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1751년, 세곡선 난파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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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1년 음력 7월 말,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풍현감 홍응린洪應麟의 머리는 여전히 한여름 뙤약볕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지금과 달리 조선시대 지방관에게 맡겨진 세금 업무는 걷는 것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거둔 세금에 대한 이송까지 책임져야 했으니, 5품이나 6품 정도의 지방관 입장에서는 여간 버거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대동법의 정착으로 지역 공물들을 대동미로 바치니 세곡 이송 문제는 점점 감당하기 힘든 일이 되었다. 현풍현에서도 지역 세곡을 이송하는 배[지토선地土船]를 운영하고는 있었지만, 이게 온전한 대안이 될 수는 없었다. 하필 이 해에 큰 배는 연한이 차 더 이상 바다에 띄울 수 없었고, 나머지 한 척은 규모가 너무 작았다.

결국 배를 임대하는 방법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수소문 끝에 홍응린은 사공 하개똥[河可介叱同]에게 이 일을 맡겨야 했다. 배의 규모나 세곡 운반 경험을 따지면 사람을 구하는 게 용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하개똥은 이러한 상황을 너무나 잘 알았다. 그는 “배 안의 집기를 수리한다”, “바람과 형세가 순조롭지 못하다”라는 핑계를 대며 출발을 차일피일 미루었다. 심지어 날씨가 멀쩡하고 배가 출항한 일이 없었으면서도 “돛과 노, 그리고 고물이 두 차례 풍파를 만나 부서져서 고치고 있다”라는 거짓말을 대 놓고 했다. 현풍 현감 역시 거짓인 줄 알면서도 7번이나 따로 장교와 관리들을 보내 빠른 출항을 부탁할 정도였다. 그러나 늘 돌아오는 답은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개똥이 세곡을 모두 싣고 출발한 것은 근 10달이나 지난 1752년 음력 4월 무렵이었다. 하필 봄과 여름이 바뀌는 시점이어서 바람과 물살이 험했는데, 좋은 날 다 보내고 선택한 날이 그 모양이었다. 이제 배는 출발했으니, 현풍현감 입장에서는 안전한 항해를 기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늘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 법. 배가 출발한 후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현풍현감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음력 5월 4일 최종 목적지인 경창(京倉)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배가 부서져서 침몰했다는 것이다. 난파되는 과정에서 배를 운항하는 격군(格軍) 한 명까지 물에 빠져 죽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다.

침몰한 배에서 빠르게 세곡이라도 건지려 했지만, 막상 남은 세곡도 거의 없었다. 세곡선이 난파된 지역에서 하개똥에 대한 공초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심문을 받던 하개똥은 자신이 싣고 가던 세곡에 대해 “현풍현에서 묵은 곡식을 바쳤다”라면서 건져 내지 못한 게 큰 문제가 아니라는 식으로 답했다. 이 소식을 들은 현풍현감은 가슴을 쳤다. 대동미를 배에 실을 때 하개똥과 현풍현감이 함께 현장을 지켰고, 그 자리에서 하개똥은 현풍현에서 상납할 쌀이 근래 상납한 대동미 가운데 최고라면서 치켜세웠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현풍현감 홍응린은 하개똥에 대한 의심을 숨길 수 없었다. 이 기록이 홍응린의 보고에 따라 경상감사 조재호가 남긴 것이니, 경상감영 차원에서도 홍응린의 의심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의심 내용이 지금관점에서 보면 황당하기는 하다. 바로 세곡선 난파의 전말이 사공 하개똥의 농간일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명까지 잃은 상황이니, 이게 의도적인 난파였겠느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이러한 추정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화폐 경제가 발전하지 않은 조선시대의 경우 화폐 역할을 했던 곡식과 포목이 세금을 내는 중심 수단이었다. 그런데 17세기 대동법의 본격적인 실시로, 지방관 입장에서는 세곡의 이송이 큰 문제가 되었다. 세곡은 그 특성상 육로 이동이 힘들었고, 이는 결국 조운의 부담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지토선 운영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그게 문제가 생기면 선박을 임대하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급한 것은 세곡선을 임대하는 쪽일 수밖에 없었고, 배를 빌려주는 하개똥은 느긋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이었다. 그 지역에서 세금을 납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그가 쥐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곡을 운반을 위해 배를 임차해 주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원래 거래처들이 존재했을 것이다. 게다가 이왕 한 번 배를 띄우면, 가능한 많은 이익을 취해야 할 필요도 있었다. 이 때문에 원래 자신들이 이송하던 물량에다 지역 대동미를 보태어 한꺼번에 이송하려 한 경우가 많았다. 약속된 물건을 모두 실을 때까지 출항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고, 과적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특히 음력 4월 말에서 5월 초가 보리 수확시점이니 이 시기 이동시켜야 하는 물건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뱃길이 위험해도 이 시까지 기다렸던 이유였을 것이다.

이처럼 허술한 구조는 당연히 배를 임차해 주는 사람들의 도덕적 해이를 불러왔다. 배에 실린 물건이 고가이거나 실은 양이 많아 배를 난파시키는 것보다 이익이라고 판단되면, 배를 고의로 난파시켜 그 이익을 취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 대상에서 세곡이라고 예외일 이유도 없었다. 조운의 특성상 풍랑과 바람은 늘 사고를 불러올 수 있고, 그 사고는 언제나 세곡을 빼돌렸을 가능성과 증거를 모두 물에 빠뜨려 버릴 수 있었다. 10개월 가까이 기다려가면서 물량을 충분히 확보했을 하개똥이 품질 좋은 현풍현의 세곡까지 실었으니, 이러한 의심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

연구에 따르면 조선시대 세곡선 난파 사건의 30~40% 가까이가 고의였다고 한다. 최종적으로 지정된 창고에 세금이 들어오지 않으면 그 지방에 책임을 물었던 중앙정부의 무관심과 지방관의 범위를 넘어서는 과도한 책임, 그리고 그 사이에서 이익을 극대화하려 했던 뱃사공들의 욕심이 만든 결과였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이러한 사건에 대한 최종 책임은 결코 그 원인을 만든 주체들이 지지 않았다. 납부하지 못한 대동미를 다시 내야 하는 주체도 현풍현의 백성들이었고, 또 다시 난파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음을 알면서도 이익을 눈먼 뱃사공들에게 자신의 세금을 맡겨야 하는 것도 현풍현의 백성들이이기 때문이다. 이래도 저래도 늘 손해는 백성들의 몫이었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다른 듯, 같은 역사>는 달라진 시대를 전제하고, 한꺼풀 그들의 삶 속으로 더 들어가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사람의 삶은 참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네”라는 생각을 기록을 통해 확인하는 시간으로 기획된 것이다. 이 원문은 일기류 기록자료를 가공하여 창작 소재로 제공하는 한국국학진흥원의 ‘스토리 테파마크(http://story.ugyo.net)’에서 제공하는 소재들을 재해석한 것으로,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우리의 현실들을 확인해 보려 한다. 특히 날짜가 명시적으로 제시된 일기류를 활용하는 만큼, 음력으로 칼럼이 나가는 시기의 기록을 통해 역사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