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1634년 갑술양전, 성공한 정책의 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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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좌도 사람치고 신득연申得淵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게 되었다. 대부분의 경상좌도 백성들은 그로 인해 최소 20년은 세금폭탄을 안고 살아야 하니, 기억하지 않고 싶어도 세금을 낼 때마다 떠오르는 이름이 되었을 것이다. 387년 전인 1634년 11월, 하삼도, 즉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 지역에서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던 갑술양전에 대한 이야기이다.

▲오늘날의 토지대장에 해당하는 조선시대 양안. 사진은 경남 합천의 양안. [사진=토지주택박물관]

양전量田은 말 그대로 ‘논(의 크기와 소출량)을 재는 것’이다. 조선시대 땅의 단위는 소출량에 따라 가변적이었다. 양전은 엄밀하게 말해 토지의 물리적 크기가 아닌 단위별 소출량을 재는 것이었다. 조선시대 1결이란 대략 400말의 소출을 내는 땅이므로, 토지 비옥도에 따라 물리적 크기는 달랐다. 조선시대 땅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물음에 대한 가장 적절한 답으로, 땅을 통한 소득과 그에 대한 세금 부과를 목적으로 땅의 단위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이유에서 조선은 전국의 토지를 비옥도에 따라 6등급으로 구분(전분 6등급)하고, 매해 작황을 9등급(연분 9등급)으로 구분해서 당해 세금을 부과했다. 최고 등급의 논에 당해 풍년이 들면 많은 세금을 부과했고, 넓은 토지라 하더라도 등급이 낮은 데 당해 작황까지 흉작이면 세금은 적게 부과되었다. 따라서 중앙정부는 세금 부과 대상을 파악하고, 그 토지들의 비옥도가 어떤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잘 지켜지지는 않았지만, 20년 주기로 양전을 하도록 규정된 이유이다.

그러나 양전은 국가적 차원에서 엄청난 행정력을 동원해야 하고, 세금 부과가 목적인지라 백성들의 원망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중종 때 이후 1634년까지 제대로 된 양전을 시행하지 못했던 이유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양안量案(양전의 결과를 담은 토지 대장)이 불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자호란까지 겪으면서 국가 재정은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국가 재정 정책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전국 단위의 양전이 필요해졌다. 1634년 갑술년에 하삼도를 중심으로 각 도에 2명씩 양전사를 파견한 대규모의 양전이 시행되었던 이유다.

정부에서야 당연히 필요한 일이지만, 당하는 백성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죽을 맛이다. 양전사는 말이 좋아 ‘양전’하는 사람이지, 국가의 세수 확보를 위해 ‘양을 늘려야 하는 사람’이다. 백성들 입장에서는 좋은 땅도 나쁜 땅을 만들어야 했고, 양전사는 나쁜 땅도 좋게 만들어야 했다. 1634년 11월, 신득연은 가용한 모든 공권력을 동원했고, 나졸들은 그 힘에 기대어 형장까지 휘두르면서 안동부와 예안현(현 안동시 예안면 지역) 땅의 등급을 올렸다. 예안현에는 없던 땅도 생기고, 갓 개간한 땅도 비옥한 땅이 되었다.

게다가 당시 양전 과정에서 예안현감이 보여준 태도는 비루하기 짝이 없었다. 날마다 논‧밭 사이를 오갔지만, 그게 백성들을 위한 게 아니라 중앙에서 파견된 양전사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영천(지금의 경상북도 영주) 백성들은 무슨 복인지, 영천군수 이후기는 예안현감과 달랐다. 그는 중앙에서도 꽤 권세가 있었던 사람으로, 본인 생각에 맞지 않은 일이면 윗사람의 명도 따르지 않았다. 이번 양전과정에서도 자신의 동의가 없이는 토지 측량용 말뚝 하나 박지 못하게 했고, 전답의 넓이와 등급 역시 자신이 청하는 대로 따르게 했다. 기세등등하기만 했던 신득연도 이후기에게는 꼼짝하지 못했고, 영천의 땅은 현 등급보다도 낮아지면 낮아졌지 높아지지 않았다.

안 그래도 억울하던 차에 그 이듬해인 1635년 1월 23일, 예안에 사는 김령은 더 기가 찬 소식을 들었다. 당시 경상좌도에 신득연, 경상우도에 임광, 충청좌도에 한흥일, 충청우도에 이현, 그리고 전라좌도에 박황, 전라우도에 정기광이 양전사로 파견되었다. 그런데 당시 경상좌도 신득연을 제외한 대부분의 양전사들은 백성들을 생각해서 토지 등급을 각박하게 매기지 않은 듯했다. 물론 남의 떡이 커 보인 탓일 수도 있겠지만, 경상좌도 입장에서는 충청도에 파견된 두 양전사의 관대하고 공평한 처사는 들을 때마다 부럽기만 했다. 특히 충청우도에 파견된 이현은 백성들의 편의를 더욱 세밀하게 살펴서, 수령 가운데 양전사에게 잘 보이려고 등급을 과하게 높인 세 명을 잡아다 곤장까지 쳤다. 원래 이현은 양전사를 선임할 때 경상좌도를 맡기로 했다가 파견되는 과정에서 바뀌었으니, 경상좌도 백성들 입장에서는 불행도 이런 불행이 없었다.

많은 조선시대 연구들은 갑술양전을 성공적인 정책으로 평가하고 있다. 당시 토지 장부에 기록되지 않은 토지들이 대거 토지대장에 수록되었고, 이로 인해 얻은 토지결수가 임진왜란 이전의 80% 수준에 도달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피폐한 상황에서 이 양전을 통해 정상적인 국가 운영의 발판을 마련했던 것이다. 당시 특히 경상도 토지가 많이 확보되었는데, 이는 등록된 토지 등급을 올렸고 기존에 포함되지 않았던 토지를 등록하면서 이룬 성과이다. 성공적인 갑술양전 이면에는 신득연의 횡포와 이로 인해 당장 세금폭탄을 맞아야 하는 경상좌도 백성들의 눈물이 있었던 것이다.

국가 차원에서 성공한 정책이란 무엇일까? 갑술양전을 성공적인 정책으로 평가하면, 백성들의 고통과 눈물을 요구한 신득연은 성공적인 정책의 주역이라 해도 과하지 않다. 백성들의 입장을 헤아려 양전사에게 잘 보이려 했던 지방관들에게 곤장까지 쳤던 이현의 처사는 신득연이 아니었으면 실패한 정책을 만드는 이유가 될 수도 있었다. 국가 정책은 흔히 소금장수와 우산장수를 둔 부모의 심정으로 하는 것이라지만, 정책의 성공을 위해 피와 눈물을 쏟아야 하는 백성들의 아픔은 수치로 치장된 성과와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기 마련이다.

이제 곧 우리는 포스트 코로나로 시대로 진입할 것이다. 팬더믹 상황에서 K방역을 통해 경제성장률을 –1%정도에서 막아 낸 것은 분명 대단한 성과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1년 동안 가게 문을 열지 못해 빚으로 연명했던 소상공인들이 있고, 생업 전선에서 밀려나 하루하루가 막막한 사람들의 피와 눈물이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K방역은 자신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결과이며, 그 희생은 수치상으로 제시되는 –1% 정도의 희생으로부터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어쩌면 이들의 희생을 밟고 대다수의 경제주체들은 성장했을 수도 있다. 코로나가 끝난 이후, 우리가 이들이 일상을 회복하도록 돕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우리는 387년 전 백성들에게 희생만을 강요했던 경상좌도 양전사와 무엇이 다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