곳저곳을 탐방하며 체력을 길렀다. 함께 다니니 힘들지 않고 그럭저럭 재미도 붙었다. 같이 등산하던 이들은 조금씩 몸무게 감소의 효과도 누리는 중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가을이 찾아왔다. 단풍이 아름답다는 경북 청송 주왕산 국립공원을 가기로 했다. 산행을 시작하는 지점에서 의외의 이정표를 만났다. ‘무장애탐방로’라는 표식이었다.

▲주왕산 국립공원 입구에서 ‘무장애 탐방로’와 유모차, 휠체어 이용 등산로를 만났다.

보통 ‘장애인전용구간’ ‘장애인전용시설’이라는 단어는 많이 접했지만, ‘무장애탐방로’라는 표식은 신선했다. ‘너는 장애인이니 이 길로만 다닐 수밖에 없어’가 아닌, ‘장애가 하나도 없는 길이니 누구나 편하게 마음대로 다닐 수 있습니다’는 것은 매우 다른 알림이다.

그 표지판이 고맙고 반가운 것은 내 오랜 기억 속 아픔 때문일 수도 있었다. 2006년 가을은 단풍이 지독히도 빛나던 해였다. 그해 여름은 햇살이 몹시도 뜨거웠고, 가을 단풍도 풍성하고 아름다웠다. 그해 가을 엄마는 단풍산행을 나서는 길에 갑자기 쓰러졌다. 뇌출혈이라고 했다.

엄마는 그 길로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서 석 달하고도 열흘을 꿈속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중환자실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었다. 추위가 물러갈 때쯤 엄마는 깨어났지만 장애 1급이라는 꼬리표를 달았다.

이후로는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이 와도 우리 가족은 산행 생각을 하지 못했다. 밝게 빛나던 단풍나무 아래에서 쓰러졌던 엄마와 실려 가던 구급차 소리, 그리고 시간마다 임시로 짜 맞춘 관들이 들락날락하던 뇌병동 중환자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엄마는 본인이 왜 장애인으로 인식되고 사람들의 시선을 받아야 하는가에 대해 매우 고통스러워했다. 대부분 중도장애를 겪는 이들의 경험이겠지만, 엄마는 가족들을 힘들게 할 정도로 심했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안 되고, 장애인이기 때문에 해야 하는 것들에 지쳐갔다. 세상은 엄마더러 장애이기 때문에 문제라고 했고, 가족들은 엄마를 세상에 적응시키기 위해 같이 힘들었다.

이제 십 년이 넘은 일이다. 엄마도 조금씩 장애인의 삶에 적응하고 있고 가족들도 그 삶에 익숙해졌다. 아빠는 엄마 손을 잡고 조금씩 세상 밖으로 걸어 나오고 있고, 우리도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삶으로 복귀했다. 이제는 단풍이 짙게 물든 산은 우리에게 이제 아픔이 아닌 그저 보기 좋은 광경이 되었지만, 엄마에게는 아직 아니었다.

밝게 빛나는 가을 산은 엄마가 즐길 수 있는 영역은 아직 아니었다. 휠체어를 가지고, 혹은 목발을 짚고 엄마가 대한민국 단풍산을 오르기는 불가능했다. 아름다운 단풍은 아직 엄마에게 허락되지 않은 사치였다.

▲2018년 가을에 만난 주왕산 국립공원

엄마는 그렇게도 단풍이 아름다운 산에 가고 싶어 한다. 아직도 엄마의 SNS계정 사진은 붉게 물든 2006년 가을 산이다. 미국도, 유럽도 비행기를 타고 잘 다니지만, 갈 수 없는 단풍산을 올해는 갈 수 있을 것 같다.

올가을, 이제 겨우 걸음마를 뗀 조카와 엄마를 데리고 유모차와 휠체어가 함께 무장애 구간이 있는 단풍이 눈부신 주왕산을 다녀올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