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돋보기] 노동권을 보장하지 않는 국가의 인권 침해

16:02

또 한 명의 해고노동자가 삶의 끈을 놓았다.

2009년 쌍용자동차는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를 이유로 구조조정을 시작했다. 당시 구조조정 인원은 2,646명이었고, 당사자 및 가족 가운데 30명이 목숨을 잃었다. (2009년 5월 22일, 쌍용차의 구조조정에 반발해 평택공장을 점거했다. 그 뒤 77일간 헬기까지 동원한 폭력 진압이 이어졌다. 그리고 노조원 64명이 구속되고 5,000여 명의 노동자 중 절반이 해고, 무급휴직, 희망퇴직을 당했다)

뉴스에 달리는 댓글들은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나도 먹고 살기 힘들어서 사는데 뭐라고 자살이냐”, “회사 다닐 때 고액연봉 받을 때는 뭐하고 짤리니까 난리다. 귀족노조가 문제다”, “무책임하다. 가족들 생각하면서 허드렛일이라도 해야 하지 않나? 남들 3천만 원 받을 때 8천만 원 못받는다고 자살하는 건 이기적이다”, “쌍용차가 무슨 죄냐. 죽을 때까지 먹여 살릴 의무 없다”

그랬다. 그들에게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말은 와닿지 않았을 것이다. 누구나 직업을 가질 수 있고 그 직장이 정년을 의무적으로 보장해 줄 필요는 없다. 직장을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고, 그만둔 이후 무엇을 해야 할지 대비할 수도 있다. 세상에 어디 영원한 것이 있겠으며, 해고 후 대비책도 제대로 마련해 놓지 않은 이의 잘못일 것이다. 해고와 복직, 그로 인한 원인과 책임을 오로지 개인에게 떠넘겨진다.

사실 대한민국은 직장에 들어가면 직장에서 뼈를 묻어줄 것처럼 가족 같은 회사가 대부분이었다. 노동자들은 진짜 가족을 위해서 기를 쓰고 일한다. 아이가 아파도 출근하고, 휴가 날짜도 가족보다 회사 사정에 맞추어야 했다. 내가 만나는 그 어느 노동자도 일을 허투루 하는 이는 없었다. 술 한 잔 마시고 회사에 대해 불평하면서도 본인은 가장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멀리 쌍용차까지 가서 이야기를 나눌 필요도 없다. 당장 내 옆에 친구 혹은 가족 중 노동자들의 삶만 들여다봐도 증명할 수 있다.

이러한 대한민국에서 회사일이 바빠 집에 못 들어오는 엄마·아빠는 또 얼마나 많던가? 진짜 가족은 희생하면서 회사 사정에 맞춰 제공한 노동의 대가는 회사 사정 때문에 어쩔 수밖에 할 수 없는 ‘해고’로 돌아온다.

‘해고’된 삶은 어디 드라마에 나온 대사처럼 전쟁터보다 더한 지옥일 것이다. 재취업을 지원하며 실질적인 취업 교육이 이루어지는 현실은 아직 요원한 사회다. 그들은 스스로 일어서야만 한다. 텔레비전 채널을 돌릴 때마다 끊임없이 나오는 수많은 보험광고는 사회가 내 삶을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은 말한다.

해고된 노동자들은 쉬지 않고 구직활동을 할 수밖에 없다. 노동력과 기술을 가지고 다시 입사할 수 있는 회사는 나이를 이유로, 해고자라는 낙인으로 그들을 꺼린다. 해고는 경제적 곤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과정 역시 비겁하고 폭력적이다. 해고된 자의 몸과 마음은 해고 결정 전에 이미 망가져 버린다.

또, 어느 유럽의 나라처럼 회사가 폐쇄 결정을 내렸을 때 노동자가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알려주지 않는다. 노동자가 권리를 행사하고 노동조합이 쟁의를 벌일 때 사측은 직장폐쇄로 맞설 수 있다고 가르친다. 직장을 그만두고 세계여행을 다니다 돌아와도 내 기술을 그대로 써먹을 회사가 있고, 기술표준시스템 같은 것도 없는 나라다. 정당한 노조활동이 당신의 권리라고 초등학교부터 알려주지 않는 나라다. 해고되더라도 퇴직금 없이 실업급여만으로 인간다운 삶이 충분한 그런 나라가 아니다.

해고된 이후 3년간 65%가 생명보험을 해지하고, 83%가 적금을 해지할 수밖에 없는 사회가 아닌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 책임은 국가에 있다.

걸프전에 참전해 전역한 쿠웨이트 군인의 24%가 겪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쌍용차 정리해고 반대 공장점거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의 50% 이상이 겪을 만큼의 진압을 통해 국가는 그들의 인권을 명백히 침해했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김승섭, 동아시아, 2018 초판 9쇄, 92p~95p 참조)

노동은 대한민국 국민의 의무인 동시에 권리다. 그러나 오랜 시간 의무에 머물렀다. 이 권리는 국가가 보장해야 할 의무가 있는 영역에 존재한다. 노동할 권리를 온전하게 보장하지 않으며, 노동할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주저한다면 국가는 인권을 침해한 것이다.

기업도, 국가도 한 사람의 삶과 노동이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국가는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보장해야 할 주체이다. 거대한 기업과 국가는 나약한 노동자에게 책임만을 전가하는가. 기업하기 좋은 나라이기 이전에 노동하기 좋은 나라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