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교협 시사 칼럼] 미얀마의 군사 쿠데타를 방관할 수 없다 / 엄창옥

14:54

2021년 2월 1일 새벽 5시 30분! 동남아시아에 위치한 미얀마에서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미얀마 시민은 2015년 선거 혁명으로 53년간 지속되었던 군부 독재를 종식시켰다. 미얀마가 여기까지 도달하는 데 어찌 수많은 질곡이 없었겠는가. 미얀마는 1886년부터 영국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다. 독립운동의 영웅 아웅산이 이끄는 ‘30인의 동지’는 영국과의 삥룽조약(1947)를 통해 독립을 약속받았다. 이때 불행히도 아웅산은 암살되었지만 ‘30인의 동지’ 중 한 사람인 우 누(Nu)가 독립 국가를 수립하였다. 이때만 해도 ‘30인의 동지’는 서구 식민주의 정책에 저항하는 청년 민족주의자들이었다.

군사 쿠데타의 연쇄

독립 후 이들은 분열되었다. 1962년 소수민족 간 분쟁이 심화되자 ‘30인의 동지’ 중 한 사람인 네 윈(Win)이 우 누에 불만을 품고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제1차 군사 쿠데타였다. 이때부터 미얀마에서는 군사 독재에 대한 시민저항이 시작되었다. 1988년 8월 8일, 8888민주항쟁이 극에 달했고, 군부는 민주항쟁을 진압하면서 수천 명의 시민을 학살했다. 이 과정에서 아웅산 수지가 중심이 되는 ‘민주민족동맹(NLD)’이 결성되었다. 그들은 국민투표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그해 9월, 군 총사령관인 소우 마웅(Saw Maung)이 제2차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승복을 입은 승려들조차 ‘샤프론 항쟁’으로 민주화를 외쳤고, 독재 군부의 유혈진압에도 불구하고 민주 시민항쟁은 계속되었다. 2008년 군부는 국회의원 의석 25%를 군부가 선점하도록 하는 신헌법을 제정함으로서 군부독재체제를 견고히 했다. 군부는 2011년 위장된 민간 정부를 출범시켰다. 그것이 테인 세인 정부다.  그 정부는 실은 ‘군복을 벗은 군인’의 정부였다. 미얀마 국민은 무늬만 문민정부에 만족하지 않았다.

2015년 비로소 평화적 국민선거가 실행되었다. 총 의석 664석 중 군부가 25%인 166석을 선점하고서도 아웅산 수치의 민주민족동맹에게 390석(58.7%)의 의석을 줌으로써 ‘제1기 문민정부’가 출범하였다. 이 결과는 미얀마 군부의 존재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미얀마 국민은 한발 더 나아갔다. 2020년 11월 총선에서는 민주민족동맹에게 398석(60%)의 의석을 밀어주었다. 군부 독재의 설 자리가 점점 좁아졌다.

미얀마 국민의 90%가 민주화를 열망했다. 이들은 반 군부 민주화 세력인 셈이다. ‘제2기 문민정부’가 자리잡는듯했다. 아무리 강고한 군부라 할지라도 국민의 10%만으로는 나라를 통치할 수 없다. 그래서 바로 ‘제2기 문민정부’가 출범하는 국회 개원날 새벽, 제3차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제 미얀마 군부는 2011년 독재정권으로의 회귀를 원하고 있다.

▲지난 7일 미얀마 양곤에서 벌어진 민주화 시위 (사진=twitter @rshorsey)

아시아 민주시민의 연대

미얀마의 제3차 군사 쿠데타가 어떻게 마무리 되는가에 따라 아시아 민주화 여정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군사 쿠데타에 저항하는 민주화 운동이 힘을 얻게 된다면 아시아 군부독재 세력에 큰 타격을 줄 것이지만, 군사 쿠데타가 성공하면 아시아의 군부독재는 재건의 힘을 얻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미얀마의 군부는 강력하며 미얀마의 민주세력은 아직 취약하다. 그들은 중국과의 관계가 견고하며, 비동맹세력들이 배후에서 후원하고 있다. 태국과 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의 독재국가들은 미얀마 군사 쿠데타에 침묵하고 있다. 이것은 ‘위험한 침묵’이다. 독재의 어두운 전염성을 염려한다.

어떤 길이 있을까. 국가가 나서면 더 좋을 것 같지만, 실은 무겁고 복잡해진다. 미국은 우리나라의 5.18광주항쟁에는 침묵했지만, 미얀마 쿠데타에는 즉각적 반응을 보인다. 냉전 구조나 반(反)중국 전략 때문일 것이다. 국가 수준에서는 민주화 의제도 전략적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이 위험한 침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길은 아시아 민주시민 연대’의 길일 것이다. 2019년 홍콩시위의 주역인 조슈아 웡은 “홍콩시민들은 한국인이 민주와 인권을 위해 용기 내 싸운 역사에 감동하고 있다”며 “홍콩시민들과 함께 손잡고 가주길” 희망했다.

천안문 시위 주역인 왕단은 “한국의 군부독재시절 국제사회가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관심과 지지를 보낸 것처럼 이제 아시아에 일어나는 민주화 열망에 더 많은 관심과 지지를 표해 줄 것을 호소한다”고 말했다. 스리랑카에 세워진 민주화 기념비에는 ‘광주정신을 이어받아 건립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 아시아의 민주화는 혼자서 이룰 수 없고 함께 연대하며 이루어갈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화 운동은 전염하는 밝은 힘을 믿는다. 1986년에 필리핀의 ‘피플파워’은 1987년의 ‘서울의 봄’으로 전염되었고, 1989년 중국의 ‘천안문 사태’로 전염되었던 것을 기억하는가. 또한 2011년 튀니지에서 시작된 ‘재스민 혁명’은 알제리와 이집트로 번지고,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등 전 아랍으로 전염되어 ‘아랍의 봄’을 불러 오지 않았던가.

‘민교협’이 먼저 아시아 시민연대의 손을···

우리가 침묵하면 아시아 민주주의는 위험해진다. 아웅산 수치와 민주민족동맹에게 민주 정부를 재창출할 수 있도록 손을 잡아줘야 한다. 이미 부산과 경남에서 이주민연대회의는 성명서를 내고 ‘세계시민의 심성을 갖춘 한국 시민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위해 손을 내밀고 있다. 필자는 이 요구에 민주평등사회를 위한 전국 교수연구자협의회가 먼저 응답할 것을 제안한다. 이 협의회는 누구보다 먼저 1978년 6월 항쟁에 호응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고 노래하는 아시아의 평화를 향한 이육사의 소망을 이루어 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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