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재 공동대표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 우리는 동지다

[기고] 우리는 결코 다른 세상의 사람들이 아니다.

14:23

[편집자 주]?함종호 4.9인혁재단 부이사장이 이득재 민중행동 공동대표의 반론 ‘전태일의 손가락을 볼 것인가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볼 것인가’에 대한 재반론을 보내왔습니다. <뉴스민>은 진보적 담론의 토론과 논쟁을 통해 더 나은 세상에 기여하는 모든 글을 환영합니다.

전태일 기념식·문화제 유감'(11월 9일, 함종호)
전태일의 손가락을 볼 것인가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볼 것인가(11월 23일, 이득재)

백남기 형님의 쾌유를 빕니다.

이득재 민중행동 공동대표께서 반박의 글을 올려주셨다. 대단히 고맙게 생각한다. 그 어떤 거친 논쟁도 불편한 침묵보다 낫다.

이득재 공동대표가 비판한 핵심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노동운동, 사회운동, 시민운동 영역 또한 서로 층위가 다른 세상 속 공간이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다. 노동운동이 자본의 착취에 저항하는 운동 공간이라면 사회운동은 국가에 의한 수탈이 지배하는 공간의 운동이다. 전자가 노동-자본의 힘 관계가 작동하는 영역이라면 후자는 노동시장 바깥 영역에서 국가를 상대로 하여 힘 관계가 펼쳐지는 곳이다. 시민운동은 굳이 노동 중심성을 내세울 필요가 없다. 그곳은 착취에서 벗어난 공간으로서 자본의 착취 방식 이외의 국가의 정치적 억압이나 차별에 저항하는 공간이다. 이 세 가지 운동 공간들은 서로 층위가 다르다. 노동운동은 자본의 착취에 맞서는 노동자의 운동 공간이고, 사회운동이 국가의 수탈에 맞서는 민중의 운동 공간이라면 시민운동은 계급적일 수도 없고 민중적일 수도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세 공간으로 분리된 분단 세계가 아니다. 하나의 공간에 세 층위의 운동이 있을 것이다. 다양한 층위, 다양한 유형의 운동이지만 하나의 공간이다. 그 공간은 바로 ‘시민사회’다. 즉, 3개 층위의 운동은 모두 시민사회에 속한다.

‘속류’적 인식을 벗어나서 ‘과학’적으로 해석한다면 시민사회는 봉건사회 이후 형성된 부르주아 사회를 의미한다. 즉, 부르주아 사회구성체를 곧 시민사회라고 한다. 이 개념의 원조는 홉스나 로크, 루소와 같은 계몽주의 이론가들이다. 그들에게 시민사회는 갈등을 ‘정치’적으로 해소해내는 조화로운 사회다. 그래서 절차적 민주주의에 의해 인간의 평등이 실현되는 부르주아 사회를 지지한다.

하지만 그들은 사유재산에 따른 부의 불평등에 대해서는 눈 감는다. 이와는 달리, 시민사회라는 이름을 짓기도 한 헤겔은 시민사회를 ‘경제’적으로 심하게 분열된 사회로 본다. 그래서 그는 이성적 국가에 의해서만 이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맑스는 시민사회가 경제적으로 분열되어 있다는 점에서 헤겔을 따르지만, 이 갈등은 계급투쟁에 의해서만 해결된다고 믿는다. 시민사회는 부르주아가 지배하지만, 노동자는 공장생활을 하면서 보편적 계급으로 성장하고 마침내 부르주아를 대신해 세상을 경영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트로 단련된다고 했다.

현재도 노동자들이 치열하게 투쟁하는 것은 이와 같은 ‘사회적 운명’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층위의 운동보다 그 임무가 크고 중차대하다. 그러니 “죽음까지 불사해야 하는 노동운동의 치열성, 자본의 착취에 맞서 싸우는 노동해방을 위한 그 열정”(이득재 공동대표 글 인용)을 우리 모두가 기대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맑스의 시민사회론을 정통으로 계승한 그람시는 시민사회를, 자본을 토대로 형성된 세력과 노동을 토대로 형성된 세력이 헤게모니 투쟁을 벌이는 공간으로 본다. 이때 각각의 세력은 유기적 지식인(혁명적 노동자 및 지식인)을 동원해서 자기세력의 정당성을 알려 세를 확산해내는 힘, 즉 헤게모니에 중요성을 둔다. 그래서 시민사회는 경제적 갈등에 의해 형성된 장이면서 그렇게 형성된 세력이 서로 세 확산을 위해 각축하는 장인 것이다.

우리 한국의 시민사회에는 크게 세 유형의 운동이 있다. 바로 이득재 공동대표가 얘기하는 노동운동, 사회운동, 시민운동이다. 현재, 각각의 운동은 층위만 다를 뿐 정치적 ‘지위’는 비슷하다. 노동과 자본이 각축하는 시민사회에서 한국 시민운동은 이 계급갈등을 이해 못한 채, 미국식 민주주의 수준의 운동에 머물고 있다.

사회운동도 그 뿌리가 민주화운동인 만큼 부르주아운동의 범주 내에 있다. 이름은 노동운동이지만 한국의 노동운동은 치열한 ‘투쟁’에 비해 보편적 계급에 걸맞은?‘정치’적 역할을 못하고 있다.

그래서 경제주의라는 비판을 받는다. 원리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시민사회 기본 갈등인 노동과 자본의 갈등을 대표하는 노동운동이 주체가 되어, 시민운동과 사회운동을 이끌어서 더 이상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닌 곳으로 향도하는 것이 올바르다. 이것이 바로 ‘노동주체성’이다. 그런데 노동운동을 시민운동, 사회운동과 다른 층위로만 이해하는 것은 바로 경제주의 노동운동 개념의 전형이다.

층위를 ‘분립’되어 ‘통일’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노동주체성을 해체하고 노동과 여타 운동들을 병렬로 나열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알튀세르에 의해 다리가 놓이고 발리바르, 라클라우·무페에 의해 급진민주주의론 전략으로 자리 잡는다.

그리고 이 경향은 ‘탈중심’의 포스트모더니즘 개념과 어울리면서 ‘탈노동’으로 발전하여 사실상 자본에 대항하는 중심축인 노동주체성을 해체한다. 즉 자본주의 내에서 민주주의운동을 발본적으로 밀고 간다면 결국 좋은 세상이 온다는 전략이다.

노동주체성이 아니라 각각의 운동들이 수평적으로 연대하여 민주주의를 위해 연합하는 구조를 가진다. 이 전략은 시민사회의 기본 갈등인 자본과 노동의 갈등을 희석화하여 개별 집단의 ‘경제적 요구’나 ‘부분’별 이해를 정치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수준으로 낮추어 버릴 가능성이 매우 크다. 결국 우리는 자본 앞에 분열되어 파편화한다.

이득재 공동대표가 얘기하는 개념 즉, ‘노동운동은 계급갈등이고 사회운동은 국가와의 갈등이며 시민운동은 이도저도 아니다’라는 개념은 현재로서 옳다. 더 살펴보면 현재 노동운동도 계급갈등이지만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지배 내에서 지위를 높이는 데 만족하는 수준이다.

사회운동과 시민운동도 부르주아 운동의 범주에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현실을 고착된 것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운동을 반자본 정치투쟁으로 발전시켜 나간다는 ‘변증법’적 태도를 지녀야 한다.

시민사회에서 헤게모니 세력은 노동자계급이어야 한다. 현재의 시민운동과 사회운동은 노동자의 헤게모니와 함께 굳게 결속해야 한다. 그래서 각각의 운동 ‘그 자체’와 또 이들의 ‘관계’는 재구성되고 재편성되어야 한다.

시민운동과 사회운동에 훌륭한 활동가도 많다. 이들을 중심으로 반자본 운동으로 발전해나가야 한다. 그러니 “시민운동은 굳이 노동 중심성을 내세울 필요가 없다”(인용)는 것은 사실상 노동주체성에 입각한 시민사회전략을 해체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유형의 운동을 현재에서 고착시켜 “서로 다른 층위에 존재하는 운동 공간들은 만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만날 수 없는 서로 다른 세상들인지 모른다.”(인용)라는 인식은 사실상 자본 앞에서 분열된 모습을 항구화하자는 것이다.

더구나 “서로 층위가 다른 세상들 속에 각자 살면서 자기 일을 하면 되는 것이다.”(인용)라는 인식은 직업적 활동가의 보편성을 해체하여 혁명적 결속을 무산시키는 것이다.

전태일 기념식은 반자본운동, 즉 노동주체성의 헤게모니를 형성하는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우리가 함께 시민사회에 대한 노동의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목표를 두고 노동운동과 사회운동과 시민운동이 결속해나가는 계기로 이해되었어야 한다. 기념식을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이 역할 분담?때문에?따로 개최할 수는 있지만 노동주체성이라는 관점에서 통일된 것이어야 한다.

“다른 세상에 대한 월권행위”(인용)에서 경제주의적 사고의 절정에 이른다. 우리는 결코 다른 세상의 사람들이 아니다. 함께 힘을 합쳐 이 무단적인 억압을 행하는 자본주의에 맞서 어깨를 걸고 맞서 싸워야 할 동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