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피터슨 신드롬을 어떻게 볼 것인가 /박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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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착한 어조로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격렬하게 비판하는 심리학자가 유튜브를 달구고 있다. 토론토대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조던 피터슨이다. 저서 『삶을 위한 12가지 규칙』은 베스트셀러가 됐고, 유튜브 구독자 수는 150만 명을 넘었다.

지금 북미 젊은 남성들의 지적 영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파에 가깝지만, 기존 우파들과는 스타일이 다르다. 집단으로 움직이는 도취적이고 폭력적인 우파가 아니라 개인주의적이고 금욕적인 우파에 가깝다. 한국에도 열성적인 팬들이 많다. 그들은 피터슨의 동영상을 열심히 번역해 웹에 올리고 있다. 피터슨과 유사한 주장을 하는 이들도 점점 많아지는 추세다.

▲조던 피터슨의 NBC와의 인터뷰를 번역한 유튜버(ELTON ENGLISH)의 영상 갈무리

피터슨의 주장을 반박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는 비교적 명료하게 견해를 밝히는 편이기 때문에(큰 장점이다), 논점이 또렷이 드러난다. 예컨대 피터슨은 <NBC>와 인터뷰에서 좌파가 불평등을 문제 삼는 것에 대해 이렇게 주장한다. “불평등 자체는 없앨 수 없다. 그건 자본주의나 인간만의 문제가 아니며 위계와 불평등은 수억 년 전부터 존재해왔다. 또한 사람들이 모든 차원에서 모두 똑같이 되길 원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저런 주장을 형식논리에서는 허수아비 때리기의 오류라고 한다. 상대가 말하지도 않은 주장을 날조해 비판하는 것. 모든 사람들이 모든 차원에서 똑같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좌파는 없다. 심지어 같은 환경에서 나고 자라서 같은 직업을 가지게 된 일란성 쌍둥이도 모든 차원에서 똑같이 되는 건 불가능하다. 좌파의 평등 이념은 클론처럼 차이를 완전히 제거할 수 있다는 믿음과는 전혀 다르다. 많은 좌파들이 이상으로 삼는 견해는, ‘최소화된 불평등’이 인간 각자의 잠재력을 자유롭게 발휘할 최고의 토대라는 것이다.

피터슨은 종종 극우파로 비난받지만, 그는 자신이 소위 ‘대안우파(alter-right)’나 극우파가 아니라고 강변한다. 사실 그가 백인우월주의나 인종주의를 노골적으로 옹호한 적은 없다. 무신론을 비판하고, 사형제도에 반대하며, 이성애 결혼제도를 옹호하고, 동성애자가 전통적 결혼제도로 편입되는 형태의 동성결혼에는 찬성하는 한편 동성애자들에 새로운 인칭대명사를 사용하게 한 캐나다 인권법에 거부반응을 보이는 걸 보면, 극우파라기보다는 보수파 내지 전통주의자(traditionalist)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중요한 건 피터슨 개인의 성향이나 발언 내용이 아니다. 눈여겨볼 것은 그를 둘러싼 사회적 반응이다. 그 자신도 예상치 못한 이례적인, 그리고 세계적인 호응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레거시 미디어와 뉴 미디어를 막론하고 정체성 담론이 그야말로 폭발하는 이 시대에, ‘미투’ 해시태그가 전 세계를 휩쓴 이 시기에, 어떻게 조던 피터슨 같은 사람이 이렇게 인기를 얻을 수 있을까? 케이틀린 플래내건이 2018년 8월 『아틀란틱(The Atlantic)』에 실은 글이 이해의 단초를 제공한다.

플래내건은 “지금 문화‧예술 전반에서 우뚝 선 것처럼 보이는 좌파가 실은 이미 쇠락하고 있었”으며 이 시점에 피터슨이 등장해 “세상을 이해하는 대안적 도구를 갈망하던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제공했다”고 말한다. “사태는 조용히 진행됐다. 1960년대 아이들이 학생 합창단을 그만둔 사실을 부모가 깨닫기도 전에 이미 급진화 되었던 것과 비슷한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다.” (2018. 8. 9, ‘아틀란틱’, 왜 좌파는 조던 피터슨을 우려하는가?)

트럼프 대통령 당선 직후부터 미국에서는 민주당식 정체성 정치에 대한 반감이 트럼프 시대를 불러왔다는 주장이 줄기차게 쏟아져 나오는 중이다. 대표적인 지식인이 마크 릴라다. 릴라는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정체성 정치를 넘어(The Once And Future Liberal, 전대호 옮김, 2018)』에서 대선 패배와 리버럴 위기의 핵심 원인으로 정체성 정치를 지목한다.

정체성 정치란 여성혐오, 인종차별, 성적지향 등의 이슈를 중심으로 의제와 세력을 구성하는 정치다. 하지만 릴라는 정체성 정치가 개인의 권리를 강조하느라 공적 의무와 시민적 덕성과 연대감 등을 희생시켰고 다수파를 형성하는 데 무관심했다고 비판한다. 그가 제안하는 정치는 한 마디로 ‘다수파를 지향하는, 시민으로 하나 되는 정치’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피터슨 신드롬도 정체성 정치에 대한 환멸이 만들어낸 하나의 현상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실제 그런 주장도 나온 바 있었다. 그럴 듯해 보이지만 그것은 마치, ‘일베의 기원은 진보세력의 위선에 대한 환멸과 냉소’라는 일베 탄생 설화의 미국 버전처럼 보인다.

이런 서사가 아예 거짓은 아니지만, 문제의 진짜 원인을 왜곡하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 물론 진보세력이 위선적 행태를 보인 것은 ‘팩트’다. 그 ‘팩트’를 가지고 일베 등이 냉소하고 조롱한 것도 ‘팩트’다. 그러나 그 행동들이 일베를 만든 것은 아니다. 그런 행위는 일베가 만들어진 다음에 나타난 현상이다.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었던 이유는 민주당이 정체성 정치를 ‘했기’ 때문이 아니며 다수파 형성에 무관심했기 때문도 아니다. 공화당을 능가하는 표 계산의 달인이자 데이터 정치의 장인들이 다수파 형성에 무관심했을 리가 있는가. 정체성 정치를 한 것 자체는 별문제가 아니다. 페미니즘 이슈는 다수파 형성에도 도움이 된다.

문제는 ‘하지 않은’ 것에 있었다. 그들은 계급 정치, 분배의 정치에 무관심했고, 그것이 정체성 정치와 긴밀히 연결된 사안임을 깨닫지 못했다. 버니 샌더스가 대선 기간 내내 지적했던 게 바로 그것이었다. 오늘날 미국의 젊은 진보주의자들이 무려 ‘사회주의(socialism)’라는 단어를 피켓에 쓰기 시작한 이유 또한 그것이다.

분배의 정치는 “시민 만들기”, “‘우리’의 복원” 같은 허울 좋은 수사만으로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 세계화와 능력주의 논리로 수많은 노동자들을 ‘도태’시켜놓고, 입으로만 ‘시민’이니 ‘공동체’니 ‘하나 된 미국인’을 떠들어봐야 설득은커녕 반감만 살 뿐이다. 시민이 원하는 건 ‘공동체에 과도하게 편재한 부를 실제로 나누는 정치’이지, ‘공동체적 일체감과 시민의식을 뜨겁게 이야기하는 정치’가 아니다.

조던 피터슨의 팬과 그의 아류에 대한 한국 좌파 및 페미니스트의 반응은 대체로 비슷하다. “시대에 역행하는 이 멍청한 자들을 어이할꼬…” 멍청한 건 모르겠지만, 시대에 역행한다는 진단은 사실이 아니다. 피터슨 신드롬은 자체로 하나의 시대정신이며, 정치의 공백을 드러내는 의미심장한 신호다. 표면이 아니라 저류에 흐르는 불만과 증오를 정확히 읽어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