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철호 칼럼] 찜질방 애용(?) 회사원을 대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자세

11월 14일 ‘민중총궐기’의 의미

15:54

나는 ‘지금의’ 한국이 싫어요!

얼마 전 한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대기업과 중견기업 주변 찜질방을 월 계약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는 이야기였다. 그중 상당수는 주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회사원이란다. 인력감축 탓에 부담이 늘어나 새벽 2∼3시도 모자라서 어떤 때는 밤샘도 다반사라고 한다. 그런데도 출근시각은 정확해야 한단다. 그래서 주변 찜질방을 애용(?)한단다. 후배는 이건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라며 흥분과 슬픔을 토로했다.

‘20대 청년들의 해고’라는 우리 사회 모습을 보면서, 40~50대 노동자를 대하는 회사의 태도는 어떨지 상상해 보았다. 앞서 얘기한 한 후배 말이 수긍이 가고도 남는다. 마산복지센터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바뀐 여성 노동자가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왔다가 결국 29세의 나이로 고시원 독방에서 홀로 죽어간 이야기도 들려온다. 또, 상위 10%가 소득 절반가량(48.05%)을 차지하고, 하위 70%가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고작 18.87% 수준이라는 통계도 나온다. 결국, 서글픈 사연들은 특수한 사건이 아니라 현재 한국 노동자에게 보편적이라는 것이다.

정부가 말하는 귀족노동자는 천만 명 소수의 소수다. 정부는 ‘귀족노동자’ 담론을 대다수 노동자에게 상처를 주고, 그들의 요구를 거부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뿐이다. ‘귀족노동자’는 보편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관찰할 수 있다. 조금 여유 있게 살아갈 수 있는 일부 사람들은 개인이 가진 재능이 지금 시대에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일부일 뿐이다. 그 사람들을 제외한 대다수 사람의 삶은 점점 더 불안해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러한 우리 사회 총체적 모순이 드러난 사건이 바로 ‘11월 14일 민중총궐기’였다. 당시 차벽 앞에서 직접 행동에 나섰던 사오백 명의 노동자·민중들! 일신의 위험을 감수하고 싸움에 나섰던 그들은 과연 누구인가? 또, 그들의 직접행동은 희망을 잃어가는 개인의 삶, 다가오는 불안, 삶을 더 불안하게 할 정부의 일방적인 노동법 개악 시도에 대한 표현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당기고 있는 밧줄이, 들고 있는 파이프가 우리를 지킬 수 있는 수단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여기에 무슨 조직적으로 동원된 폭력이 있단 말인가? 정부는 이 모든 것을 한상균 위원장이 꾸몄다고 한상균 타령만 해댄다. 결국, 한상균 아니면 괜찮았단 말이지 않은가? 조선시대 구중궁궐 속에 혼자 앉아있는 왕도 이렇게 판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난 11월 14일 열린 민중총궐기에는 약 13만여 명이 참여했다. 정부는 차벽과 물대포로 참가자들의 목소리를 막았다. [사진=참세상 김용욱 기자]
▲지난 11월 14일 열린 민중총궐기에는 약 13만여 명이 참여했다. 정부는 차벽과 물대포로 참가자들의 목소리를 막았다. [사진=참세상 김용욱 기자]

노동자·민중의 보편적 분노의 표출이다

자본주의 사회인 한국사회 주체는 결국 노동자와 자본가다. 그러므로 자본가와 대척점에 서 있는 노동자들은 노동조건이나 생활형태 그리고 불안과 분노마저도 공통으로 의식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사회 2,000만 노동자 모두는 생각의 동질성을 가진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11월 14일 차벽 앞에서 투쟁했던 노동자·민중의 분노와 절박함은 2000만 한국의 노동자와 민중의 보편적 분노로 규정해야 한다.

지금 자본(그리고 거기에 기생하는 조·중·동)과 박근혜 정부는 선과 악의 경계를 제멋대로 규정한다. 대통령을 만나겠다고 청와대를 향한 15만 명의 사람들. 한 나라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외국행 전용기 시간을 좀 늦추더라도, 청와대에 앉아 그들의 이야기에 귀담아듣고 분석해야 한다. 15만 명의 사람들이 2000만 명의 의견을 가지고 왔다는 기본적인 정치적 상상을 왜 하지 못하는가? 아마도 대통령이나 정부 입장에서는 그들이 그저 납세자로 보일 뿐이다.

오히려 대통령과 당 대표는 그 후 찾아온 사람들을 향해 노동에 대한 무책임하고 감정적인 발언을 쏟아 놓았다. 사적 감정도 저렇게 표현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어찌 공적인 자리에서 막무가내식 표현을 보여주는가. 왜 그 자리에 앉으려고 그토록 몸부림을 쳤는지가 아리송할 따름이다.

역사과정에서 진실은 항상 특수하게 구체적으로

한국 자본주의 생산력 발전은 지금과 같은 기울어진 노사관계와 생산관계로는 유지되기 힘든 상황까지 왔다. 그런데도 사회적 부를 독점하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자본의 독점을 폭넓게 지원하기 위해 파시즘적 정치를 보여주고 있다. 11월 14일 민중총궐기는 이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분노로 나타났다.

박근혜 정권이 이번 사태를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참가자 몇몇을 사법처리로 마무리 하려 한다면, 한국 자본주의는 물론이고 박근혜 정권은 재앙을 안고 하루하루를 유지해 갈 수밖에 없다. 역사과정에서 진실은 항상 특수하게 구체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