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1635년, 가짜 뉴스와 증폭의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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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0년 오랜 논의를 거쳐, 이른바 동방의 오현(조선의 다섯 성현 :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에 대한 문묘 종사가 이루어졌다. 문묘란 문선왕묘文宣王廟의 약자로, 유학을 이념으로 하는 조선이 국가차원에서 관리했던 공자의 묘우이다. 이곳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유학 이념을 상징하는 성현들이 배향되어 있는데, 여기에 조선의 유학적 이념을 상징하는 성현들을 배향했다. 동방의 오현은 개인을 넘어 국가적 이념의 상징이 되었고, 후학들은 자기 학맥의 정통성을 그들에서 찾았다. 이렇게 되자 얼마 뒤 인조반정을 통해 집권한 서인 정권 역시 자기 학맥의 정통성을 만들기 위해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묘종사를 추진했고, 이는 영남 남인들의 반대에 막혀 조정의 뜨거운 감자가 되어 있었다. 이 기록이 있던 1635년 언저리의 상황이다.

1635년 음력 8월 26일, 예안에 사는 김령은 자신이 들은 소문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 기록에 따르면 음력 8월 9일 영의정 윤방尹昉이 경연자리에서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다시 꺼내 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 건의를 받은 인조의 질문이 이상한 방향으로 튀었다. 인조는 “‘이이가 상중에 아들을 낳았다’라는 말을 어디에선가 들었다”라면서 고개를 저었다. 이 말에 화들짝 놀란 윤방은 그 이야기의 출처를 물었고, 인조는 “이귀李貴에게 들은 말이니 확실할 것이다”라면서, 그 소문을 확인해 주었다. 이 말을 들은 윤방은 서둘러 “이귀는 만년에 모든 것이 가물가물했습니다. 이것은 이황李滉에 대한 말인데, 잘못해서 이이의 말이 된 것입니다”라면서 사태를 무마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말은 실수로 치부하기에는 결코 작지 않은 일이었다. 실제 상중에 아이를 낳았다면, 이는 이이의 일이건 이황의 일이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현대인들 입장에서야 이게 뭐 그리 큰일일까 싶지만, 조선시대에 이는 강상綱常에 관한 문제였다. 강상은 효와 충에 기반한 유학의 기본 윤리와 가르침을 의미했다. 강상이 무너지면 유학 이념에 따라 형성된 조선 역시 무너지므로, 이념 중심 국가인 조선에서는 이를 결코 용인될 수 없었다. 조선시대판 사상범으로, 처벌도 엄했다. 국가 전체가 슬픔에 빠진 국상 기간에 술과 고기를 먹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은 충효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로, 문묘에 배향된 이황이나 문묘 배향 추진 대상인 이이가 상중에 아이를 낳았다는 것은 강상을 범한 일이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인조의 물음은 강상을 범한 사람이 유학을 창시했던 공자와 그 후예들이 배향된 문묘에 들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이를 옹호하는 과정에서 이황이 거론되자. 영남에서는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영남남인 관점에서 보면, 이는 이이를 성인으로 추대하려는 시도를 넘어 이황과 그 후예들로 이루어진 영남학맥 전체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황이 국상 중에 측실에서 아들을 보았다는 소문이 그 이전에도 돈 적이 있어서, 영남에서는 이 문제로 꽤나 시끄러웠다. 물론 실제 이황이 국상 중에 아이를 낳은 적은 없다. 그런데 어떠한 경로로 이황이 강상을 범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영남 사림들은 이로 인해 퇴계 선생의 일생이 기록된 연보까지 고쳐서 아들 적寂(이적)이 태어난 해가 신묘년임을 분명하게 밝혀 두기도 했다. 그만큼 예민한 문제였고, 영남남인 입장에서는 이미 충분하게 해명된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사안이 다시 거론된 것이다. 왕이 있는 경연자리에서, 그것도 만조백관을 대표하는 영의정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영남남인들 입장에서는 눈의 뒤집힐 노릇이었다. 물론 인조의 물음도 심각했지만, 윤방의 대답은 더 큰 문제와 분란을 만들 소지를 제공했다. 인조의 의심이 사실이라고 판단되면 서인들 전체의 정당성을 무너뜨릴 수 있고, 윤방의 대답이 사실이라면 이황은 문묘에 있을 수 없다. 인조의 물음은 아마 이이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에둘러 말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윤방의 말은 영남 남인들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어찌된 일이었을까?

<인조실록>에 따르면 인조의 물음은 분명했다. 이이와 성혼의 문묘종사가 숙종대에 가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아, 인조의 이 물음은 거부 의사로 이해된다. 그런데 인조의 물음에 대해 실록은 실제 윤방이 답한 게 아니라, 당시 동석했던 최명길이 답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말의 뉘앙스에도 차이가 있다. 최명길은 “항간에 그러한 말이 있기는 한데, 그 이야기는 이황을 두고 했던 말입니다”라고 답했는데, 그의 의도는 이황이 아이를 낳았다는 말이 아니라, 상중에 아이를 낳은 성현에 대한 소문이 이이를 대상으로 한 소문이 아니라 이황 관련 소문이라는 말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 함께 참여했던 승지 한필원은 이 사실을 좀 더 명확히 해서 “그 말(이황 관련 소문)은 사실 과거 정인홍이 이황을 모함하기 위해 했던 말이다”라고 밝혔다. 경연에서의 논의는 그리 심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초기 윤방의 말로 전해진 소문은 영남 남인 전체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어떠한 경로를 통해 전해진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성현에 대한 윤방의 중상모략이 도를 넘었다고 판단되었다. 이는 결국 서인들이 자기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이황과 같은 성현을 모함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충분했다. 사문의 존장에 대한 부정은 곧 자신들에 대한 부정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곧바로 그들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겨야 했다. 이황의 결백을 왕에게 알리고, 이러한 문제를 발생시킨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했다. 조목의 문인인 김중청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퇴계변무상소>에 대한 논의가 일었던 이유이다. 이 상소 운동은 이후 사안 자체가 정확하게 알려지면서 동력을 잃기는 했지만, 한동안 영남을 시끄럽게 했던 이슈였다.

그러나 이러한 가짜뉴스는 이후 충돌을 위한 불씨들로 다시 저장되었다. 이황의 정통성에 대한 가짜뉴스는 영남남인들의 감정을 고조시켰고, 서인들은 필요만큼 이를 활용했다. 여기에 증폭의 마법이 걸려 영남남인들은 목숨을 걸고 서인 척결에 나서야 했다. 이념의 선명성을 강조하는 이념 사회는 늘 편을 가르기 마련이고, 가짜 뉴스와 소문을 무기로 하는 증폭의 마법은 그 사이에서 교묘하게 살아 움직인다. 조선의 붕당정치가 그랬고, 오늘 우리 정치의 현실이 그렇다. 이념은 선명할수록 빛이 나지만, 사람의 삶은 섞일수록 평화로워진다는 것을 모른 탓이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다른 듯, 같은 역사>는 달라진 시대를 전제하고, 한꺼풀 그들의 삶 속으로 더 들어가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사람의 삶은 참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네”라는 생각을 기록을 통해 확인하는 시간으로 기획된 것이다. 이 원문은 일기류 기록자료를 가공하여 창작 소재로 제공하는 한국국학진흥원의 ‘스토리 테파마크(http://story.ugyo.net)’에서 제공하는 소재들을 재해석한 것으로,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우리의 현실들을 확인해 보려 한다. 특히 날짜가 명시적으로 제시된 일기류를 활용하는 만큼, 음력으로 칼럼이 나가는 시기의 기록을 통해 역사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