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1629년, 예안현감의 형편없는 세금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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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9년 음력 4월 2일, 예안현감 김전은 조정에서 내려 온 소식으로 온종일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조정에서 세금 체납 관련 대책이 논의되었는데, 전세田稅(곡물로 내는 정기 세금)가 50석 이상 체납된 고을은 수령을 신문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예안현의 체납액 자체에 대한 기록이 없어 정확한 양을 알 수는 없지만, 눈에 띄는 체납액만 해도 1백 40석이 넘었다. 조정의 조치로 인해 예안현감은 신문을 받는 게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벼슬이 떨어질 것을 걱정할 판이었다.

예안현감의 세금 운영은 부실의 표상이었다. 이미 2년 전부터 예안현의 아전 이택운과 나생이 세금 창고를 도둑질해서, 납부하지 못한 수량만 40석이 넘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세금 수취를 현감이 일일이 감독하지 못했던 상황을 이용하여 세금 징수를 맡은 아전들이 이를 착복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아전들 급여까지 조정에서 책임질 수 없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전들은 지역에서 알아서 수입을 확보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전들이 세금창고까지 손대지 않도록 잘 관리해야 하는 이유이다.

게다가 온계와 부포의 유력 가문들로부터 거두지 못한 체납액도 1백 석이 넘었다. 가난한 백성들에게는 온갖 횡포를 부려서 세금을 거두었지만, 정작 유력문중에 대해서는 눈치만 보면서 부과된 세금도 제대로 걷지 못했던 것이다. 예안현이 비록 작은 현이기는 해도, 퇴계학맥의 정통을 잇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러다보니 중앙 권력과 연결된 사람들도 많았다. 예안현감 입장에서는 이리저리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이다. 거둔 세금은 아전들이 도둑질하고, 세금의 많은 양을 감당해야 하는 유력문중들은 대 놓고 세금을 체납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었다.

전전긍긍하는 예안현감을 위해 대책을 만든 이는 향리 구사의였다. 그는 우선 관아 창고에 있는 환곡을 전용해서 전세로 납부하고, 가을이 오면 환곡을 더 거두어 이를 갚자고 했다. 당시 예안현 상황에서는 이게 유일한 방법이기는 했다. 예안현 관아에 그나마 쌓여 있는 곡식이라고는 환곡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4월이면 환곡을 나누어 주는 시점이니 창고가 비어도 우선 문제 될 것은 없어 보였다. 예안현감으로서는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고 봐야했다.

그러나 환곡이 어떠한 곡식이던가? 음력 4월은 백성들이 가장 힘든 시기로, 그 흔적은 지금도 ‘보릿고개’나 ‘춘궁기’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환곡은 이러한 시기 굶주린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주어 구제하고, 가을에 수확한 곡식을 가지고 갚도록 한 제도이다. 그런데 이 곡식을 전세로 내고, 가을에 백성들로부터 빌려주지도 않은 환곡 명목으로 세금을 더 거두어 창고를 채우려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백성들 입장에서는 춘궁기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해도 환곡을 받지 못하고, 가을이 되면 빌리지 않은 환곡까지 전세의 이름을 갚아야 했다. 아전들이 훔치고 유력문중들이 체납했지만, 부담은 오롯이 백성들 몫이었다.

백성들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예안현감의 행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해 같은 달 13일, 경상도 각 군현은 왜관에 사용할 포를 관할 지방관인 동래부사에게 납부해야 했다. 당시 경상감사가 정해 놓은 세포(세금으로 내는 포) 기준은 6새 짜리 36자였다. 6새란 포를 구성하는 올 수로, 포의 품질을 의미했다. 1새를 1승升이라고도 했는데, 1승은 보통 80올 정도였다. 6새면 1자(대략 12.5~13센티미터) 길이를 480올 정도의 밀도로 짜여진 포를 의미했다. 이러한 품질의 포를 4.6미터 정도를 내는 게 경상감사가 지정한 세포 기준이었다. 그런데 예안현에서만 세포로 8~9새 짜리를, 그것도 41자나 납부했다. 8~9새짜리 포는 보통 6새자리 포보다 2~3배나 더 비싼 품질 좋은 포인데, 그 같은 고급포를 5자나 더 납부했다. 기준에만 맞추면 될 일이었는데, 예안현 백성들은 이것마저도 기준에 비해 2~3배나 더 부담해야 했다.

이유는 분명했다. 다른 군현보다 더 좋은 포를 납부함으로써, 경상감사에게 좋은 평가를 받으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포가 사용될 곳은 다른 곳도 아닌 바로 왜관이었다. 이 포를 받은 동래부사는 오죽하면 “왜인들이 다음부터 예안현감이 보낸 포를 기준으로 (포를 달라고)요구를 하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면서 혀를 찰 정도였다. 그리고는 다른 군현과 유사한 수준의 포로 교환해서 왜인들에게 지급했다. 백성들의 고혈까지 짜서 윗사람들에게 잘 보이려 했던 노력이 결과적으로는 욕으로 돌아왔다. 이 과정에서 부끄러움은 오직 예안현 백성들의 몫이었다.

그런데 경상감사에게 잘 보이려는 예안현감의 노력은 여기에서도 한술 더 뜨고 있었다. 당시 경상감사는 백성들의 고통을 파악하기 위해 고을마다 1년에 요역으로 8결당 베를 몇 필 내는지 보고하도록 했다. 요역의 기준이 토지 8결 단위였으므로, 그 기준 당 노동력 대신 내는 베의 양이 얼마인지를 파악함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구사의는 예안현감과 모의해서 8결당 베 1필 반을 거두었다고 보고했다. 실제 얼마나 거두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 없지만, 사실대로 보고하면 예안현 백성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는지 단번에 알 정도였다고 했다. 얼마나 많이 줄여서 보고했을지 짐작 가능한 대목이다.

세금을 관리하고 백성을 위해 제대로 사용해야 할 사람들이 세금을 도둑질하고,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하는 권력자들이 주로 세금을 체납하는 것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낯익은 장면이다. 백성들을 위해 일해야 하는 사람들이 백성들의 부담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출세를 시도하는 것 역시 예나 지금이나 흔하게 목격되는 장면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 또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은 도둑질과 체납으로 비어 있는 국고를 채우는 이들은 늘 성실하게 세금을 납부했던 백성들이라는 사실이다. 세상이 그렇게 바뀌어도, 오랫동안 변치 않는 참으로 이상한 현상이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다른 듯, 같은 역사>는 달라진 시대를 전제하고, 한꺼풀 그들의 삶 속으로 더 들어가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사람의 삶은 참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네”라는 생각을 기록을 통해 확인하는 시간으로 기획된 것이다. 이 원문은 일기류 기록자료를 가공하여 창작 소재로 제공하는 한국국학진흥원의 ‘스토리 테파마크(http://story.ugyo.net)’에서 제공하는 소재들을 재해석한 것으로,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우리의 현실들을 확인해 보려 한다. 특히 날짜가 명시적으로 제시된 일기류를 활용하는 만큼, 음력으로 칼럼이 나가는 시기의 기록을 통해 역사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