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인조반정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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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년 음력 5월 17일, 예안(현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일대)에 사는 김령金坽은 한양 소식을 듣고 한탄에 찬 기록을 남겼다. 예안까지 들려올 정도의 한양 소식이니, 어쩌면 한양은 기록된 내용보다 더 기가 찬 상황이었을 게다. 당시 한양은 ‘훈신’들로 인해 백성들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당시 훈신이라고 표현된 이들은 기록이 있기 4여 년 전인 1623년 4월, 광해군을 폐위하고 능양군綾陽君 이종李倧을 왕위에 올린 인조반정의 주역들이었다. 이들은 서인들로, 김류金瑬, 최명길崔鳴吉, 장유張維, 이귀李貴, 이괄李适, 김자점金自點 등과 같은 인물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광해군이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하고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였다는 사실[폐모살제廢母殺弟]’을 명분으로, 강상을 어긴 죄를 물어 광해군을 폐했다.

그런데 사실 많은 학자들은 광해군의 실제 폐위 원인에 대해 조금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다. 당시 명明나라에 대해 사대주의 노선을 취했던 서인들이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실리 외교를 채택했던 광해군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광해군을 보위했던 북인정권에 대한 불만도 컸을 터였다. 서인들에 의한 반정은 성공했고, 광해군은 18년간 강화도와 제주도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반정으로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 등 집권 핵심 인물들 수십 명은 처형을 당했고, 200여 명이 넘는 관련자들이 유배되었다. 북인세력은 몰락했고 서인, 그중에서도 반정에 공을 세운 훈신들 세상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어느 정권이나 권력의 달콤함은 부패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특히 당금의 왕을 옹립했던 사람들은 자신을 왕과 대등한 권력으로 생각하곤 했다. 견제는 힘으로 부수고, 위세는 최대한 높여 자신처럼 새로운 권력을 창출할 가능성을 꺾어야 했다. 인조반정 4년차가 되면서 이러한 모습은 곳곳에서 감지되었다. 이 가운데 특히 표면적으로 드러난 작태는 조선 건국과 함께 금지되었던 사병의 등장이었다. 많은 훈신들은 각자 사병들을 끼고 다니면서 그들을 ‘군관’이라고 불렀다. 많게는 400~500명 되는 경우도 있었고, 적게도 100~200명씩 되었다. 이들에게 나라의 군인들처럼 급료까지 주었는데, 그 돈은 결국 국고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들은 경계근무 서는 것처럼 순번을 정해 훈신들의 집을 지키고, 이동할 때에는 앞뒤로 호위하면서 훈신의 위세를 드날렸다. 심지어 훈신들이 사사롭게 첩의 집에 갈 때도 앞뒤로 둘러싸서 호위했으니, 낯 뜨거운 줄도 몰랐다. 군복을 입혀 놓으니 온갖 행패와 사고들이 빈번하게 발생했고, 툭하면 남의 재물을 약탈하고 대로에서 싸움질까지 일삼았다. 심지어 아무개 집에 아름다운 여자가 있다고 소문이 나면, ‘훈신의 명령이다’라면서 역적을 잡아가듯 그 여자를 탈취할 정도였다. 국법 위에 훈신들이 있었고, 그들을 이용한 군관들은 행패는 날로 심해져만 갔다.

특히 이들의 행태는 그해(1627년) 1월 발발했던 정묘호란 때 극단적으로 드러났다. 후금 2대 황제 홍타이지는 명나라와의 전쟁에 집중하기 위해 3만여 명의 군사를 동원해 먼저 배후에 있는 조선을 치기로 했다. 조선으로서는 방어가 불가능한 전쟁이었지만, 명을 뒤에 두고 전쟁을 오래 끌 수 없었던 후금의 입장 때문에 이 전쟁은 3월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는 것으로 끝났다. 그런데 이때 훈신들이 보여준 작태는 용서받기 어려웠다.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고 후금에 맞서 싸울 군사를 동원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4천여 명이나 되는 군관들은 훈신들 명에 따라 훈신과 그 가족들, 그리고 그들의 재산을 호위하기에 바빴다. 그나마 전쟁을 할 수 있도록 훈련된 군관들이 전시에도 사병 노릇만 했던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조경趙絅(1586~1669)은 이를 보다 못해 “변란 초기에 주상께서 특별히 명을 내려 (훈신들이 데리고 있는)군관들로 하여금 적을 방어하도록 했지만, 훈신들은 주상의 명을 듣지 않았습니다”라면서, 상소를 올려 이들이야말로 나라를 멸망케 했던 옛 권력자들과 무엇이 다른지 물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역모와 별로 다를 게 없었다. 4천여 명의 군관이면 홍타이지가 몰고 온 3만 병사의 10%가 넘는 병력이었다. 만약 이들이 나라를 위해 전쟁을 수행했다면, 당시 전황이 그렇게 굴욕적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 답답함을 인조도 모를 리 없었겠지만, 그는 조경의 상소에 무응답으로 일관했다.

보다 못한 정경세鄭經世(1563~1633)가 며칠 뒤 다시 상소를 올렸다. 훈신들의 작태가 국왕을 능멸하는 단계까지 왔다는 인식에서였다. 정경세는 젊은 시절 임진왜란을 겪었던 노회한 신하였다. 그는 국가 위기 상황에서 보여준 훈신들의 작태가 어떠한 결론을 낳을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당장 대비를 하지 않으면, 이후의 문제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인조는 노신의 상소에도 답을 하지 않았다. 당시 훈신들이 정경세를 당장접반사唐將接伴使(명나라 군대의 체류에 대한 편의를 제공하는 조선의 담당관)로 삼아 조정에서 떠나게 하려고 인조를 강하게 압박할 정도였다. 인조는 이를 허락하지 않는 선에서 정경세의 말에 일정 정도 동의하고 있음을 보여주었지만, 자신을 옹립한 훈신들을 함부로 처결할 수는 없었다. 반정으로 보위에 오른 인조의 한계였다.

반정은 그 특성상 강한 권력일 수밖에 없다. 무력이 동반되면 더더욱 그렇다. 이처럼 강한 권력은 자기 정당성 확보를 위해 반정의 명분에 집착했고, 그 명분은 강한 폭력 속에서 보위되었다. 그러나 명에 대한 사대의 명분은 전쟁의 칼이 되어 백성들을 찔렀고, 명분을 보위하기 위한 권력의 폭력성은 백성들을 향하는 ‘폭력 그 자체’가 되었다. 인조반정 4년 만이었다. 이들 서인 정권은 정묘호란의 경고에도 끝내 자기 권력 지키기에 집중하다, 10년이 채 안 되어 병자호란이라는 예견된 재앙을 불러왔다. 백성들 편에 서지 않고 명분을 기반으로 자기 권력만 지키려 했던 결과였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다른 듯, 같은 역사>는 달라진 시대를 전제하고, 한꺼풀 그들의 삶 속으로 더 들어가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사람의 삶은 참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네”라는 생각을 기록을 통해 확인하는 시간으로 기획된 것이다. 이 원문은 일기류 기록자료를 가공하여 창작 소재로 제공하는 한국국학진흥원의 ‘스토리 테파마크(http://story.ugyo.net)’에서 제공하는 소재들을 재해석한 것으로,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우리의 현실들을 확인해 보려 한다. 특히 날짜가 명시적으로 제시된 일기류를 활용하는 만큼, 음력으로 칼럼이 나가는 시기의 기록을 통해 역사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