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대구 보고서] 이주노동자는 어떻게 살아남았나(합본)

라울은 왜 인도로 돌아갔을까
우디트는 '성실 근로자'로 재입국할 수 있을까
훌란은 3월에 넷째를 낳았고, 열흘 만에 참외를 땄다
감염병의 시대, 이주민을 위한 국가는 없다

17:13

[편집자 주] 감염병 코로나19가 전 세계에 휘몰아치고 있다. 신종 감염병은 전 세계에 걸쳐 수많은 사상자를 냈고, 내고 있다. 동시에 우리가 애써 외면해온 사회의 아픔도 그대로 드러냈다. 대한민국, 그중에서도 1차 대유행이 할퀴고 지나간 대구는 극심한 감염병으로 직접적인 피해만큼 사회과 품은 또 다른 아픔도 명징하게 드러냈다. <뉴스민>은 ‘코로나19 대구 보고서’ 기획을 통해 이주민과 난민, 학생과 교사, 특수고용노동자들을 통해 감염병이 드러낸 우리 사회의 아픔을 짚고, 감염병에 대응하는 공공의료체계의 현실도 짚어보고자 한다.

[코로나19 대구 보고서] (1) 라울은 왜 인도로 돌아갔을까
[코로나19 대구 보고서] (2) 우디트는 ‘성실 근로자’로 재입국할 수 있을까
[코로나19 대구 보고서] (3) 훌란은 3월에 넷째를 낳았고, 열흘 만에 참외를 땄다
[코로나19 대구 보고서] (4) 감염병의 시대, 이주민을 위한 국가는 없다

▲오전 8시 출근시간대 성서공단의 모습

프롤로그 : 접경지대, 성서공단

오전 7시, 평소대로라면 성서공단은 공장이 하나둘 잠이 깨는 시간이다. 가동을 준비하는 공장의 숨소리가 낮게 깔린다. 출근하는 사람들로 붐비는 시간, 수탉이 울면서 시작하는 성서공단의 풍경은 도시인에게 생경하다. 길을 오가는 사람의 모습이 이국적이다. 인도네시아, 네팔, 파키스탄, 베트남···동남아시아에서 넘어온 이주노동자들이 거리를 메운다. 이들은 대체로 자전거나 오토바이로 출근한다. 승용차를 타거나 지하철 성서공단역에서 내려 걷는 한국인 노동자와 대비된다. 이주노동자들은 공단 인근이나 계명대 인근에 밀집해 산다. 공장까지 걷기에도, 대중교통을 이용하기에도 애매한 거리다.

오후 6시부터는 한국인 노동자의 퇴근 모습이 보인다. 저녁 8시를 넘기면 잔업을 끝낸 이주노동자의 퇴근 모습도 보인다. 주야 맞교대로 돌아가는 섬유업체의 이주노동자 퇴근이 자동차 부품공장 이주노동자 퇴근 시간보다 좀 더 늦다. 이들은 퇴근길에 와룡시장에 들러 아시아마트에서 저녁거리를 사거나 동남아시아 음식점에서 늦은 저녁을 먹는다. 성서공단과 계명대학교 원룸촌 사이에 있는 와룡시장은 이주노동자로 붐빈다. 이주노동자로 가득 찬 와룡시장 식당을 처음 보는 정주민1은 왠지 모를 거부감(히스테리)을 느낀다. 공단 주변 곳곳에 마련된 이주노동자의 종교시설은 종종 혐오로 인한 경찰 신고가 접수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아직 이곳을 이주노동자의 게토라고 할 수는 없다. 이주노동자는 게토처럼 정주민과 단절된 곳에서 자신들만의 문화를 형성하고 살아가지 않는다. 이들은 정주민 사회에도 어느 정도 융합됐고 또 어느 정도는 구별되는, 긴장과 공생 속에서 점점 경계선을 허물어가는 접경지대2에 살고 있다.

▲성서공단 인근 와룡시장. 이주노동자가 주된 손님이다.

코로나19는 쓰나미처럼 대구, 그리고 성서공단을 휩쓸었다. 그 자리에는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이주노동자와 정주민의 접경지대가 있다. 접경지대에는 전염병의 폭발적인 지역감염 확산이라는 미증유의 사건 속에 공포에 빠진 이주노동자들이 있다. 정확한 정보를 얻기 어려운 이주노동자는 치솟는 중국 우한의 사망자 수, 미디어에 비치는 이미지, ‘읽을 수 없는’ 안전 안내 문자의 경보음으로 공포를 체감했다. 감염 공포 때문에 체불임금을 정산받지도, 집기를 처분하지도 않은 채 출신국으로 돌아갔다. 귀향 행렬이 이어지는데 비행기는 뜨지 않았다. 비행기가 뜨지 않자 출입국 일시보호소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추방하지 못해 가득 채워졌다. 단속에 걸린 이주노동자는 오랜 한국 생활을 정리할 틈도 없이 가족을 남기고 한순간에 증발했으나 보호소에 고였다.

경기침체로 공장 가동률이 떨어지면 이주노동자 해고가 시작된다. 맡은 일이 힘들고, 어렵고, 위험해서 대체가 어려운 이주노동자는 그나마 살아남을 확률이 높다. 불합리한 처우에 이주노동자가 저항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사장이 일부러 임금을 1~2달 체불하는 일도 흔하고, 수틀리면 미등록 노동자를 신고하는 경우도 있다. 해고된 이주노동자는 직장이 없어 졸지에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될 위기에 처한다. 해고까지는 아니더라도 공장이 멈추거나 가동률이 떨어져 생계곤란을 겪는다. 이들은 생활비 마련을 위해 공장에 일이 없는 날에는 인근한 경북의 농장 일용직 일자리를 전전했다. 물론, 고용허가제 위반이다. 제도와 현실은 들어맞지 않는다.

▲성서공단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의 정심시간, 길게 늘어선 줄은 식당으로 향하고 있다.
▲성서공단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의 정심시간, 일부 이주노동자들은 공단에 마련된 종교시설에서 자신이 믿는 신에게 기도를 올린다.

불안정 노동에 노출된 이주노동자에게는 사회 안전망도 작동하지 않는다. 공적 마스크 보급을 꿈꿀 수 없는 상황에서 두려운 이주노동자는 답답한 산업용 방진 마스크를 뒤집어쓰고 기숙사 밖을 나서지 않았다. 정주민도 구하기 어려운 KF마스크는 만근에 잔업, 주말 출근이 기본인 이주노동자가 구할 수는 없다. 공적 마스크 5부제도 건강보험에 가입되지 않거나 미등록인 이주노동자에겐 별 소용이 없다. 감염이 두려운 이주노동자는 때 묻은 일회용 마스크와 장갑을 두 겹씩 겹쳐 썼다. 이들은 코로나19가 두렵고, 코로나19 검사를 받는 것이 두렵다. 미등록 신분을 들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수입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재난지원금 역시 꿈꿀 수 없다.

의료 시스템이 과부화한 상황에서 이주노동자의 건강권 보장은 어림도 없다. 저소득층 외국인 주민 무료의료지원기관인 대구의료원이 이주노동자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의료기관이었으나, 코로나19 거점병원으로 지정돼 일정 기간 이용할 수 없게 됐다. 출산을 앞두거나 다친 이주노동자는 울며 겨자 먹기로 민간 병원에서 해결해야 했다. 건강보험 적용이 안 되는 미등록 이주노동자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병원비가 청구됐다.

이주노동자에게 느슨한 사회 안전망을 메우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민간의 몫이 됐다.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미등록으로 전락할 위기의 이주노동자, 기숙사에서 나오면서 지낼 곳을 잃은 이주노동자, 마스크를 구하지 못하거나 긴급 의료지원이 필요한 이주노동자에게 정부나 지방정부의 행정력은 미치지 않았고 이주노동조합, 교민회, 여력 있는 이주민 개인이 나서 문제를 풀어냈다.

2020년 9월, 코로나19 확산이 소강상태였던 대구에서도 다시 수도권발 지역감염이 확산하는 추세다. 대구 신규 감염자가 하루 수백 명씩 나오던 2, 3월보다는 안정됐지만, 경기 위축으로 가동을 중단하는 공장도 늘고 위기 상황을 버텨내던 이주노동자도 한계를 향해 가고 있다. 위기를 겪는 이들의 사정은 절박하다. 이들은 자신의 생계뿐만 아니라 고향 일족의 생계라는 이중의 짐을 짊어지고 있다. 이들의 존재를 통해 한반도가 중국으로, 몽골로, 동남아시아로 연결된다.

▲성서공단. 달구벌대로를 경계로 아래쪽 성서공단과 위쪽 주거단지로 구분된다. (구글어스 갈무리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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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울은 왜 인도로 돌아갔을까.

3월 3일, 코로나19 전국 확진자 4,812명(사망 28명), 대구 확진자 3,601명(사망 22명).

희뿌연 하늘 아래 듬성듬성 줄지은 야자나무 사이로 건조한 바람이 불어온다. 인도 펀자브 주(州) 출신 라울 싱(가명, 31)은 한국에서의 도피 생활 3년 만인 3월 3일 인도로 되돌아왔다. 뉴델리 공항에 내려 고향 땅을 바라보는 싱과 아내 타냐 카우르(가명, 31), 딸(5)의 표정에는 고향을 찾은 이의 그리움이 묻어나지 않는다. 싱과 카우르가 가진 것은 가방에 옷가지 몇 벌과 현금 4,000달러가 전부였다. 이것이 3년간 한국 생활로 남긴 것이다. 나머지는 대구에 있는 셋방에 모두 두고 왔다. 오토바이, 생활 집기, 셋방 보증금 200만 원마저 챙길 새가 없었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아내에 대한 명예살인 시도로 인도에서 도망쳤지만, 2월 대구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공포도 그 못지않았다.

대구에서 코로나19 감염자가 하루 100명 단위로 발생하자 라울은 패닉에 빠졌다. 코로나19 보다 ‘우한 폐렴’이라는 말이 더 쓰이던 시기. 라울에게 코로나19가 창궐하는 대구는 우한과 같게 느껴졌다. 주변과 교류 없이 살던 라울은 대구 상황을 침착하게 살펴볼 수 없었다. 일을 마치고 와서 밤마다 휴대전화로 대구 상황을 다룬 기사를 검색했다. 번역기를 돌려가며 확인했지만 이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영문 기사를 검색했지만 자세한 소식은 없었다. 다만 감염이 치솟고, 누군가 죽어 나간다는 내용이 많았다. 영어가 지원되는 국내 긴급재난상황 안내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했으나 두려움을 더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곳에는 코로나19에 대한 체계적인 정보가 있지 않았고 확진자가 방문한 장소를 경고하는 단편적인 정보만 있었다. 거리는 텅 비었고, 라울은 방안에 고립됐다.

불안에 떨다 잠드는 일상이 반복되며, 라울은 결국 다시 인도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2월 25일, 몽골인이 코로나19로 한국에서 사망했다는 뉴스와 대구 봉쇄를 검토한다는 가짜뉴스가 결정적이었다. 한국 정부가 외국인의 건강도 보살펴줄 것 같지 않았다. 여태껏 한국에서 라울은 적법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불청객일 뿐이었다. 항공편을 검색해 가장 빠른 날짜로 예약했다. 난민 인정을 위한 소송이 법원에서 진행 중이고 중도에 출국한다면 불리할 것이 뻔했지만, 상관없었다. 다시 돌아올 생각이 없고, 그 무엇보다 딸의 안전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딸과 아내의 안전을 위해 한국에 온 것인데 코로나19는 그들의 안전을 위협했다.

뉴델리에서 방을 하나 빌렸다. 주변과 교류할 생각은 없었다. 과거 아내의 가족이 총기를 갖고 고향 펀자브에서 뉴델리까지 찾아온 적 있기 때문이다. 계획도 없이 귀향했지만 가능하다면 캐나다 시크교인들이 사는 지역으로 옮겨가길 원했다. 3월 22일, 인도 정부는 인도 전역에 강력한 봉쇄 정책을 시행하면서 모든 것이 다시 뒤틀렸다. 통행금지령이 떨어졌고, 라울 가족은 셋방 바깥을 나설 수 없었다. 음식은 정부가 배급해줬지만, 통행금지령을 어기고 나간 사람은 경찰에게 매질을 당했다. 사람 잡는 집게나 코로나 헬멧도 등장했다. 비로소 라울은 후회했다. 잠시 잊고 살았지만, 인도는 이런 곳이다. 조금만 더 차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면···.

석 달을 꼬박 방 안에 갇혀 살았다. 외출은 특별한 경우에만 할 수 있어서, 온라인으로 한시적인 허가권을 얻는 경우에나 가능했다. 학교는커녕 밖에 나가지도 못하는 딸은 자꾸 채근했다. 매일같이 한국에 다시 돌아가자고 울었다. 생의 절반을 한국에서 지낸 딸은 한국말을 쓰고 한국 음식을 먹는다. 그러는 동안 한국에서는 알지 못했던 코로나19 정보도 얻었다. 우한 사례는 특별한 것이고, 언론에서 느낀 공포는 과장된 것이었으며, 위생과 치료를 엄격히 한다면 설령 코로나19에 걸리더라도 사망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깨달았다. 한국에서 가져온 4,000달러도 바닥을 보였다. 일가족이 체류하는데 월 800달러 정도가 들었는데 일을 할 수 없으니 수입이 없었다. 한국대사관에 도움을 청해봤지만, 대사관은 한국인을 보살피는데도 여력이 충분치 않았다.

▲라울의 딸이 대구에 마련된 셋방에서 쉬고 있다.

6월 6일, 코로나19 전국 확진자 11,719명(사망 273명), 대구 확진자 6,886명(사망 188명).

믿을 수 없는 일이 생겼다. 방 안에서 할 수 있는 일도 없어서 항공권 예매 사이트를 매일 뒤지다 한국행 오픈티켓을 발견했다. 즉시 3매를 예매했고, 성공했다. 6월 6일, 가벼워진 가방을 메고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코로나 검사를 받은 뒤 국외 입국자 전용 KTX를 타고 대구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다시 한번 검사를 받았다. 대구역에서는 국외 입국자 전용 택시로 예전에 살던 셋방까지 이동했다. 보증금은 아직 남아 있었고, 대문 앞 오토바이도 누가 훔쳐 가지 않았다. 친절하지도, 불친절하지도 않은 집주인은 3개월의 여정을 특별히 캐묻지 않았다.

법무부의 취업 허가도 아직 유효했다. 라울은 서둘러 성서공단의 한 섬유공장에 취직했다. 노동집약 산업인 섬유산업은 임금 상승과 함께 대구를 떠나 중국으로 갔고, 다시 베트남으로, 인도로 향했지만, 인도 사람 라울은 산업의 흐름을 거슬러 대구에 왔다. 섬유산업의 원시림. 명맥만 겨우 유지하는 대구 섬유산업은 언제나 위태했지만, 코로나19는 산업 또한 위협했다. 공장에는 이틀에 한 번꼴로 출근했다. 월급은 근 100만 원. 하지만 라울은 이 모든 것이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예전에 일하던 공장에서 두 달 치 임금을 받지 못하고 집단 정리해고를 당한 적 있다. 다른 공장에서는 근로기준법을 어기고 월급을 다음 달 말에 지급했다. 딸이 아플 때 병원에 가면 의료보험이 없어 조그만 치료에도 병원비가 과도하게 청구됐다. 한국에 산다고 해서 특별히 장래를 그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괜찮았다. 딸과 아내가 위험하지만 않으면 됐다. 라울은 벽에 걸어둔 카라3를 끼고 방 한켠에 마련해 둔 기도소 앞에 섰다. 거기서 라울은 가족의 안전을 빈다. 한국에서 오래 머물 수 있기를 빈다.

▲방 한켠에 마련해 둔 기도소 앞에서 라울은 가족의 안전을 빈다. 한국에서 오래 머물 수 있기를 빈다.

이주노동자, 코로나19 보다 공포에 먼저 감염되다

대구 이주노동자는 공포에 먼저 집단감염 됐다. 옷가지만 챙겨 대구를 떠난 라울의 사례처럼 급히 대구를 떠나는 이주노동자들이 있었다. 대구에서 코로나19 집단감염이 폭발적으로 확산되던 2~3월, 다수 이주노동자의 한국 탈출이 확인됐다. 법무부가 2019년 12월부터 6월까지 미등록 이주노동자 자진 신고 접수를 받은 결과, 신고자와 출국자가 2~3월에 집중됐다. 코로나19와 무관하게 실시한 미등록 이주노동자 관리 정책으로, 자진신고자에게는 단기 방문 비자(C-3)를 통한 재방문 기회를 준다는 내용이었다. 전국적으로 12월 5,000여명, 1월 6,000여 명이던 신고자는 2월과 3월 각각 8,000여 명, 1만 3,000여 명으로 치솟았다. 앞선 두 달보다 배 가량 더 많은 기록이다. 급증한 자진출국 신고는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공포 때문으로 해석된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별다른 사정이 없다면 한국에서 더 오래 체류하려 하기 때문이다.

▲법무부가 2019년 12월부터 6월까지 미등록 이주노동자 자진 신고 접수를 받은 결과, 신고자와 출국자가 2~3월에 집중됐다.

이주노동자 근무 사업장이 밀집한 성서공단에서도 대구 코로나19 확산 여파가 확인됐다. 성서공단에서 대구경북지역 이주노동자의 노동권 쟁취를 위해 활동하는 성서공단노동조합에 따르면, 지난 1, 2월 체불임금·퇴직금 상담 건수와 무료진료소 이용 건수가 급증했다. 2012년부터 2019년까지 체불임금·퇴직금 등 노무 상담 건수는 연간 적게는 170여 회에서 많게는 340여 회까지 확인된다. 2020년은 1월 한 달에만 142건을 상담했다. 142건 중 퇴직금 관련 문의가 55회, 체불임금 관련 상담은 13회로 나타났다. 성서공단노조는 이주노동자가 코로나19 확산 공포로 귀향 준비를 서두르면서 퇴직금과 체불임금을 정산하려 한 것으로 해석한다. 이주노동자에게 퇴직금 정산이란 출생국으로 되돌아간다는 의미다. 외국인근로자의고용등에관한법률에 따라 이주노동자는 출국해야 퇴직금을 받을 수 있으며, 출국하지 않고 받을 방법은 죽거나 국내에서 체류자격이 변동됐을 경우뿐이다.

이들은 정확한 정보를 얻지 못한 탓에 공포를 느꼈다. 지난 3월 마스크를 구하지 못하는 이주노동자에게 성서공단노조가 손소독제와 마스크4를 나눠주던 날 <뉴스민>은 근 한 달여 만에 공장 기숙사에서 외출한 이주노동자들을 만났다. 방글라데시 출신이라고 소개한 이들은 업체 사장이 기숙사를 나가면 코로나19에 걸릴 것이기 때문에 외출을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알렸다. 이 사장은 기숙사에 있는지 CCTV를 통해 두 시간마다 확인할 것이라고 압박했다고 했다. 이외에도 성서공단노조는 경북 고령 등 대구 인근 도시를 순회하며 고립된 이주노동자에게 마스크를 나눠주며 외출하지 못해 마스크를 구할 엄두도 못 낸 이주노동자 사례를 다수 확인했다. 그들 중에는 기숙사 안에서도 작업용 마스크를 장시간 착용해 얼굴에 자국이 깊게 패인 이도 있었다.

▲2020년 3월 8일 성서공단노조 사무실을 방문한 귀화 이주노동자 김상우 씨는 오랫동안 기숙사를 나오지 않은 방글라데시 이주노동자를 데리고 성서공단노조에 왔다.

법무부는 외국인종합안내센터(1345)를 통해 예방 수칙 등 정보를 안내했지만, 이주노동자들은 정작 이 안내 서비스 자체를 알지 못했다. 2월 코로나19 확산 시기 대구시는 한국어로 1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대응 현황을 안내했지만, 외국어로 안내하지 않았다. 구·군에 설치한 건강가정다문화가족지원센터를 통해 예방 수칙과 대응 요령을 안내하도록 하거나, 대구시 공식 영문 홈페이지에도 안내문을 올리는 것에 그쳤다. 2월 19일 청도대남병원에서 국내 첫 코로나19 감염자 사망 사례가 발생했고 이후 사망 사례가 속출했다. 정주민은 사망자가 대체로 고령의 기저질환자며,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 점을 알 수 있었지만 이주노동자는 감염자 사망과 관련한 뉴스를 차분하게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심각한 정보 부족은 시간이 지나며 차츰 완화됐다. 그 과정에는 성서공단노조 같은 단체나 교민회, 각 나라별 커뮤니티에서 한국어에 익숙하고 정보에 밝은 개인들의 적극적인 활동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코로나19 문제는 시작에 불과했다. 인도에 돌아가 고초를 겪고 다시 대구로 돌아온 라울. 그는 대구 성서공단 섬유공장에서 다시 일을 시작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해고됐다. 공장 사정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이제 이주노동자 앞에는 먹고 사는 문제가 떠올랐다.

▲성서산업단지공단은 성서공단 취직 이주노동자를 3,000여 명으로 파악하고 있고, 성서공단노조는 행정망에 파악되지 않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도 약 3,000명이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소박한 꿈, 성실 근로자

하절기 경남 지역 농촌을 돌면서 일당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우디트 나라얀(가명, 34)은 사실 고용허가제 비전문 취업 비자(E-9)로 성서공단에 취직한 이주노동자다. 지금도 공장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공장에 일이 있을 때는 출근하지만, 공장이 쉬는 주에는 농사를 지으러 간다. 농사가 주업인 네팔 출신이라 농사가 특별히 어렵지는 않다. 다만 한국에서도 농사를 짓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뿐이다.

카트만두 인근 시골에서 8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우디트는 일가족의 기대를 짊어지고 2016년 한국에 왔다. 첫째 큰형은 아랍에미리트(UAE)로 취직했고, 둘째 누나는 집에서 옷감을 짠다. 아랍에미리트는 한국보다 가깝고 취직에도 용이하지만, 임금이 한국의 절반 수준이라 주로 한국어능력시험을 넘지 못한 이들이 차선으로 선택하는 곳이다. 이 때문에 집안에서 처음 한국 취직에 성공한 우디트의 어깨는 무거울 수밖에 없다. 우디트는 무거운 어깨로 공장 일이 없는 날에는 농촌으로 향한다.

우디트가 일할 공장은 한국 땅에 들어오기도 전에 결정됐다. 우디트의 인적사항과 서류 몇 개가 먼저 공장에 전달됐고, 공장에서 채용을 결정하면서 우디트는 성서공단 자동차 부품공장에 취직했다. 우디트의 목표는 성실 근로자 재입국 취업 제도를 통해 한국에 다시 한번 취직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어떤 불평도 없이 열심히 일했다. 일반적 E-9 비자로는 최장 4년 10개월밖에 체류할 수 없지만, 만약 4년 10개월 동안 공장을 한 번도 옮기지 않는 등 몇 가지 조건을 갖춘다면 한국에서 추가로 4년 10개월 일을 더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운이 좋게도 공장 사장도 인상이 나쁘지 않았고 임금체불도 없었다.

공장에서는 자동화 설비인 CNC/MCT 운행을 맡았다. CNC/MCT는 금속을 가공하는 기계로, 정확한 수치 입력이 중요했다. 틀리면 한국인 조장에게 욕을 먹기 일쑤였다. 욕을 먹어도, 주 7일 휴일 없이 출근을 요구해도 싫은 소리를 할 수는 없다. 성실 근로자가 돼야 했기 때문이다. 성실 근로자를 위협하는 위기는 다른 곳에서 왔다. 코로나19가 유행하자 공장 가동률이 줄었다. 해고될까 겁이 났다. 공장은 다이캐스팅을 이주노동자가, CNC/MCT는 한국 사람이 주로 맡아서 했는데 다이캐스팅은 비교적 어렵고 위험한 일이다. 인원을 줄인다면 CNC/MCT에서 줄일 것이고, 한국 사람이 해고되진 않을 것 같았다.

이번에도 운이 따라줬다. 사장은 일단 해고는 하지 않았다. 대신 2주일 단위의 순환 휴직을 도입했다. 공장 칠판에 노동자 명단을 붙여 놓고, 체크 표시가 있는 노동자만 2주일 동안 출근하는 방식이다. 한 달 동안 야간, 주말 없이 만근하면 많게는 300만 원까지 벌 수 있었는데 이제 급여는 100만 원 아래로 떨어졌다. 그래도 목이 붙어 있으니 다행으로 여겨졌다. 공포 때문에 시장에도 못 나가던 2, 3월과 달리 이제 코로나19에도 어느 정도 적응했다. 중요한 것은 잘리지 않고 성실 근로자가 되는 것이다.

공장에서 농장으로 옮긴 8월, 한적한 농장 숙소에 누워 우디트는 계획을 한번 되짚었다. 이번에 성실 근로자가 된다면 네팔에 가서 신붓감을 찾아볼 계획이다. 아직 생각해둔 사람은 없다. 일단 가서 결혼하고, 한국에 같이 올 수 있다면 더 좋다. 같이 못 오더라도 성실 근로자를 끝낸 뒤 카트만두에서 관광사업을 하면서 함께 살 계획이다. 공장에서 한국 사람에게는 주로 욕을 듣지만, 그래도 한 마디라도 더 배우면 장래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다음번에는 공장 칠판 근무자 명단에 자기 이름도 적히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우디트는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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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공단 내 이주노동자의 왕래가 잦은 오토바이숍 인근에는 농촌 일자리를 알선한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코로나 경영 위기, 성서공단에서는 누구부터 잘릴까

공장 이주노동자들이 일자리가 없어 농촌으로 향하고 있다. 성서공단 내 이주노동자의 왕래가 잦은 오토바이숍 인근에는 농촌 일자리를 알선한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인력중계업체가 코로나19 시기 이주노동자 일손 모집을 위해 걸어둔 것이다. 우디트처럼 공장에 일이 없어 농촌으로 향하는 이주노동자는 이 같은 중계업체를 통해, 혹은 교민 커뮤니티를 통해 일자리를 알아본다.

성서산업단지공단에 따르면 2020년 1분기는 2019년 같은 기간 동안에 비해 공장 가동률, 생산액, 노동자 수 모두 줄었다. 노동자는 2,000여 명 줄었으나 감축 규모는 이보다 클 것으로 예상된다. 소규모 사업장에서 고용하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이들은 고용 문제, 임금 등 처우를 보장받을 방법이 없다. 성서산업단지공단은 성서공단 취직 이주노동자를 3,000여 명으로 파악하고 있고, 성서공단노조는 행정망에 파악되지 않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도 약 3,000명이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공장 사정 악화로 인원 감축이 필요한 경우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가장 먼저 해고된다. 미등록이 아니더라도 이주노동자를 대체할 인력이 있는 경우에는 우선순위 해고자가 될 수 있어, 고용불안을 느끼게 된다. 김용철 성서공단노조 상담소장은 “성서공단에서는 코로나19 위기 때문에 해고된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상당히 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일이 줄면 해고 1순위다. 처음에는 잔업을 조금 줄이고 특근을 조금 줄이다가 그래도 일이 없으면 근무일을 줄이고 그다음은 해고”라며 “법에는 휴업수당을 청구할 수 있다고 돼 있는데, 미등록이 이를 알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어 “회사가 휴·폐업 상태가 되는 경우 법에 규정된 사업장 이동 횟수에 포함되지 않는데 이주노동자는 그 사실을 잘 모른다. 임금도 못 받으며 장기휴업인 상태에서 계속 회사 적은 두고 있는 경우가 있다. 장기휴업 상태의 불이익을 울며 겨자 먹기로 감당하면서 농촌을 전전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공장 사정 악화로 인원 감축이 필요한 경우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가장 먼저 해고된다.

줄어든 공장 가동률을 해고가 아닌 순환휴직 방식으로 버틴다고 해도 우디트의 사례처럼 공장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가 마음대로 농촌에서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이주노동자는 동시에 여러 사업장에서 일할 수 없으며, 체류지가 바뀌면 전입일 14일 이내에 신고해야 한다. 제조업에 취직한 이주노동자는 예외적 경우에 농·축산 및 어업으로 업종 변경을 할 수 있지만, 그 반대는 불가능하다. 이주노동자가 농업 분야에 합법적으로 취직하는 방법은 비전문취업(E-9)비자 취득 당시 농축산업 분야로 지정받거나, 계절 근로(C-4, E-8) 비자를 받는 방법이 있다.

코로나19 유행으로 공장 가동률이 떨어지더라도 이주노동자는 마냥 쉬고만 있을 수는 없다. 출생국에서 상당한 비용을 이미 치렀고, 출생국에 남아 있는 가족에 대한 책임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도가 허락하는 경계를 넘나들 수밖에 없다. 우디트는 성실 근로자가 돼 성공적으로 재입국할 수 있을까. 그것은 순전히 우디트의 운에 달렸다.

훌란의 이야기

한국에서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13년째 살면서 모텔 청소를 10년간 해온 출루니 훌란(가명, 34)은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요령을 몸에 익혔다. 모텔 청소부의 미덕은 손님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평소에도 숨은 죽이고 타인의 시선은 피해 마주 보지 않는다. 계단을 지나는 손님 인기척이 들리면 청소하던 방에 들어가 숨을 죽인다. 그럴 때마다 훌란은 그곳에 있다고 할 수도, 없다고 할 수도 없는 존재가 된다.

훌란이 모텔 일을 택한 것은 미등록 이주노동자로서 모텔 일에 여러 장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임금은 백만 원 중반대로 적은 편이지만,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일이 아니고, 여러 사람과 접촉하는 일도 아니다. 비교적 단속 위험도 적은 편이다. 모텔 업계에서도 외모가 한국 사람과 구분하기 어려운 몽골 여성을 선호한다. 무엇보다도 임신 중에도 큰 부담 없이 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했다. 훌란은 2007년부터 2020년까지 대구에서 딸 셋, 아들 하나를 낳았다.

한국에 온 2007년 곧바로 모텔 일을 시작한 건 아니다. 훌란은 역도 선수 자격으로 경기에 참여하려 입국했다가 몽골로 돌아가지 않았다. 몽골은 1990년대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 이후 많은 사람이 실업자가 됐고, 전반적인 소득 수준 하락도 이어졌다. 유목은 현금을 벌기에는 적절하지 않았고 제조업도 발전하지 않아 극심한 경제난과 일자리 위기가 이어졌다. 2004년 한국 고용허가제 시행 이후 몽골을 떠나 한국으로 갈 수 있는 취업 비자를 받으려는 훌란의 또래들이 많아 비자를 얻기 위한 경쟁이 극심해졌다.

봉급이 낮고 임기가 보장돼 있지도 않던 공무원에게 브로커를 통한 비정상적인 방법이 개입될 여지가 컸고, 이 과정에서 부차적으로 발생하는 비용은 모두 이주를 원하는 몽골인이 짊어질 몫이 됐다5. 돈이 있어야 비자를 받든 취직을 하든 하는 상황에서 운전사 아버지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남동생 셋 중 두 명은 일본으로 갔다. 훌란은 몽골에서 사귄 남자친구가 있는 대구로 왔다. 성서공단 이불 공장 기숙사에 신혼방을 차렸다. 훌란도 같은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부모님에게는 한국에서 미등록 신분으로 살 것이라고 알렸다.

▲성서공단의 한 공장 기숙사. 훌란은 공장 기숙사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자료사진)

같은 해 첫째를 낳고부터 계명대학교 인근 원룸으로 거처를 옮겼다. 처음 월급을 받을 때는 몽골에 비해 훨씬 많은 액수에 놀라 그저 좋기만 했는데, 시간이 지나자 맞벌이를 해도 한국에서는 먹고 살기에 부족한 액수라는 걸 깨달았다. 복지, 의료부터 교육까지, 미등록 이주노동자에게는 아무런 사회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같은 미등록인 남편은 유목민 출신이라 몸이 튼튼했고, 공장을 쉬지 않았다. 훌란도 틈틈이 벼룩시장 구인광고를 통해 도배에 청소, 아르바이트까지 가리지 않고 일했다. 그런데도 둘째 아이부터는 어린이집에 보낼 여유가 없었다. 둘째 때부터는 둘째와 여섯 살 터울이 있는 첫째 딸에게 맡기고 모텔 청소를 하러 나갔다.

훌란과 가족은 국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을 이리저리 누비며 유목하듯 살았다. 국가에 포착돼 영향을 받는 날은 아마 강제추방 되는 날일 것이다. 그때까지는 숨죽이고 일을 해야 한다. 하지만 식솔이 늘면서 훌란의 생활은 점점 위태로워졌다. 몽골로 돌아가는 것은 훌란의 선택지에 없다. 속인주의6 국가인 한국에서 아이들은 몽골인으로 간주되지만, 아이들은 한국에서 태어났고 몽골말도 할 줄 모른다. 장래를 그릴 수 없는 삶을 이어가던 중, 위기는 뜻밖에도 감염병과 함께 찾아왔다.

중첩되는 위기

2월 26일, 대구 감염병 특별관리지역 지정 후 5일째.
확진자 1,146명(사망 11명), 대구 확진자 677명(사망 2명).

넷째 출산이 다가오며 훌란은 모텔 일을 쉬었다. 생활비는 빠듯하지만 더 이상 일할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대구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세 자릿수를 넘어서면서 남편도 공장이 아닌 인력소개소에 출근하기 시작했다. 아파트 공사판이든 근교 도시의 농장이든 가리지 않고 갔지만, 공치는 날이 늘어갔다. 한국말이 아직 서툰 남편은 코로나19를 무서워하면서도 일을 놓을 수도 없었다. 코로나 공포와 밥상의 위기는 함께 왔다.

결국 훌란은 대구를 당분간 떠나기로 결심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로서 코로나19에 감염된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감염은 곧 발각으로 느껴졌다. 뉴스에는 확진자의 동선이 세세하게 나왔다. 훌란이 만난 다른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발각되는 것도 두려웠다. 가장 두려운 것은 무엇보다 배 속의 아이에게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우려다. 설날인 2월 26일, 훌란 가족은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텔레비전에서 대구가 봉쇄된다는 보도가 나온 직후다. 서울에 사는 동생 내외 원룸에 들어갔다. 식솔 7명의 불안한 동거가 시작됐다. 훌란의 배는 한껏 부풀었다.

3월, 임박한 출산에 서울에서 병원을 알아봤다. 1,700만 원이 든다고 했다. 넷째이고 제왕절개를 해야 하는데 건강보험도 적용이 되지 않는다. 다른 병원도 상황은 비슷했고 훌란은 대구의료원을 떠올리며 다시 대구로 돌아갈 마음을 먹었다. 코로나19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어느 정도 가신 상태였다.

다시 도착한 대구에서도 사정은 여의치 않았다. 알고 보니 대구의료원이 2월 21일부터 코로나19 전담병원으로 지정돼 일반 환자를 받지 않는 상황이었다. 대구의료원이 제공하던 미등록 이주노동자 진료 지원을 기대했으나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성서공단노조에 도움을 청했고, 여러 대학병원을 전전했다. 겨우 300만 원에 출산할 수 있는 한 병원을 알게 됐고, 그곳에서 출산했다. 병원비는 동생에게 빌린 돈으로 충당했다.

▲한 여성 이주노동자가 성서공단 자동차 부품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여성 이주노동자는 출산을 통해 한국 생활에서 또 다른 어려움을 겪는다. 그가 미등록이라면 그 어려움은 더해진다. (자료사진)

막 태어난 넷째는 큰딸이 도맡았다. 중학생이 된 큰딸은 불평할 법도 한데 훌란의 말을 잘 따른다. 때마침 학교도 비대면 수업이라 큰딸도 돌볼 여력이 있다. 삶의 무게를 너무 어릴 때부터 함께 짊어진 딸을 생각하면 막막하다. 자식들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은 보건소에서 받은 출생증명서밖에 없다. 언제까지나 자식들이 미등록으로 살 수는 없다. 정규교육을 받지 않으면 자식들의 삶도 나아질 가능성이 없다. 그래서 언젠가는 몽골에 돌아가야 한다는 걸 안다. 하지만 몽골행은 어떠한 희망도 없을 때의 최종적 선택지이기 때문에, 훌란은 몽골에서의 삶을 조금도 계획해두지 않았다.

출산 후 열흘, 훌란은 몸을 추슬러 인력소개소가 운행하는 승합차에 몸을 싣고 성주군으로 향했다. 참외밭에서 일하기 위해서다. 승합차 차비는 왕복 1만 원. 참외 따는 시간은 오전 3시간, 저녁 3시간. 중간에 비는 시간은 집에서 넷째를 돌봐야 해서 승합차는 하루 왕복 2번을 탄다. 차비 2만 원을 뺀 나머지 8만 원이 훌란의 일당이다.

빠듯한 살림을 생각하며 훌란은 차에서 내려 비닐하우스 앞에 섰다. 거기에는 베트남 부부, 필리핀 사람, 몽골 사람들이 가득했고 그들은 분주하게 참외를 따고 있었다. 사람들이 참 많았다. 저 사람들은 어쩌다 여기까지 온 것일까. 하지만 누구도 사정을 묻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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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먹여 살리는 이주노동자, 그들의 위기

훌란이 본 이주노동자로 가득 찬 성주 참외 농가 모습은 한국 농촌의 현실이다. 농촌 어딜 가나 이주노동자가 있으며, 결혼이주여성이라 분류되는 이주민은 이미 농촌 가정 곳곳에도 존재하고 있다. 대도시인 대구에서 보는 이주노동자 밀집지는 낯설게 다가오지만, 농촌은 자연스러운 풍경이 됐다. 농촌에서는 이주노동자가 생산도 소비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담당하고 있다. 혹자는 이주노동자가 한국의 일자리를 잠식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들은 사실 한국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 한국을 먹여 살리고 있다.

코로나19로 국가 간 이동이 어려워지자 당장 어려움에 빠진 곳은 농촌7이다. 한국인은 농촌에 가지 않는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발행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코로나19로 인해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포함한 이주노동자 공급이 감소하는 상황에서 향후 농번기 노동력 부족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보고서는 정부가 제시하는 정책이 농가에 실질적으로 도움 되지 않아 미흡하다고 지적한다. 일할 사람이 이주노동자밖에 없는데 인력 부족이 현실화하자 고용노동부 등은 임기응변으로 대책을 내놨다.

국내 취업 기간이 만료되거나 출국을 앞두고 항공편 마련을 하지 못하는 일부 이주노동자를 대상으로 농·어촌에 최대 3개월간 계절근로 취업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여전히 농촌에는 일손이 없다. 농촌 일자리는 미등록 이주노동자 혹은 초청 비자 등 법적으론 일할 수 없는 비자로 입국한 이주노동자가 채운다. 법과 제도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이들은 임금체불을 당하거나, 현금이 아닌 쿠폰8으로 임금을 받는 경우도 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법무부 정책은 ‘단속’으로 요약된다. 이들은 제도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노동권, 인권, 건강권 침해에도 무방비로 노출된다.

이들도 코로나19에 걸릴 수 있다. 사회 안전망 바깥에 있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코로나19 감염에 가장 취약한 이들이다. 이들은 공장이나 농가 인근에 인력소개소가 제공하는 열악한 기숙사에서 공동생활 한다. 이주노동자가 코로나19 감염을 스스로 의심하는 경우에도 이들은 선뜻 코로나19 검사를 받으러 나서기 어렵다. 미등록 발각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이주노동자에게 강제추방은 본인과 가족의 생계, 주거, 교육 등 그들이 유지하고 있던 생활에 전격적이고 불가역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소수자의 위치에 있는 이주노동자는 혐오 대상이 되기도 쉽다. 아직 국내에서 이주노동자와 관련한 코로나19 집단감염 사태9,10가 확인되지 않았지만, 지난 1월 ‘우한 폐렴’으로 불리던 시기 서울 대림동 등에서 중국인·조선족에 대한 혐오 여론이 조성됐다. 당시 중국 혐오는 감염병을 ‘우리’가 아닌 ‘그들’의 것으로 타자화하는 관행과 정파적으로 양분된 한국의 언론 지형 속에서 조장된 측면이 있다.11 이주노동자 또한 언제든 언론의 먹잇감이 될 수 있으며, 이런 상황에서 이주노동자는 위축된다.

법무부도 미등록 이주노동자 감염 확산을 고려해 지난 1월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코로나19 진단과 관련한 진료기록 통보 의무 면제 제도를 시행했다. 이외에도 등록외국인 체류기간 일괄 연장, 단기 체류 외국인 출국기간 유예 등 조치에 나섰다. 이는 상황을 더 악화하지 않는 최소한의 조치에 그쳤다. 법무부 조치에도 불구하고 전국 각지에서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단속됐으며, 전국 출입국의 외국인보호소가 단속된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붐비면서 코로나19 집단 감염이 우려되는 상황을 만들었다. 7월 20일 기준 화성·청주·여수보호소와 전국 출입국 내 보호소에서 보호 중인 외국인은 923명이다. 법무부는 보호소 수용 가능 정원을 공개하지 않고 있지만, 보호소가 가득 차 코로나19 감염과 인권침해가 우려된다는 보도12는 여러 차례 나왔다.

대구 코로나19 유행 시기, 대구시의 이주노동자 의료·방역 지원은 아쉬움을 남겼다. 대구의료원은 미등록 이주노동자 건강증진 정책으로 외국인근로자 등 의료지원 서비스와 미등록이주근로자 외래진료지원 서비스를 시행 중인데, 2020년 1월부터 6월까지 각각 839건, 767건이 지원됐다. 2018년 지원 건수는 각각 3,166건, 4,324건, 2019년은 2,255건, 3,749건이다. 2020년 지원 현황은 상반기에 한정한 수치임을 고려해도 대폭 줄어든 수치다.

▲2018년부터 2020년 상반기까지 대구의료원 사회적 취약계층 의료지원 서비스 사업 현황(자료=대구의료원)

훌란의 사례처럼 대구의료원이 코로나19 전담병원으로 지정되고 나서 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용철 성서공단노조 상담소장은 “대구의료원이 전담병원에 지정된 후 입원 환자를 다 내보냈다. 대구의료원 의료진도 코로나 병동으로 파견 근무를 가면서 원래 대구의료원이 담당하던 업무에는 공백이 생겼다”며 “입원치료는 불가능했고, 외래 진료는 가능했지만 현실적으로는 의사가 없어 진료를 받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주노동자 입장에서도 제대로 설명을 듣지 못하니 대구의료원을 코로나 병원으로 알고 꺼려하기도 했다”며 “노숙인은 곽병원과 대구의료원 두 군데서 진료 지원을 해서 대체 병원이라도 있었는데, 이주노동자는 한 군데 뿐인 진료 지원 병원이 전담병원이 되면서 사회취약계층이 벼랑으로 내몰리는 결과가 생겼다.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구멍 뚫린 의료·방역망을 메우기 위해 성서공단노조, 대구이주민선교센터 등 민간단체나 교민회, 국가별 커뮤니티의 한국 사정에 밝은 이들이 손수 나서야 했다. 위기 상황에서 국가의 일을 대신한 이들은 무엇을 특별히 바라고 한 것이 아니다. 그저 이주노동자도 함께 인간답게 살아가길 바랐다.

이주민을 위한 국가는 없다

코로나19 시기 이주노동자에게는 국가가 없었다. 국가의 빈자리에 국가의 짐을 짊어진 사람들이 있다. 네팔에서 온 수잔 가왈리(Sujan Gyawali, 30)는 코로나19 시기 대구에서 교민들의 안전을 위해 두 팔 걷고 나섰다. 코로나19 때문에 직장을 잃어 기숙사에서도 나와야 하는 이주노동자, 또는 출국을 앞두고 항공편을 구하지 못해 지낼 곳이 없는 이주노동자가 수잔이 운영하는 쉼터로 향했다. 노동 현장에서 사투하는 다른 이주노동자보다 수잔의 사정이 좀 더 나았다. 유학생으로서 대구에서 공부 중이라 여유 시간이 있었고, 브라만 계급이어서 주머니 사정도 비교적 나았기 때문이다.

코로나19 대구 확산 초기, 한국어 실력이 상당한 수잔도 공포를 느꼈다. 하지만 비교적 빨리 실체를 이해할 수 있었다. 두려워하는 교민에게 방역 수칙부터 감염 상황까지 제대로 알리기에 힘썼다. 교민들에게는 수잔이 사비를 털어 운영하는 쉼터가 도움 됐다. 수잔이 쉼터를 운영하게 된 데에는 누나의 영향이 있었다. 수잔의 누나가 박사과정을 밟고 있을 때, 한 교민의 전화를 받지 못했는데 일주일 뒤 그 교민이 사망했다는 뉴스를 봤다. 그는 한국의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길에서 사망했다. 그는 사장의 폭언과 폭행, 출입국에 신고해 네팔로 돌려보내겠다는 협박에 기숙사에서 도망쳤는데 임시로 머물 곳이 없었다고 한다. 누나는 그 소식을 듣고 나서 지금 수잔이 운영하는 쉼터를 만들었다. 수잔은 훗날 누나에게서 쉼터 운영을 넘겨받았다.

▲수잔 가왈리가 운영하는 쉼터에 네팔 이주노동자들이 모여 있다

수잔의 교민 사랑은 애향심에서 나왔다. 그는 네팔이, 네팔 사람이 좋았다. 고향 룸비니에서 카트만두로 옮겨 독립생활을 하면서부터 NGO 활동에 매진했다. 2015년 네팔 지진 당시에는 사비를 털어 식료품을 나눴고, 3개월간 봉사활동에도 나섰다. 한국만큼 치안이 좋거나 개발된 곳은 아니지만, 사람들끼리 부대끼는 네팔이 좋다. 그래서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전에도 대구에서 네팔 커뮤니티 활성화와 네팔공산당 지부 활동도 했다.

수잔이 네팔에 기거하던 시기, 네팔 사회를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했던 활동은 통합 마르크스레닌주의 계열의 네팔공산당 당원 활동이다. 마오이즘을 추종하는 네팔공산당과 거리를 뒀다. 네팔 내전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고,13 수잔은 그 책임이 마오쩌둥주의 네팔공산당에 있다고 생각한다. 네팔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해외로 나가 이주노동자가 된 것도 내전 탓이 크다. 한국은 네팔 사람들이 이주목적국으로 선호하는 곳이다.

수잔은 네팔을 떠날 생각은 없었다. 독립하고부터는 카트만두에서 여행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은 꽤 번창했고, 여러 인맥이 쌓이고 직원도 늘면서 수잔 본인도 세계 곳곳을 여행할 수 있었다. 한국도 처음에는 여행길에 들렀는데, 한국 체류 중 부모님이 한국에서 학위를 따라고 했다. 여행 중 한국에서도 동업자를 통해 사업을 관리하던 수잔은 사업을 넘기고 부모님 말씀을 따라 계명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했다.

글로벌 펜데믹 극복하기

이주민을 위한 국가는 없다. 수잔이 코로나19 시기 대구에서 확인한 것이다. 수잔은 네팔에서도 이를 어렴풋이 느꼈다. 네팔 역시 인도에서 오는 이주노동자가 있고, 그들이 네팔의 힘들고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한다. 한국인이 네팔 이주노동자에게 대하는 태도와 네팔인이 자국에 있는 인도 이주노동자에게 대하는 태도는 비슷하다. 이런 착취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민족에서? 국가에서? 공포로부터? 인간 본성으로부터?

대구의 패닉 속에서 코로나19와 싸우면서 수잔이 확실히 느낀 것은, 이주노동자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차별과 착취는 감염병 위기와 연결된다. 코로나19는 국적을 따지지 않는다. 누구 하나만 잘한다고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한 집단만 살아남을 수도 없다. 코로나19는 사회의 취약한 곳을 향해 흘렀다가 다시 더욱 증폭되어 돌아온다. 고용허가제로 네팔 사람이 한국에 가는 것은 국가 간 정당한 계약이 성립했기 때문이다. 네팔은 결코 한국에 네팔 사람을 아랫사람으로 보낸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정의에 관한 문제다.

“한국 좋아요. 안전하고, 친절하고, 깨끗하고. 차별이 있긴 하지만, 바꿔야죠. 코로나19는 사람한테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안 묻잖아요? 지금은 온 세계가 연결돼 있어요. 이기는 길은 모두 함께 이기는 길밖에 없어요.”

▲네팔에서 온 수잔 가왈리는 코로나19 시기 대구에서 교민들의 안전을 위해 두 팔 걷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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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 국가가 결여된 접경지대, 그곳을 누비는 사람들

국가의 힘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를 지탱하면서 위기를 넘겼다. 수잔이 네팔 교민들과 함께 버텼듯, 곳곳에서 위기를 함께 넘기기 위한 몸부림이 있었다. 인도네시아 결혼이주여성과 결혼한 한 한국인은 성서공단의 인도네시아 사원을 인도네시아 교민 쉼터로도 활용하도록 했다. 베트남 결혼이주여성인 임소현 씨의 휴대전화는 코로나19 이후 쉴 틈 없이 울린다. 도움을 요청하는 교민들의 전화다.

영주권이 있어 여타 이주노동자보다 자유로운 임소현 씨는 최근 경찰 신고로 미등록 신분이 드러나 대구출입국관리사무소의 보호소에 잡혀간 사건 때문에 분통이 터진다. 성서공단 한 공장이 인력감축에 들어서며 한 사람을 해고해야 했는데, 이 일로 두 베트남 교민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둘 모두 미등록 이주노동자였는데, 해고된 교민의 지인이 다른 한쪽을 경찰에 신고하면서 신고된 쪽이 출입국에 잡혀가게 된 것이다. 신고한 지인은 베트남 결혼이주여성이었고, 결혼이주여성은 영주권이 있어서 추방 위험이 없다.

▲인도네시아 사원에서 머물고 있는 이주노동자. 공장 휴업으로 일거리를 찾거나 기숙사에서 나와 갈 곳이 없는 이주노동자가 이곳에서 머문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출입국에 포착되는 순간 강제추방 상황에 놓인다. 그는 성서공단에 8개월 된 딸, 미등록 신분인 아내, 오랜 한국 생활로 이룩한 모든 것을 놔둔 채 급작스럽게 증발했다. 코로나19 상황에서 남은 가족이 겪는 고통은 더욱 크다. 남은 아내는 아이를 보살피면서 집기를 처분하고 베트남으로 돌아갈 방도를 혼자서 알아봐야 한다.

남편은 바로 추방되는 것도 아니고 출입국 내 보호소에서 수개월 간 갇혀야 하는 것도 걱정이다. 이주노동자는 자꾸 보호소에 몰려드는데 항공편이 없어 출국하는 사람은 부족하고, 보호소가 과밀하면서 코로나 감염 우려까지 있기 때문이다. 8월 21일, 딸과 함께 남편을 면회하는 자리에서 남편을 잃은 여성은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아기는 아버지에게 손을 뻗었고 아버지는 입을 맞추려 했지만, 보호소의 이중 아크릴판에 막혀 닿지 않는다. 보호소 안은 이미 한국의 외부다.

▲자진 출국 신고와 남편 보호일시해제 청구를 위해 A 씨가 대구출입국관리사무소를 방문했다.

이주노동자 사이에서도 서로를 추방할 정도의 갈등이 있듯, 이들은 단일한 사회 집단이 아니며 다양한 정체성과 이해관계 속에서 접경지대의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이를 ‘다문화’라는 개념으로 일축해 동일화해서는 이들을 이해할 수 없다. 이들이 갖는 다양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다문화’로 동일화됐을 때, 이들은 한국인인 것도, 한국인이 아닌 것도 아닌 애매한 존재가 된다. 이들은 사실 한국 사회 유지를 위해 필요하기 때문에 제도 안에 초청됐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과 같은 권리를 누리지는 못한다. 이들은 당연한 권리를 요구하는 순간 배은망덕한 존재로 여겨진다. 이들은 불쌍한 존재로 그려질 때에만 제도 안에 수용된다.

이주민은 시혜의 대상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코로나19 상황에서 이주민에 대한 적극적인 방역·의료 지원이 이뤄지지 않는다. 마스크를 주지 않아도, 재난지원금을 주지 않아도, 감염병 예방에 관한 충분한 정보를 전달하지 않아도 그저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들은 요구를 해서는 안 되는 존재다.

8월, 기니 난민신청인들이 한국에서 머무는 동안 취직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한 일14이 있다. 법무부는 난민신청인에 대한 난민 불인정 결정 후, 이들이 행정소송에서도 패소한 경우 난민 재신청을 할 수 있으나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외국인등록증을 회수한다. 등록증이 회수된 난민신청인은 합법적으로 취업 활동을 할 수 없다. 이 난민신청인의 요구는 재신청 결정이 날 때까지 스스로 일을 해서 아이들의 분유 값을 벌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였다. “살 수 있게 해 달라”는 요구가 법과 제도를 넘어서는 요구가 됐다.

▲아주아(가운데, 마이크 든 사람) 씨와 아프리카 출신 난민신청인들이 지난 8월 24일 대구출입국 앞에서 난민신청자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니 난민신청인에 대한 보도 후 한 독자가 그의 처지에 공감하며 육아용품 지원에 힘을 보탰다. 기자는 독자가 지원한 물품을 수령해 기니 난민신청인에게 전달했는데, 그는 특별히 고마운 내색을 하지 않았다. 도움보다 정의를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기니 난민신청인의 반응이 의아했는데 이 또한 접경지대 히스테리의 하나로 이해됐다.

코로나19는 평등한데, 사람은 평등하지 않다. 코로나19 유행 상황에서 대구 이주민의 생존기를 들으며 확인한 것은 이 간단한 명제다. 이주민의 평등은 코로나 극복의 한 조건이다. 대구 이주노동자 코로나19 보고서의 결론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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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본 기사에서는 이주민·이주노동자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정주민·정주노동자라고 쓴다.
  2. 본 기사에서 쓰는 ‘접경지대’는 인류학자 레나토 로살도가 개념화한 단어를 차용한 것이다. 그의 저서 <문화와 진리>에서 로살도는 개별 문화는 문화마다 독특한 문화적 유형을 가진다는 식의 한 문화를 동일화해서 이해하는 고전적 시각은 한 문화 안의 다양한 차이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같은 문화에도 형성된 인종, 종족, 계급, 성적 지향 등 동일화할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하는데, ‘접경지대’란 이러한 차이를 인식할 수 있는 공간을 의미한다.
  3. 시크교인의 쇠팔찌
  4. 마스크 부족 사태로 3월 9일부터 마스크 5부제가 시행됐지만, 이주노동자는 사실상 마스크를 자력으로 구할 수 없었다. 당시 외국인은 농협이나 약국에서 건강보험증과 외국인등록증을 제시하고 마스크를 살 수 있지만, 이주노동자가 농협이나 약국에서 마스크를 사기가 쉽지 않았다. 공장 일과가 끝나기 전에 마스크는 다 떨어진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구매 자체가 불가능했다.
  5. 김현미 등, 「고용허가제 시행 이후 몽골과 베트남의 이주 및 국제결혼 과정에 나타난 인권침해 실태조사」, 국가인권위원회, 2007.
  6. 출생국이 아닌 부모의 국적을 기준으로 자녀에게도 국적을 부여하는 제도
  7. 엄진영, 「코로나19와 농업 고용노동력」, 『KREI 농정포커스』, 제188호, 2020.
  8. 이주노동자 급여 수천만 원 쿠폰으로 준 영천 인력소개꾼(‘19.12.10)
  9. 싱가포르의 경우 이주노동자 집단 감염 사례가 확인되자 이들을 기숙사에 집단 격리하면서 차별적이고 혐오를 조장하는 조치라는 비판을 받은 바 있다.
  10. 대구의 경우 대구시가 운영한 이주노동자 진단검사소 검사 결과 8월 4일 기준 1,146명이 검사를 받았고 이 중에 양성 판정을 받은 사람은 없다.
  11. 김수경, 「감염병, 이념, 제노포비아: ‘코로나19’의 정치화와 반중(反中) 현상」,『다문화와 평화』, 제14집 1호
  12. 코로나19 여파, 보호소에 갇힌 이주노동자…백일 지난 딸과 생이별(‘20.6.15), 코로나가 불러온 출입국 보호소 과밀···”보호일시해제 요건 완화해야”(‘20.9.2)
  13. 주네팔한국대사관에 따르면 내전 기간 약 17,000명이 사망했다.
  14. 한국 체류 난민재신청 기니인, 자녀 넷인데 취업도 못한다(‘20.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