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대통령의 대담 /이택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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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3 11:12 | 최종 업데이트 2019-05-13 11:12

대통령의 대담이 화제였다. 그런데 대담이라면 으레 대통령의 발언에 초점을 맞춰야 하겠지만, 웬일인지 대담을 진행한 기자의 태도에 모든 관심이 쏠려 있는 듯했다. 기자의 신상이 인터넷에 공개되는 것은 물론, 온갖 근거 없는 분석들이 소셜미디어를 도배했다.

▲[사진=청와대]

하루 이틀 목격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현상 자체를 특별하게 받아들일 일은 아닐 것이다. 여러 번 지적했듯이, 특정 정치인에 대한 지지가 연예인의 팬덤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은 ‘정치의 예능화’ 때문이다. ‘정치의 예능화’는 말 그대로 정치인이 소신이나 이념에 따라 정치 행보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기의 여부에 따라 자신의 입장을 조변석개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이 현상은 민주주의 절차의 발전에 대한 반대급부로 민주주의 이념의 쇠퇴가 강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대통령의 대담을 둘러싸고 벌어진 해프닝은 이런 곤혹의 지경을 드러내는 증상이다. 증상이기에 이 문제는 근본적 해결책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구조를 바꾸어서 즐거움의 방식을 재정위하는 수밖에 없다.

따라서 팬덤을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하면서 ‘성숙한 민주주의’를 점잖게 주문하는 이들은 포풀리즘이라는 증상의 본질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증상은 없앨 수 없고, 다만 다른 증상으로 바꿀 수 있을 뿐이다. 이런 변화를 추동하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즐거움의 원인, 쾌락의 대상을 바꾸는 것이다.

실제로 이 팬덤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다른 현상이 바로 대통령을 ‘좌파 독재’라고 비판하면서 삭발식을 단행한 한국당의 대외투쟁일 것이다. 이 둘은 대립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정치의 예능화’가 낳은 같은 증상이다.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소극으로 역사가 되풀이된다고 했을 때, 정확히 ‘정치의 예능화’는 그 소극의 실체를 보여준다. 왜 비극은 소극으로 바뀌는가. 바로 ‘절차’ 때문이다. 비극은 재현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절차’에 포함할 수 없다. 고대 그리스인에게 비극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신성폭력의 개입이었다.

이 신성폭력은 선악의 구분을 재정립하는 사건이다. 2년 전 촛불은 주도면밀한 계획에 따라 발생한 사건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로부터 이어지는 숱한 우연의 연속이 촛불로 이어진 것이 다. 신성폭력의 계기가 있었지만, 헌법주의라는 비폭력 준법의 논리가 신성폭력의 도래를 차단했다. 이런 측면에서 촛불은 비극이라기보다 모더니즘적인 부조리극에 가까웠다.

촛불 이후에 벌어진 상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언제나 사건일지는 사건이 끝난 뒤에 작성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런 우연의 사건을 우연에 맡기지 않고, 일목요연한 원인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대통령에 대한 팬덤은 이런 서사화의 열망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촛불이 있었기에 지금의 문재인 대통령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문재인 대통령이 있기 때문에 촛불이 가능했던 것처럼 생각하는 전도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전도는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있다는 이들한테도 동일하게 일어난다. 현 정부를 ‘좌파 독재’라고 규정하는 이들은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촛불을 기획했고, 그래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무리하게 수사를 받고 구속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전도된 생각은 박근혜 전 대통령 지지자들 사이에서 거부할 수 없는 진실로 받아들여진다. 말하자면, 이 상황은 서로 대립각을 세우고 있을 뿐, 사실상 동일한 믿음의 반복인 것이다.

두 믿음은 서로 대화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대화를 거부한다. 대화를 거부함으로써 이런 대립관계는 명분을 획득한다. 이런 경향이 강해질수록, 의사소통을 미덕으로 삼는다는 자유민주주의의 원칙은 껍데기만 남기고 분해될 것이다. 명분만 남은 민주주의는 민주화 이후 권력 기반이 흔들린다고 믿는 이들에게 피로감만을 선사한다.

여론조사라는 ‘투명한 데이터’는 ‘다수의 의견’을 정치적 올바름으로 인준하면서 다른 목소리를 끊임없이 소수의 의견이라고 묵살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 보여주듯이, 정치는 정념의 밀도라는 질적 차이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것이지 인구의 수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올바름이 반체제의 정념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걱정해야할 것은 양당체제에서 벌어지는 수 싸움이라기보다 기득권에 대한 분노를 차곡차곡 축적해가고 있는 보이지 않는 반체제의 정념일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 목격하는 좌파의 무능과 시장주의에 경도된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의 횡포는 이 정념의 밀도를 반동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가능성이 크다.

지난 반세기 한국은 절차의 측면에서 보자면 괄목할만한 민주주의의 성공을 거두었다. 자유민주주의가 서구가 아닌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 수출되어 이렇게 꽃 필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 역사적인 성취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인류 초유의 민주주의 실험장은 자본주의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상상하게 만들지 않는 불구 의 정치로 인해 심각한 위기를 맞이할 운명에 처해 있다. 대통령의 지지율을 지키는 것 이외에 정권의 명분을 유지할 다른 방도가 없는 웃지못할 소극의 상태가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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