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철의 멋진 신세계?] 불가항력적이거나 불가피한 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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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해 전 세계 79개국은 일제히 인공냉각제, ‘CW-7’을 대기 상층부에 살포한다. 지구 평균 기온이 적정 수준까지 내려갈 것이라는 과학자들의 낙관과 확신으로 만들어진 ‘CW-7’은, 그러나 머잖아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마저도 꽁꽁 얼려버린다. 새로운 기술이 재앙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해 줄 것이라는 야심 찬 기획은 결국 자멸로 귀결되고 말았다.

영화 <설국열차>는 절멸의 위기에서 겨우 살아남은 인류 마지막 생존자들을 싣고 어디론가 세차게 달린다. 열차가 달리기 시작한 지 벌써 17년째다. 대홍수가 멈추기를 기다리며 노를 저었던 ‘노아의 방주’처럼, 열차는 인류 스스로 초래한 신(新)빙하기가 끝날 때까지 달려야 한다. 끝을 향한 기약 없는 질주, 멈춤은 곧 파멸이다.

▲봉준호 감독, <설국열차>(2013)

열차간은 현실 인간사회의 축소판이다. 출구 없는 무한궤도 위에서 마지막 남은 인류는 극한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을 충실히 다해야만 하는 것처럼, ‘권력과 계급’ 혹은 ‘욕망’이라는 먹잇감을 두고 사투를 벌인다.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자들이 ‘안’에서 벌이는 이 극한 쟁투는 결국 공멸로 끝이 난다. 인간 역사의 종말을 알리듯, 열차는 설원에 멈춰 선다.

‘거대기계’가 만들어낸 신화와 맹신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설국열차>가 그리고 있는 것처럼 근래 인류는 과학기술로 발생한 문제는 과학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는 통념에 사로잡혀 있다. 이 영화에서처럼 지구온난화의 근원은 그대로 두고서 인공냉각제를 만들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발상은 SF의 가공된 이야기로만 치부할 문제가 아니다. 현실에서는 이러한 맹목적 믿음이 훨씬 더 깊고 널리 퍼져 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새로운 시작과 희망이 남아 있음을 암시하지만, 이는 이 영화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이러한 결말은 인류에 대한 연민과 소망이 만들어낸 덧붙임에 가깝다. 중요한 것은 그 희망조차도 기존의 인류와 그 인류가 만들어낸 패러다임이 종료되어야 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존의 패러다임이란 결국 기술산업문명에 대한 맹신을 뜻한다.

지난 세기 탁월한 문명비평가였던 루이스 멈퍼드는, 이러한 기계론적 패러다임의 근본 원인을 기술 자체가 아닌 기계화된 사회구조에서 찾았다. 멈퍼드는 이러한 기계화된 사회구조를 분석하기 위해, ‘거대기계, megamachine’라는 개념을 제안하는데, 이는 사회 전체를 하나의 기계처럼 작동하도록 조직하는 사회 모델을 뜻한다. 거대기계는 우리가 실제로 체감할 수 있는 ‘좁은 의미’에서의 기계나 기술이 아니라, 배면에서 작동하는 ‘보이지 않는 기계’를 말한다. 권력과 자본의 목적에 따라 사회 전체를 하나의 기계처럼 작동하게 만드는 힘과 원리가 바로 거대기계인 셈이다.

▲문명비평가 루이스 멈퍼드(1895~1990) [사진=www.laphamsquarterly.org]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거대기계가 단순히 근대에 나타난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멈퍼드는 거대기계의 원형을 고대 이집트까지 거슬러 올라가 찾았다. 피라미드와 같이 당대의 기술에 대한 분석만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구조물들이 축조될 수 있었던 것은 권력과 위계, 불멸성의 신화에 바탕을 둔 거대기계의 힘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고달픈 노역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 신화적 상징체계(태양신 숭배 신앙), 대규모 인력 동원을 가능하게 한 사회적 장치(전제군주, 군사국가, 노예제)가 배후에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상징체계와 사회적 장치가 바로 멈퍼드가 말하는 거대기계인 셈이다. 그 결과 인간은 거대기계의 부속품이 되어 계급적 속박, 토지 수탈, 경제적 착취, 불평등, 노예화, 전쟁 동원 등으로 참혹한 고통에 신음해야 했다.(『기계의 신화 Ⅰ』, 유명기 옮김, 2013)

이 같은 최초의 거대기계, 즉 고대의 거대기계는 칼 야스퍼스가 축의 시대(BC 900~200, 수레의 바퀴살이 거슬러 올라가는 원점과 같다는 뜻의 이름)라 명명한 시기를 거치면서 쇠한다. 이 시기는 고대 문명 곳곳에서 인류의 정신사적 혁명이 일어났고, 오늘날의 고등 종교나 철학이 발흥되었던 때였다. 이 시기 현자들은 인간 내면에 뿌리내린 이상적이고 원형적인 자아를 발견하라고 가르쳤다. 그들은 권력을 사악하고, 헛되며, 비인간적인 것이라 설파하며 권력 숭배를 비판했다. 멈퍼드는 특별히 이 시대를 거대기계에 대한 인간의 반성과 저항, 극복 과정이 일어났고, 인간은 자기 스스로에게 주목하여 거대기계 시스템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던 시기로 파악한다.

문제는 오랫동안 부침을 겪은 거대기계의 시대가 16세기를 거치면서 완벽하게 부활했다는 점이다. 멈퍼드는 근대에 이루어진 거대기계의 부활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구체적인 기술의 직접적인 영역(기술의 진보)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역설적으로 근대의 과학적 세계관은 세상의 중심을 인간 자신이 아닌 바깥 세계(우주적 세계, 물리적 세계)에서 찾았고 이를 위해 인간성에 대한 관심을 희생시키며 오히려 종교적으로 신화화되었다.

멈퍼드는 고대 이집트의 태양신 숭배와 근대의 기계적 우주관을 연결하면서 태양중심설(근대 우주론)의 부활과 수학적 방법의 대두에 주목한다. 근대에 이르러 “물질세계와 인간을 단순한 수치와 운동의 생산물로 이해하기 위해서 인간의 영혼은 제거되어야만 했고, 새로운 세계상의 중심에 인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이유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측정할 수 없을 만큼 오랜 역사를 가진 행성 위에서 긴 역사를 지니고 있는 인간 대신에, 불임화된 지식의 특정 생산물인 과학적 이론과 기계만이 영구적 지위나 높은 수준의 실제를 요구할 수 있다. 새로운 과학은 역사적인 인간과 그의 모든 주관적인 행위를 제거했으며, 갈릴레이 시대 이후로 이러한 실행은 ‘객관적인 과학’으로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 (『기계의 신화 Ⅱ』, 김종달 옮김, 2012)

이처럼 멈퍼드는 우리가 지닌 고정관념, 즉 기계론적 세계관의 통념에 새로운 성찰을 요구한다. 근대 기술산업문명은 본질적으로 권력(power), 생산력(productivity), 이윤(profit), 자산(property), 선전활동(publicity)이라는 다섯 꼭지점(펜타곤)으로 이루어진 진보(progress)에 기반하고 있으며, 이 ‘권력의 펜타곤’은 근대에 부활한 거대기계의 본질이자 속성이다. 이러한 거대기계의 근대적 부활은 막강한 권력을 등에 업은 기계화된 사회구조가 인간사회를 완전하게 지배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근대 이후 인간사회는 거대기계의 강력한 힘의 작동 아래 역사상 유래가 없는 급진적 기술 진보와 경제 성장을 이루게 된다. 이러한 시스템 아래에서 대다수 인류 대중은 고대 이집트에서 그랬던 것처럼 거대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기술의 불가항력성 혹은 불가피성

어느 늙은 마법사에게 마법을 배우러 온 젊은 제자가 있었다. 그는 매번 물을 길러 오기 귀찮아서 스승이 없는 틈을 타 빗자루에 몰래 마법을 걸었다. 그러자 빗자루는 열심히 물을 길어 왔다. 물통에 물이 다 채워지자 제자는 빗자루에 건 마법을 풀려고 했지만, 아뿔싸 마법을 푸는 주문을 잊어버렸다. 온 집안이 물로 가득 차고 난리가 났다. 그는 당황한 나머지 도끼로 빗자루를 내리쳤다. 빗자루는 두 동강이가 났지만, 외려 두 배나 빠른 속도로 물을 길어왔다. 집안은 홍수가 난 것처럼 물이 넘쳤다. 아무리 소리쳐도 빗자루는 말을 듣지 않았다. 제자는 스승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스승은 빗자루의 마법을 풀어준다.

이 이야기는 괴테의 시로 잘 알려진 <마법사의 견습생>의 바탕이 되는 우화를 간추린 것이다. 괴테는 로마시대 우화로 알려진 이 이야기를 풍자와 유머를 곁들인 시로 표현했고, 괴테의 시는 다시 프랑스 음악가 폴 뒤카가 만든 교향시로 이어졌다. 루이스 멈퍼드는, 『기계의 신화 Ⅱ』에서 이 우화를 언급한다. 견습생이 빗자루에 마법을 걸었다가 결국 마법을 풀 주문을 잊어버린 것에 빗대어, 한번 발을 딛게 되면 거기서 헤어날 수 없는 ‘자동화의 모순’을 지적한다. 멈퍼드는 자동화라는 마법이 인간의 기능과 목적을 충족시키지 못할 때 이를 멈춰야 하지만 결국 주문(마력)을 잊어버리게 될 것이라는 점을 경고한다. “자동화 과정을 정지시킬 수 있는 힘이 없다면, 그리고 그것을 역전시킬 필요가 있다면 시작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말한다.

멈퍼드는 기계의 자동화를 노동의 파괴로 간주했다. 얼핏 보면 자동화가 인간의 고역을 덜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노동을 배제하게 되는 ‘자동화의 모순’을 예리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오늘날 인공지능 등 자동화에 따른 ‘노동의 종말’이 기술적 위험 문제의 가장 큰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이 책이 나온 1970년에 이미 멈퍼드가 기술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문제는 기술의 진보와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데 인간은 불가항력적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 경향이 그 당시에도 지배적이었다는 사실이다. 멈퍼드는 생산과 소비 영역에서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지는 ‘기술의 강제성’에 주목했다. 그리고 ‘기술의 강제성’에 대해 불가항력적이라고 받아들이는 태도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기술적 가능성은 인간에게 불가항력적이다. 사람이 달에 갈 수 있다면, 사람이 기후를 통제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라고 말한 수학자 요한 폰 노이만의 말에 대해, 멈퍼드는 “사람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생명을 모조리 없앨 수 있는 힘을 가진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라고 그의 말을 되받아친다. 폰 노이만은 실제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핵무기를 개발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다.

기술의 불가항력성, 혹은 불가피성에 대해 멈퍼드는 명확한 입장을 취한다. 기술 자체의 진보와 흐름을 무조건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의 조건과 근본을 파괴하는 기술은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중시한 것은 기계론적 세계관에 맞서는 자연, 생명, 유기체적 원리였다. 획일성이 아니라 다양성, 자동화가 아닌 자율성, 그리고 기술발전보다 인간적 균형을 회복하는 데 더 우선적 가치를 두었다.

기술의 불가피성에 대해 좀 더 고민하기 위해 우리는 멈퍼드의 시대를 뛰어넘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점에 좀 더 가깝게 이동해 볼 필요가 있다. 기술의 불가피성을 체감하는 정도나 기준, 혹은 근거가 오늘날 훨씬 더 긴박해진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근래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술의 불가피성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결론을 갖고 있다. 급진적 기술이 가져온 선택과 자유의 확대, 효율성과 복잡성의 증대와 같은 이유들 때문일 것이다.

저명한 기술 관련저널 <와이어드>의 창간자이자 테크놀로지 사상가로 인정받고 있는 케빈 켈리는 『기술의 충격』(이한음 옮김, 2011)에서, 멈퍼드와는 상반된 견해를 제시한다. 미리 말해 두지만 케빈 켈리는 아무런 근거 없이 기술을 맹신하는 부류의 속류 전문가는 결코 아니다. 하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기술의 추세는 발달 단계를 거치며 전개된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발달단계는 생명의 성장 단계와 마찬가지여서 결국 거역할 수 없는 속성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생태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처럼 기술의 영역에서도 불가피성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아무리 거부하려 해도 거부할 수 없는 기술적 흐름은 존재하며 이러한 불가피성을 수용하되 선택의 올바름을 취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최근에 나온 저서, 『인에비터블』(이한음 옮김, 2017)에서 켈리는 변화의 불가피성을 더 강력하게 주장한다.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기술의 끊임없는 재조합을 수용할 수밖에 없으며, 기술에 저항하기보다는 협력하기를 권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말하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기술적 불가피성에는 급진적 변화에 따른 실업이나 불평등과 같은 실제적 위험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기존 산업은 낡은 사업 모델이 더 이상 먹히지 않아서 붕괴할 것이다. 통째로 사라지는 직업도 나올 것이고, 불균등하게 번영함으로써 질시와 불평등을 일으킬 것이다”고 말한다.

이미 거역할 수 없는 흐름에 놓여 있기 때문에, 지금의 압도적 기술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러한 불가항력적이고 불가피한 사태를 수용해야만 한다는 논리다. 한 마디로 어쩔 수 없으니 받아들이고, 받아들이되 잘 선택하라는 것이다. 어찌 보면 무책임하게 들리는 켈리의 주장은 이미 우리가 사는 사회의 지배적인 시대정신이 되어가고 있다.

무엇이 진정한 새로운 변화인가?

기술사회 문제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점점 더 깊은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멈퍼드나 일리치가 말한 자율과 공생 혹은 인간적 가치를 보존하고 인간적 균형을 회복해 나가는 과정은 앞으로 점점 힘들어지거나 불가능한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케빈 켈리의 주장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술의 변화를 순순히 수용하고 그에 적응하며 살아갈 확률이 훨씬 높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기술의 진보를 불가항력적으로 수용하는 것밖에는 별다른 수가 없는 것일까?

머지않아 전환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도 여전한 기계문명의 건재함을 지켜봐야 했던 멈퍼드가, 실의에 찬 세월을 보냈지만 궁극적으로는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기술문명을 넘어서는 새로운 인간적 전환의 세계가 올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물론 그 믿음은 문명의 역사와 현실을 치열하게 연구하고 고민한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멈퍼드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늘 새로운 것이라고 전제하고 지켜보아 온 첨단 기술의 발전이야말로, 실은 과거의 패러다임의 연장인 거대기계의 잔영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진정한 새로운 질서는 첨단 기술이 펼쳐지는 세상이 아니라 기계문명을 딛고 그 위에 만들어지는 전환된 문명사회여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맞이하게 될 불가피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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