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인싸’와 ‘아싸’, 새로운 집단주의 /박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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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1 14:09 | 최종 업데이트 2019-07-01 19:05

그 말을 처음 들은 건 2017년 초였다. 학생들과 캠퍼스를 걸어가는데, 특이한 플래카드가 보였다. “OO야, 졸업 축하해!”라는 문구와 술자리에서 찍혔음이 분명한 ‘OO’ 씨의 허랑방탕해 보이는 사진. 주변에는 비슷비슷한 느낌으로 각종 입사시험과 고시 합격자를 축하하는 플래카드도 많았다.

“우리 땐 저런 거 없었는데 요즘 대학생들은 참 재밌게 노네요. 나름 훈훈하기도 하고요.”
“선생님, 저런 건 인싸들 문화고요, 우리 같은 아싸들은 안하고, 못해요.(웃음)”
“인, 인싸? 그게 뭐죠?”

요 몇 해 귀에 피가 나도록 들리는 말, ‘인싸’와 ‘아싸’를 처음 알게 된 날이었다. 뭐만 나왔다 하면 “핵인싸템(인싸 중의 인싸들이 사용하는 아이템)”이란다. 심지어 지상파 예능방송에서도 일상적으로 쓰는 말이 됐다. 인싸는 인사이더(insider), 아싸는 (outsider)다. 어떤 조직이나 공동체에서 적극적으로 사람들과 어울리는 부류가 인싸다. 아싸는 반대 의미다.

며칠 전 내 글쓰기 수업을 듣는 대학생이 인싸와 아싸에 대한 글을 써낸 적이 있다. 고백하자면 그간 나는 인싸, 아싸에 대해 별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학생의 글을 보고 처음으로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다. 그가 서두에서 던진 질문은 두 가지였다. “왜 갑자기, 인싸와 아싸가 다시 유행어가 되었는가? 그리고 자신을 인싸라고 부르는 이들은 대체 어딨고 아싸라고 하는 이들만 넘쳐나는가?”

글의 필자는 먼저 인싸를 자처하는 사람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인싸 아싸라는 말은 많지만, 실제로 자신을 인싸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인싸의 조건은 많은 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점이다. 무리 안의 돋보이는 사람이 인싸다.”, “하지만 요즘 대학가에는 무리 자체가 형성되기 어렵다. 무리가 없으니 인싸가 존재할 공간도 없다.”

또 하나 재밌는 점이 있다. 인싸는 “멸종위기종”이지만 그렇다고 아싸가 주류가 되거나 당당하진 않다는 것이다. 아싸는 자조적인 고백투로 아싸의 정체성을 토로한다. 왜냐하면 “인싸가 여전히 한국 사회의 이상적인 인간형이기 때문이다. 회사에 가면 끊임없이 경험할 단체생활은 여전히 인싸의 독무대다. 미래를 보면 아싸의 지위는 불안하기에 당당할 수 없다”

정신분석적인 개념으로 보면 지금 대학가에서 인싸란 일종의 ‘대타자’다. 모두가 아싸인데 정작 그 아싸들이 자기를 평가하는 기준이 인싸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렇게 ‘인싸라는 이름의 대타자’는 ‘아싸라는 이름의 주체’에게 늘 불안을 유발한다. 웹툰 작가 와나나는 “아싸가 되는 지름길은 인싸가 되려는 조급함”이라 지적한 적이 있다. 어떤 아싸들은 불안을 못견디고 인싸가 되기 위해 ‘오버’를 하게 되지만, 그럴수록 그는 더 아싸가 될 뿐이다.

아싸의 불안에도 불구하고, 글의 필자는 거기서 긍정성을 발견한다. 힘과 권력을 과시하며 고성이 오가던 술자리들, 인싸 문화가 나타내던 집단주의가 확연히 쇠락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과거의 인싸 문화가 싫은 새로운 인싸들이 만드는 ‘새로운 집단 문화’가 기대된다”며 글을 맺었다.

‘인싸 문화’가 집단주의적이라는 지적에 동의한다. 그것은 종종 주류 추종적인 시선이었고 정상성을 강요하는 폭력이기도 했다. 그런 문화가 대학가에서 사라지는 것은 두 손 들어 환영할 일이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대목이 있었다. “요즘 대학가에는 무리 자체가 형성되기 어렵다”는 문장. 애초 무리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나쁜 집단주의는 없겠지만, 동시에 새롭고 긍정적인 집단 문화도 불가능한 게 아닐까.

사실 대학가에서 무리가 형성되지 않는다는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일상적으로는 무리를 잘 짓지 않는다. 2019년 현재, 서울의 4년제 대학 35개 중 무려 8개 대학에 총학생회가 없다. 총학생회 선거가 무산됐기 때문이다. 투표율이 절반에 못 미친 학교가 그만큼 많았다. 더 심각한 건 아예 후보자가 없어 투표조차 하지 않는 경우도 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진보운동의 큰 축이던 전투적 학생운동이 붕괴한 건 벌써 20년도 넘은 일이지만, 이제 학생운동은 고사하고 학생회라는 대의 형식 자체가 존립위기에 놓였다. 이 역시 ‘무리가 형성되지 않는 현상’의 일부다.

반면 어떤 국면에선 무리를 잘 짓는다. 소위 밀레니얼 세대의 거대한 집단행동들은 예측불가능하게 나타났다. 이화여대 ‘미래라이프대학’ 사태, 서울대 시설 노동자 파업사태, 숙명여대 광주항쟁‧세월호 망언자 규탄성명 취소 사태 등이 대표적 예다. 이 사건들에서 크게 세 가지 흐름이 또렷이 나타났다. 첫째, 강력한 ‘응집력’. 둘째, 더 강력한 반(反)정치주의. 셋째, ‘위임거부’의 민주주의다.

이 모든 현상에서 대학생들은 놀랄만한 집단적 응집력을 보여줬는데, 그 힘의 ‘방향’이 기존 운동권과 달랐다. 이대 시위를 주도한 학생들은 다른 대학의 연대 제의는 물론, 같은 학교 총학생회의 활동도 철저히 차단했다. 세월호 리본, 메갈리아 티셔츠, 위안부 팔찌 착용도 금지했다. 일말의 정치성도 용납할 수 없다는 철저한 ‘표백’의 의지는 단순한 ‘탈정치’ 수준을 훨씬 넘어선 극단적 반정치였다. 그들은 자신들을 대표하는 조직과 대표자들에게 위임된 권한들을 인정하지 않고 거의 모든 사안마다 일일이 당사자 투표를 통해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이대 사태가 결국 이대 학생들의 승리로 끝나자 언론은 “낡고 폭력적인 학생운동을 넘어선 새로운 학생운동 모델”“느리지만 철저히 민주적인 ‘달팽이 민주주의’” 같은 찬사를 쏟아냈다. 과연 그런가. 위임을 거부하는 민주주의는 일반적으로 급진 민주주의라고 해석되지만 반정치에 포박되는 순간 그것은 당사자주의 및 소비자 행동주의에 한없이 가까워진다.

반정치주의의 특징은 단순히 정치적인 것들을 혐오하고 반대하는 게 아니다. 반정치의 핵심은 개인의 권리를 상품논리로서, 즉 등가교환의 대상으로 본다는 점이다. 예컨대 내가 이만큼의 ‘의무’를 다했으니 그만큼의 ‘권리’가 생긴다는 식이다. 이 논리구조 속에서는 1000을 가진 이는 1000의 권리를 가지고, 1을 가진 이는 1의 권리를 가지는 게 ‘공정’하다. 그 ‘공정성’이 끈질긴 투쟁의 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구매자 아니면 빠지세요!”라고 말하는 이유가 된다. 이런 논리를 내면화한 이에게 ‘환대와 연대’ 같은 사회적 가치는 한낱 목가적 백일몽에 불과하다. 요컨대 반정치주의는 정치에 대한 즉자적 반대라기보다 정치를 다른 것, 이를테면 소비자 논리로 대체함으로써 정치의 장소를 제거하려는 태도다.

‘집단주의냐, 개인주의냐’는 ‘인싸냐, 아싸냐’처럼 공허한 질문이다. 중요한 건 중심부(인싸)과 주변부(아싸)에 대한 감각이, 선망과 질투로만 흘러가지 않고 차별에 저항하는 연대의 기초가 되게 하는 방법일 것이다. 우리는 무리 짓고, 그 무리 속에서 더 나은 각자가 된다. 무리에서 어떻게 연대하고 또 개인으로서 존엄할 수 있을지, 고민을 잊지 않는다면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더 나은 집단주의는 정말로 가능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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