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김의겸 사태’는 세 가지 실패를 의미한다 /박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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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01 14:45 | 최종 업데이트 2019-04-01 23:50

‘김의겸 사태’는 도덕적 일탈 같은 것이 아니다. 본인부터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사퇴의 변을 읽어보면 죄의식이나 반성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시세차익 보면 크게 쏘겠습니다. 농담이었습니다”) 짐작컨대 이 즉각적 사퇴는 정권에 부담 주기 싫어서이지, 정말로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해서는 아닌 것이다.

일부 여권 지지자들 역시 비슷한 생각이다. 그래서 김의겸이 아니라 김의겸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향해 분통을 터뜨린다. “수구세력은 투기와 불법 밥 먹듯 하는데, 우리 편은 왜 합법적 ’노후대비’조차 사퇴해야할 일이 되는 거냐!”, “진보는 평생 가난해야 하나? 진보의 도덕주의, 도덕 강박이야말로 문제다!”, “솔직히 다들 건물주 되는 게 꿈 아닌가. 왜 위선 떨며 문재인 정부 못 때려 안달이냐!”

▲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 [사진=오마이뉴스]

이 사건이 개인의 도덕적 일탈이 아니라는 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김의겸 사태는 그 정도의 해프닝을 넘어, 시대의 어떤 본질을 보여주는 문제적 사안이다.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다.

첫째, 김의겸 사태는 문재인 정권의 인선 실패와 신뢰 저하를 의미한다. 물론 정권의 공과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아직 이르고, 이 글이 그것을 논하기에 적절한 자리도 아니다. 정권이 잘한 일도 있고 못한 부분도 있지만, 적어도 지금 시점에 확실한 점은 ‘청와대 대변인 김의겸’이 전자에 해당되진 않는다는 것이다. 대변인 시절 김의겸은 본인 표현대로 “까칠”했고, 대립각을 세우는 데 몰두하는 스타일이었다. “디엔에이” 발언 등 몇몇 발언들이 구설수에 오르는 일은 잦았으나 국정 이해도를 높이는 데 특별히 기여했다 보긴 어렵다.

최근 청와대가 꺼내든 장관 후보자들 면면은 여당에서조차 반대 목소리가 비등할 정도의 “재앙”의 연속이었다. 예컨대 최정호 국토부 장관 후보자는 부동산 정책을 관장하는 자리임에도 주택을 통해 23억 원의 시세차익을 챙긴 사실이 밝혀졌다. 그는 후보 지명 직전 딸에게 아파트를 증여하고 본인은 그 집에 월세로 사는 재테크 기법을 선보여 “‘꼼수 증여’의 달인”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결국 그는 후보에서 자진사퇴했다.

‘청와대의 입’ 김의겸의 부동산 ‘투자’는 이런 흐름의 결정타였다. 김의겸은 은행 대출 10억 원을 끼고 서울 흑석동 재개발 부지의 25억 상가주택의 속칭 ‘딱지’를 매입했다. 전매 가능한 타이밍을 절묘하게 치고 들어간 그 시점은 한창 문재인 정권이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을 치르던 2018년 7월이다. 한 마디로, ‘정권을 대변하는 입’이 뒤에서는 국정철학을 정면으로 부정했던 셈이다.

둘째, 김의겸의 행보는 언론인 롤모델의 실패를 재차 증명했다. 한국의 언론인이 “기레기”라는 모멸적인 명칭으로 불리는 이유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근원적인 이유의 하나는 언론이 독립된 권력의 ‘장(field, champ)’으로 기능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언론권력이 자본권력이나 정치권력이라는 다른 권력장의 논리에 종속된 하위장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기자를 하다 좀 유명세를 얻으면 순식간에 정치권력이나 대기업으로 옮겨 타는 행태가 끝없이 되풀이됐다. 그러다보니 기자인지 정치지망생인지 모를 폴리널리스트(polinalist)들은 더욱 양산되고 기자 스스로도 점점 이런 일에 무감각해지게 됐다.

김의겸은 최순실 관련 보도로 박근혜 탄핵의 불씨를 댕긴 이 중 하나다. 그 보도가 공익에 부합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미국이었다면 그는 현대사를 바꾼 많은 특종 기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퓰리처상을 받고 전국적 지명도의 언론인으로 더 맹활약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의겸은 언론인으로 남지 않았다. 청와대가 부르자 사표를 던졌다. 후배 기자들이 찾아가 만류했지만 소용없었다. 이왕 떠났으니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깊이 이해하고 전하는 공직자로서 역할을 충실히 했다면 그 나름 의미가 있었을 테다. 하지만 결말은 보는 대로다. 정권의 정책기조를 조롱거리로 만들며 본인도 불명예 퇴진하고 말았다.

셋째, 김의겸 사태는 86세대 진보 엘리트가 꿈꾼 비전의 실패를 표상한다. 오랫동안 범진보 세력, 특히 민주당과 그 지지층 주류가 고수해온 어떤 사고틀이 있다. 먹고사는 문제는 개인이 알아서 하는 것이고, 시민들이 신경 써야 하는 공적 의제는 역사왜곡, 언론장악, 권력층 비리 같은 것이라는 암묵적 구분 말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개혁이니 진보를 자임해왔다. 김의겸 사태는 그런 기만적‧편의적 진보주의가 필연적으로 다다르는 종착지다.

크게 보면 이는 87년 체제 이후 등장한 신주류 및 민주화운동 세대가 지닌 한계와도 직결된다. 애초 87 체제를 만들어낸 동력은 계급 문제와 불가분이었음에도 30년이 지난 지금, 계급 이슈는 범진보 진영 주류에서 분열증적으로 억압되어 있다. 김의겸은 “집도 절도 없는 처지”에서 “노모를 모시고 살기 위한 노후대비”라고 말했지만, 일단 ‘대출 10억’이라는 대목에서 이미 대다수 서민들은 현실감각을 아득히 상실한다. 정말 “집도 절도 없는” 서민은 서럽도록 잘 안다. 은행에서 1억 원, 아니 5천만 원 빌리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김의겸이 포함된 86세대 진보 엘리트들의 삶은 대개 건물주는 아니라도 상위 10%의 삶이다. 굳이 ‘진보 엘리트’라 구분지은 것은 젊은 시절 진보적 대의에 헌신한 세대 중에 기꺼이 ‘민중’-‘투명인간’이 되어 현장에 남은 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진보 엘리트의 삶은 나머지 90%가 매일 겪는 지옥도와 무관하다. 습관적 당위와 인간적 연민으로 빈곤을 말하고 불평등을 입에 올리지만 정말로 해결하겠다는 절박감은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상위 10%는 자신이 ‘서민’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의 비교대상은 상위 1% 건물주들이기 때문이다. “어린이의 꿈이 건물주인 사회는 만들지 말아야한다”고 입으로 말하면서도 본인은 건물주를 갈망하고 또 건물주가 되어 이토록 큰 정치적 영향력과 발언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 가히 우리 시대 최대 모순 중 하나다.

‘다른 사회’를 정말로 믿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제도적 변화를 꾀하는 노력은 물론 필수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우리의 태도 또한 함께 변해야 한다. 즉, ‘이미 그런 사회가 된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고결한 도덕주의자여서가 아니라, 그렇게 실천적으로 비약하지 않고서는 이미 공고히 자리 잡은 제도와 관례를, 나아가 사회 전체를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아직 오지 않은 다른 미래를 누구에게도 설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린이의 꿈이 건물주인 사회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기는가? 그렇다면 당신부터 그 꿈을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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