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교협 시사 칼럼] 다시 무엇을 할 것인가? / 최인철

10:27

‘무엇을 할 것인가?’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이 1901년 발표한 논문이다. 레닌은 이 글에서 사회주의 조직의 임무와 구성, 그리고 노동조합의 활동과 그 속에서 혁명운동의 전위가 행해야 할 전술적 임무 등을 논하고 있다. 대학 시절 그 글을 읽으며 얼마나 잘 이해할 수 있었는지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몇 번이나 다시 읽으며 당시의 상황에서 취해야 할 행동에 대하여 영감을 얻으려 했거나, 혹은 그것을 읽는다는 자체만으로 마치 대단한 혁명가로 성장해가는 것처럼 우쭐대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에 대한 기억의 파편이 그 글에 대한 나의 인상이다.

30년도 훨씬 더 지난 지금, 나는 레닌이 그 논문 속에서 이야기하던 사회주의 혁명의 전위가 아니다. 아니 나는 오히려 위험할 수 있었던 당시의 내 세계관을 다시 직시하고 그 모습을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당시의 우리 중 어떤 이들은 여전히 마음속에 그 불씨를 품고 언제가 찾아올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 과거의 모습에 대한 극단적 단절과 함께 극우적 보수주의로 변절해서 자본과 권력에 아부하는 이들도 심심찮게 목격하게 된다.

대부분의 우리는 흘러온 시간만큼이나 아득하고 희미한 기억들로, 또는 가벼운 농담처럼 의미 없는 무용담으로 우리 젊은 시절을 마주한다. 그래서 얼마 전 소위 86세대라 불리는 우리들이 더 이상 변화의 동력이 아니고 사회의 변화를 가로막는 존재로 전락해 버렸다는 한 젊은 진보 국회의원의 일갈이 항변하기 힘든 비판으로 와 닿는다. 그리고 시대의 벽을 부수었던 그 노련함으로 다시 나서주기를 바란다는 그 호소가 아픔처럼 가슴을 후벼팠다. 대부분의 우리들은 과거와 단절하지도 못했고 과거를 이어가지도 못하고 있다.

우리들의 모습은 선물처럼 찾아왔던 민주화의 결실로 포장되었다. 물론 민주화도 그 과정 속에 함께 했던 모든 이들의 피와 땀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이야기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그 당시의 우리들이 잘못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80년대의 극심했던 자본주의적 폐해가 억압적 권력체계와 결합한 상황에서 시대를 고민하는 젊은이라면 자연스레 취할 수 있었던 모습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도 그때의 생각에 동의하고 있느냐에 대한 명시적 결론이다. 이는 단순한 반성의 문제가 아니고 다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기 위함이다.

사실 나는 더 이상 레닌이 말하던 사회주의 혁명에 동의하지 않는다. 20대의 내가 가졌던 생각이 오류와 논리적 비약들로 가득한 위험한 세계관이었음을 자인한다. 그렇다고 돈이 돈을 벌고 더 많은 돈이 더 많은 돈을 벌어주는 이 체제를 달게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그 방법의 오류는 인정하겠지만 젊은 시절 내가 가졌던 이념의 목적에 대한 가치는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때문에 이제 나는 레닌이나 로자 룩셈부르크가 배신자 혹은 개량주의자로 불렀고 내 스스로도 과거에는 그렇다고 믿었던 카우츠키가 주창한 사회민주주의적 개혁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혁명은 인위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설사 그렇게 온다 하더라도 그 내용이 바람직하지 못했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경험했다.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다시 이 화두를 고민하게 된다. 이 사회는 하나하나의 부분이 전체와 맞물려 톱니바퀴로 가득한 기계처럼 돌아가고 있다. 때문에 내가 할 일은 내가 속한 이곳에서 이 사회가 힘센 맹수가 지배하는 정글처럼 바뀌지 않도록 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헌법재판소는 최근 교수의 노조활동 권리를 인정했고 우리는 노조를 건설했다. 교수가 무슨 노동자도 아니고 노조냐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도 전문 지식으로 교육과 연구라는 무형의 생산적 활동을 통해 급여를 받고 생활하는 노동자다. 우리를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태도에는 노동을 천시하는 잘못된 사고가 자리 잡고 있다.

다만 우리가 노조를 통해 하려는 일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다른 직종의 노조와 마찬가지로 깊은 생각이 필요하다. 최근 의료계 파업사태에서 드러난 것들처럼 조직, 혹은 그 직종에 속한 사람들의 이기적 이익에만 몰두하게 된다면 사회의 지지도 받지 못할뿐더러 전체 사회 발전에 복무하는 것은 더더욱 힘든 일이 될 것이다. 나는 우리 교수 노조가 교원의 복리 후생 향상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개혁 운동에 동참하기를 희망한다. 그 시작은 우리에게 주어진 부당한 사회 구조적 압박의 제거다.

대학도 뉴밀레니움 이후 몰아친 신자유주의의 광풍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대학에 무한 경쟁의 원리가 도입되었고 학문의 세계를 돈으로 통제하려는 정부의 정책이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이 속에서 시대를 고민하고 진리를 논하는 것은 너무나 허무한 일로 치부된다. 교수 노조가 우리에게 부과된 이러한 모순의 제거에 앞장서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그 활동이 전체 사회의 개혁으로 연결되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서 우린 다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더 진지하게, 더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