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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한국의 가장 어두운 밑바닥에 이주민이 있다. 그들은 한국의 필요로 한국에 초대됐지만, 여전히 동등한 시민으로 대우받지는 못한다. 쓸만하고 값싼 인력. 또는 가정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쓰이고 보호받지는 못하는 그들은 어떤 사람인가. 그들이 겪는 한국은 어떤 곳인가. 이주민 한 사람의 이야기에 한국 사회의 결함이 중첩돼있다. 대구이주민선교센터를 배경으로 대구 이주민이 겪은 한국의 모습을 살펴본다.

① 어린 딸 혼자두고 출입국에 잡혀간 엄마
② “한국에 결혼이주, 말리고 싶어요”
③ 이민자 2세, 차별의 대물림
④ 이주노동자 산재 사망 후 일어나는 일

2020년 국내 산업재해 사망자 882명. 그중 이주노동자는 118명. 산업재해 사망자 중 외국인 비율은 13.4%. 2020년 전체 국민 대비 국내 외국인 비율 3.93%(51,829,023명 중 2,036,075명)

이주노동자 사망 통계는 일하다가 죽거나 다치는 이주노동자의 현실을 얼마나 전해줄까. 이주노동자가 타국 땅에서 사망하면, 그 이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사망한 그 이주노동자는 어떤 삶을 살아온 사람인가. 산업 현장에서도 이주노동자는 국가의 보호를 기대하기 어려웠고, 알아서 사고를 해결해야 했다. 해결 방법이 막막한 이주노동자는 대구이주민선교센터의 문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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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에도 다쳐서, 월급을 떼먹혀서 찾는 이주노동자들로 붐비는 대구이주민선교센터. 지난해 4월 8일, 평소처럼 붐비던 오전 박순종 목사는 다급한 전화를 한 통 받았다. 한 베트남 이주노동자가 경주에서 일하다가 사고로 사망했는데, 장례 절차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연락이다.

오랜 세월 베트남 이주민과 함께 해 온 선교센터는 대구를 넘어 전국적으로도 베트남 이주민이 어려울 때 도움을 요청하는 곳이 됐다. 박 목사는 쌓인 상담 일정을 한번 살펴봤으나, 이런 상황이면 별 도리 없다. 장례 절차 진행은 유족 동의가 필요해 혈혈단신 처지의 이주노동자는 절차 진행이 어렵기 때문이다. 상담 일정을 베트남 결혼이주여성인 리엔(30) 씨에게 부탁하고 경주로 향했다.

장례식장에는 이미 빈소가 마련돼 있고, 동료로 보이는 베트남 이주노동자 몇이 황망히 서 있었다. 사망한 이주노동자 이름은 떤. 영정사진부터 준비했다. 한국인 장례가 치러지는 옆 방은 화환이 가득했으나 이곳엔 화환 하나 없다. 박 목사는 베트남 현지 유족과 소통해 고인을 엠바밍(방부 처리)해 해외 송환하기로 하고, 그에 따른 복잡한 승인과 서류 절차에 나섰다.

▲떤 씨 장례식장에 떤 씨의 지인들과 박순종 목사(가장 왼쪽)가 대화하고 있다. 아직 영정사진이 오지 않았다.

서류 절차를 진행하는 동안 박 목사는 원청과 하청업체 쪽에서 온 사람들과 대면했다. 사망한 이주노동자는 하청노동자였다. 원청과 하청은 서로 책임을 미뤘고, 박 목사는 직접 원청 사장에게 이야기하기 위해 공장까지 찾아갔다. 그 공장에서 원청 한 관리자와 사고 현장을 둘러보는데, 그 관리자로부터 떤 씨가 시키지도 않은 곳에 들어가 사고가 났다는 말을 들었다.

한 주가 흐를 무렵에서야, 장례식장 대금을 치르는 일로 경주에서의 일을 마무리했다. 국제장의사를 통해 떤 씨 시신을 인천공항으로 보냈을 때, 문득 떤 씨의 먼 친척이 가져온 여행 가방 하나가 떠올랐다.

박 목사가 경주에서 한창 일을 정리하는 동안, 광주에서 일하고 있는 떤 씨의 먼 친척이 장례식장을 찾았다. 그는 휴가를 내고 떤 씨가 살던 기숙사에 가서 유품을 정리해 왔다. 유품이 단출해, 여행 가방 하나에 다 담겼다. 옷가지 몇 벌과 헤드셋. 떤 씨는 일을 마치면 헤드셋으로 음악 듣는 걸 즐겼다고 한다. 고된 잔업을 마치고 떤 씨는 어떤 노래를 들었을까.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박 목사는 기도했다.

“주님, 이주노동자 떤을 불쌍하게 여기시고, 천국으로 인도해 주십시오···”

▲사망한 베트남 이주노동자 떤 씨 유품

타국 생활 도중 사망한 이주노동자 떤
그는 어떤 사람이었나
떤 씨의 아버지가 겪은 한국

떤 씨가 사망하기 전, 떤 씨의 아버지 아인(52) 씨는 아들과 같은 공장에서 11개월 동안 근무했다. 기숙사도 함께 썼다. 아인 씨가 공장을 그만두고 병약한 어머니를 살피러 간 이후, 그 공장에서 사고가 터졌다.

아인 씨는 매사 긍정적인 성격이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일 때 농촌 지역 하띤(Thành phố Hà Tĩnh)에서 태어났지만, 이후 공부하면서 파병 온 군인들조차 피해자인 측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한국은 일거리가 없는 하띤에서 일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는 기회가 있는 땅으로 여겨졌고, 40대에 접어들어 취업비자를 받아 한국에 들어왔다.

처음 일을 시작한 곳은 주조제품을 생산하는 대구 제조업체다. 초장부터 업체의 업무 강도를 견디지 못한 아인 씨는 공장을 도망쳐 나왔다. 그리고 무작정 이주노동자가 많다는 경주로 향했다. 젊은 사람만큼 한국어에 능하지 못했던 아인 씨는 사업장을 마음대로 옮기면 불법이 된다는 사실을 몰랐다.

미등록 이주노동자 신분이 되고서, 경주에서도 여러 공장을 옮겨 다녔다. 잔업과 특근이 쉴 새 없이 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장시간 고강도 노동을 소화하기 힘들었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베트남에서는 첫째 떤 씨를 낳은 이후 두 명을 더 낳았고, 병약한 어머니까지 보살펴야 한다. 하띤으로 돌아가 먹고 살 방법이 마땅찮았고, 이리저리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수밖에 없었다. 아인 씨는 신호 없는 험로를 알아서 헤쳐 나가야 했다.

그 길에서 위안이 되는 건 첫째 아들 떤이었다. 가난했지만 내색하는 법이 없었다. 학교에 다니면서도 집안일을 도맡아 했고, 틈틈이 휴대전화 수리점에서 일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떤은 본격적으로 수리점에서 일을 시작했고, 아인 씨는 아들을 믿고 한국에 올 수 있었다. 떤(Tấn, 晉). 앞으로 나아가라. 첫째를 낳았을 때 아버지는 아들의 삶이 더 나아지길, 앞으로 나아가길 기대하며, 가난을 벗어나길 기대하며 그 이름을 지었다.

▲떤 씨의 아버지 아인 씨가 화상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경북 경주에서 아들과 6년 만의 재회
같은 공장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
귀국 후 휴대전화 수리점을 차리려 했던 아들

2017년 경주에서 아들 떤을 다시 봤을 때 아버지는 기뻤고, 또 슬펐다. 6년 만의 재회. 훌쩍 큰아들은 호리호리한 몸은 그대로였지만 어엿한 청년이 됐다. 상고머리를 하고 셔츠를 빼입었다. 반가운 마음이 앞섰지만, 젊은 날을 이국땅 공장에서 보낼 것을 생각하니,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대물림했다는 생각도 뒤를 이었다.

아들과 11개월을 같은 기숙사에서 지냈다. 같은 공장에서 아버지는 절단 작업, 아들은 다관절 로봇으로 벤딩 교정 작업을 맡았다. 같이 출근하고 같이 퇴근했다. 잔업이 버거웠던 아인 씨도 아들과 함께하며 버틸 힘을 얻었다. 아들은 가능한 많은 일을 하려 했다. 아들은 한국에서 모은 돈으로 베트남에서 휴대전화 수리점을 차리고 싶어 했다.

한국 체류 8년, 50대를 바라보는 나이가 되면서 업무를 버티기 어려웠던 아인 씨는 아들에게 다른 공장으로 가자고 했다. 하지만 아들은 잔업을 많이 시키는 곳에서 돈을 더 벌겠다고 했다. 완고한 아들을 설득하기 어려웠다. 아인 씨는 그길로 다른 곳으로 옮겨 공장을 좀 더 다니다, 1년이 채 가기 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일이 힘에 부치기도 했지만, 어머니 건강이 악화됐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귀향 한 달 후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임종을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 두고 온 아들의 마지막을 지킬 수는 없었다. 같이 가자고 좀 더 설득해야 했다고, 아인 씨는 지금도 후회한다.

***

박순종 목사가 수습한 떤 씨는 인천공항에서 항공편으로 베트남 하띤시에 도착했다. 어머니는 관을 붙들고 쓰러졌다. 장례는 하띤 풍습에 따라 매장했다. 쌀을 기르는 논 옆에 아들 무덤을 만들었다. 방 한켠에 아들 사진을 걸어 놓고 제단을 만들었다. 장례를 마치고 3일째 지내는 제사. 베트남에서 처음 지내는 제사는 혼을 부르는 제사다. 한국에 있는 아들의 혼을 부른다. 집으로 돌아오라. 그리고 저승으로 가서 안전하게 지내라.

49재, 100일재, 1주기가 지나는 동안, 아내는 상처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아인 씨는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아들은 죽었다. 누구한테 책임을 묻는다거나, 원망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힘들었던 일도, 후회도 뒤로하고, 아들을 수습을 도와준 이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넨다.

“그때 같이 가자고 좀 더 설득했다면 이런 일이 안 생겼을 수도 있을 텐데. 그 생각이 자꾸 나서 아직 아픕니다. 그래도 어차피 아들은 죽었습니다. 이제 와서 누구를 탓하고 책임을 묻고 싶지 않습니다. 도와준 사람들에게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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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16일, 떤 씨가 사망하고 11개월이 지나서 법원은 떤 씨 산업재해 사망사고와 관련해 원청업체 사장에게 징역 8개월과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관련기사=경주 베트남 하청노동자 사망 사건 원청업체 사장 징역형(‘22.3.16)) 사장은 징역형 선고에 불복하고 항소해 현재 항소심 재판을 앞두고 있다.

박 목사는 선고 결과를 듣고 생각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라는 정현종 시인의 시를 떠올렸다. 떤 씨가 베트남에서 한국에 오기까지. 한국에서 보낸 시간과 베트남에 돌아가 살아갈 꿈을 키웠을 시간까지. 떠나간 한 사람의 일생이 판결문에 담기진 않는다. 그래서 박 목사는 떤 씨를 생각하며 다시 기도한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_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정현종, ‘방문객’, 『광휘의 속삭임』, 문학과지성사(2008)

박중엽 기자
nahollow@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