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철의 멋진 신세계?] ‘거꾸로 교육’, ‘미래교육’이라는 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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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3 20:10 | 최종 업데이트 2019-05-23 20:11

며칠 전 중앙일보에는 ‘영재-일진이 한 팀, 벤처신화들이 꽂힌 거꾸로 캠퍼스(2019.5.20)’라는 기사가 실렸다. 기사는 김범수 카카오 의장, 김정주 NXC 대표,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 이해진 네이버 글로벌투자책임자, 이재웅 쏘카 대표 등 이른바 벤처 신화를 일군 IT 스타들이 공동으로 출자해서 만든 학교라는 점에 주목하여 ‘거꾸로 캠퍼스’를 소개하고 있다. “IT 영웅들이 꽂힌”이라든가 “판교발 교육혁명”과 같은 거침없는 수사를 사용할 만큼 ‘거꾸로 캠퍼스’는 이 기사에서 낡아빠진 기존 교육을 대신할 새로운 교육모델로 소개되고 있다.

‘거꾸로 캠퍼스’는 수년 전부터 미래교육의 새 모델로 각광받는 ‘거꾸로 교육(거꾸로 학습, flipped learning)’을 전면적으로 시행하는 학교이다. ‘거꾸로 학습’은 기존 수업 방식과 달리, 학생들이 교사가 제공하는 교육 콘텐츠를 미리 학습한 다음 실제 수업에서는 토론이나 질문, 혹은 과제 풀이를 진행한다. 강의를 들은 다음 숙제나 복습하던 기존 방식을 뒤집어, 집에서 미리 강의를 듣고 교실에서는 학생들이 주체가 되어 교육활동을 수행한다는 의미에서 ‘거꾸로’라는 이름이 붙었다.

▲미래교실네트워크의 거꾸로 캠퍼스 [사진=미래교실네트워크 유튜브 영상 갈무리]

이 교육방식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교과서, 책, 노트, 필기구 등 전통적인 학습도구들을 대신한 컴퓨터, 노트북, 태블릿, 온라인 네트워크 등을 필수적으로 갖춰야 한다. 이런 점 때문인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가장 걸맞은 새로운 미래교육의 모델로 ‘거꾸로 학습’이 주목받고 있다.

무엇을 뒤집는 ‘거꾸로 교육’인가?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꾸로 학습’이 표방하고 있는 교육방식이 과연 그 이름처럼 낡은 교육을 뒤집는 교육혁명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교육의 주도권을 교사가 아닌 학생에게 돌려주자는 취지에서 보면 우리나라만 해도 학습자(수용자) 중심의 교육이 보편화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거꾸로 학습’에서 강조하는 토론식 수업, 문답식 학습, 모둠기반 학습, 학습자 상호 협력, 문제해결 과정, 비판적 사고능력, 창의적 학습, 프로젝트 학습 등에 관한 여러 교육 요소들이 이미 교육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디지털 기기나 멀티미디어 시스템을 활용한 교육은 이제 특화된 교육 방식이라 부를 수 없다. 오히려 그 역작용을 우려할 만큼 보편적인 교육으로 자리잡았다. 어느 학교에서도 주입식 교육만을 선호하는 교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거꾸로 학습’이 이루어지는 교실 풍경도 그리 낯선 모습이 아니다. 시선을 넓혀 보자면, 공교육에서는 한계가 있을지 몰라도 많은 대안학교에서는 수업시간을 획일적으로 통제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개진하고 토론하며 상호작용하는 모습을 제한하려는 교사는 드물다. 공교육에서도, 대학입시라는 블랙홀이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고등학교를 제외한 수많은 학교에서는 ‘거꾸로 학습’이 표방하는 교실 변화 노력들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혁신교육이라 불리며 공교육에서 교실 혁신을 주도한 ‘배움의 공동체’ 모델도 결국 이러한 수업 변화에 초점을 둔 사례였다.

수업 방식의 변화가 아이들에게 배움의 동기를 새롭게 하는 역할을 할 수는 있다. 실제로 ‘거꾸로 학습’을 통해 공부에 관심이 없던 학생들이 높은 학업 성취를 보인 사례도 있다. 문제는 정작 다른 데 있다. ‘거꾸로 학습’은 학습 방식의 과감한 변화에 초점을 두고 있지만, ‘무엇을’, ‘왜’ 배워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교사 주도와 강의 중심의 수업 방식을 개선하여 학습자 스스로 자기주도성을 확보한다는 취지는 그럴듯하다. 그러나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지 않는다. 교실과 수업, 배움과 학습에 관한 ‘방식의 변화’가 교육의 가치를 새롭게 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한다.

‘거꾸로 학습’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기존 교육을 비판하는 논리는 일면 타당해 보이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자가당착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의 논리도 산업화시대 교육논리와 별반 다를 바 없게 느껴진다. 중앙일보 기사에서 “산업화 시대 공교육 모델이 ‘거꾸로 캠퍼스’와 같은 21세기 기업에 필요한 인재양성 방식으로 변해야 한다”는 정찬필 미래교육네트워크 사무총장 말속에서 이들의 교육 지향이 정확하게 드러난다.

교육혁명이라 요란하게 떠들어대지만, 인재를 양성해 기업에 제공하겠다는 산업화 시대의 교육관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변화된 산업시스템을 나타내는 ‘새로운’, ‘4차’라는 수식어를 제외하면 결국 산업시대 논리를 답습하고 있다. 컨베이어벨트를 로봇, AI가 대체할 뿐 이들에게 교육은 여전히 산업과 기업에 필요한 예비군을 양성하는 시스템일 뿐이다. 대량생산에서 맞춤형 소량생산으로 변한 것처럼 교육도 그렇게 변해야 한다는 논리다.

결국 ‘거꾸로 학습’은 이제는 효율성이 떨어진 기존 교육 방식을 벗어나 효율적인 방식의 학습을 하자는 이야기이다. 전도유망한 기업이 요구하는 인재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존 방식이 비효율적이라는 것이다. 쓸모없는 과정은 과감하게 버리고, 오로지 효율과 실용을 극대화하는 교육을 하자는 것이다. 각종 디지털 기기, 다양한 미디어 플랫폼, 강력하고 신속한 인터넷은 (어떤 경로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학습자의 지루함으로 표현되어 온) 교사와 학생들의 대면 시간을 대폭 줄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교과서를 들고 학생들에게 시를 읊어주는 선생님의 수업은 비효율적인 것이 된다. 미리 시를 읽어오고 관련 영상을 보거나 시를 분석해 와서 수업시간에 발표하고 토론하면 그만이다. 지식이나 정보는 굳이 선생님에게서 얻을 필요가 없다. 변화된 시대, ‘거꾸로 학습’ 시대의 교사는 더 이상 총체적인 교육을 담당하는 선생님이 아니어도 된다. ‘거꾸로 학습’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제안하는 코치, 촉진자, 조력자의 역할을 수행하면 된다. 교육을 코칭으로 부르고, 교사를 코디네이터나 퍼실리테이터(토론도우미)로 불리는 경향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다.

미래교육이라는 허상

현실이 불안하거나 어려운 시대일수록 미래에 대한 허상이 횡행하기 마련이다. 언젠가부터 교육을 논하는 자리에 ‘미래교육’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하나 궁금해서 들어보면 대부분 별 내용이 없다.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도래했으니, 교육이 바뀌어야 한다는 당위와 교육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도태될 것이라는 위기가 미래교육에서 이야기되고 있다. 미래를 보여준다는 통계적 전망이나 시뮬레이션이 교육적 논의를 지배한다. 세계미래학회는 2030년에 사라질 10가지 중 하나로 공교육을 뽑았다.

‘미래교육’이라는 말이 담는 의미나 내용은 명확하지 않다. 이 교육을 표방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교육적 지향을 이 개념에 넣어 각기 다르게 미래교육을 말한다. 최근에는 대체로 급진적 기술 발전과 이에 따른 사회변화에 초점을 맞춰 필요한 인재상을 중심으로 미래교육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하지만 미래교육은 여전히 이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나 이해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차용하는 개념에 불과하다. 미래교육이라는 말은 그럴듯하게 현실을 포장하지만, 이해관계에 기반한 교육비즈니스의 일환에 불과하다.

교육이 단지 정보나 지식을 얻는 과정이라면, 굳이 학교를 찾을 필요가 없다. 온라인이나 클라우드 시스템에 저장된 우수한 교육콘텐츠를 익히기만 해도 된다면 학교에 가고, 친구와 선생님을 만나는 일은 불필요한 일이다. 교육이 오로지 실용적인 목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면 마땅히 지금의 학교는 쓸모없는 공간에 가깝다.

작가 오에 겐자부로는 <왜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으면 안 되는가>라는 에세이에서 아이들이 학교에 가야 하는 이유를 세상과 소통하는 언어를 배우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작가는 자폐 성향이 있는 아들 히카루가 학교에서 겪는 어려움 때문에 학교에 더 보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다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친구와 소통을 위한 언어를 발견해 나가는 히카루의 일화를 통해 아이들이 학교에 가야 하는 이유를 찾아내고 있다.

여기서 작가가 말하는 ‘세상과 소통하는 언어’란 말과 글, 혹은 이것들로 이루어진 지식이나 정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히카루가 음악을 통해 그랬던 것처럼 “자기 마음속에 있는 깊고 풍부한 감정을 스스로 확인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며 그리고 자기를 사회와 연결시켜 나가는 데 필요한 언어”가 바로 작가가 말하는 ‘세상과 소통하는 언어’인 셈이다.(오에 겐자부로, 『나의 나무 아래서』)

‘거꾸로 학습’처럼 수업 방식의 변화만으로 우리교육이 달라질 수 있을까? 낡은 교육 시스템을 뜯어고쳐 변화와 혁신을 추구하려는 의지를 애써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쓸모와 효율의 극대화만이 우리교육이 추구해야 할 가치는 아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쓸모나 유용함으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미래교육은 결국 허상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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