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1845년 7월, 납량(納凉)과 가짜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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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늦장마 뒤를 따라오는 더위가 보통 매섭지 않다. 과학의 발달로 옛날처럼 맨몸으로 더위와 싸우지는 않지만, 그래도 7월은 납량의 계절이다. 각종 무서운 이야기들은 몸을 오싹하게 만들어 잠시 더위를 잊게 하는 지혜였다. 이 때문에 7월은 온갖 무서운 이야기들이 난무하는 계절이고, 우리 의식 속에서 가장 많은 귀신들이 활동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그러나 납량은 그것이 ‘이야기’일 때만 의미를 갖는다. 물론 ‘사실’처럼 꾸며낸 이야기가 납량의 최고 조건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게 사실‘처럼’의 범주를 넘어서면, 그것은 더 이상 납량이 아니다.

1845년 음력으로 6월 5일, 예천에 살았던 박득녕 선생은 고을 관아에 속해 있던 호귀당 건물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으로 남겼다. 호귀당이 정확히 어떤 용도의 건물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기록으로 보아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근무하는 공간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런데 이 건물에서 귀신이 나타나 또록또록 사람 목소리를 낸다는 해괴한 소문이 예천 고을에 돌기 시작했다. 처음 소문이 퍼질 때만 해도 고을 사람들이 조금 놀랐지만, 여름철 더위를 식히기에 제격인 정도의 수위였다. 여름철이면 으레 돌아다니는 귀신 이야기가 이번에는 고을 관아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여름 밤의 이야기로 끝날 줄 알았던 귀신 소동은 날이 갈수록 증폭되었고, 내용 역시 점점 구체화 되었다. 날마다 많은 사람들이 귀신소리를 들었고, 관청에서 근무하는 노비들 가운데 귀신 때문에 넋을 잃어 거의 죽게 된 사람이 생겼다는 소문도 돌았다. 관청에 근무하는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귀신들은 “기어이 관들을 모두 쫓아내고야 말겠다”라고 말했다는 진술까지 나왔다. 평생 유학 교육을 받은 예천 수령의 입장에서야 전형적인 괴력난신怪力亂神(공자의 언행을 기록한 《논어》에 나오는 말로, ‘공자는 괴이한 힘과 귀신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라는 말에서 유래)이었지만, 퍼지는 소문을 해결할 방도는 없었다.

귀신 소동을 잡기 위해 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빌어도 보고 촛불도 켜 두었지만, 그래도 밤이 되면 귀신 소동은 계속되었다. 귀신을 잡겠다고 큰소리로 호령이라도 하면, 귀신은 더 심하게 날뛰었다고도 했다. 귀신의 존재는 이야기를 넘어 현실이 되었고, 예천 관아는 이야기의 배경을 넘어 실제 귀신의 집이 되었다. 관원들은 버티다 못해 가족들을 데리고 관아에서 뛰쳐나왔고, 사람들은 관아에 접근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밤이 되어 불이 꺼진 관아는 이제 없는 귀신도 찾아올 판이었다. 이렇게까지 되니 수령인들 버틸 재간이 없었다. 급한 대로 다른 건물을 찾아 관아 업무를 봐야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리 흉흉한 소문을 그냥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흉흉한 소문은 늘상 나라님을 향하기 마련이고, 수령 역시 지역 유림들 사이에서 괴력난신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변변찮은 인물이 될 처지였다. 게다가 무슨 원한이 있어서 귀신이 하필 관아에 출몰했는지를 두고, 온갖 소문들이 떠돌기 시작했다. 귀신 집으로 변해 버린 관아를 보면서, 그 의심의 끝이 결국 관아를 향했던 것이다. 귀신의 출몰 원인을 두고 고을 사람들의 의심은 자연스럽게 수령을 마음에 두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예천 수령으로서도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한 달여 끌던 예천 관아 귀신 소동이 어찌되었던 해결되기 시작한 것은 음력 7월 10일부터였다. 관아에서는 조사를 통해 한 달 가까이 귀신 소동을 벌인 주모자를 특정했다. 방술사로 이름이 높았던 여 모라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가 왜 이러한 일을 벌였는지는 설명되지 않았다. 관아에서는 그를 범인으로 확정하고는 바로 그를 큰 독 안에 가둔 후 연못에 던져 버렸다. 여씨가 방술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려 했던 게 이유라면 이유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가혹한 처사였다.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형벌은 군현 지방관의 권한 밖에 있다는 기본 원칙마저 무시되었다. 예안 고을 수령 입장에서는 지역 풍속을 바로 잡는 행위로 치부하면서 스스로를 정당화했을 터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은 이 귀신 소동은 실제 여씨 소행으로 확정되기에 이르렀다. 여씨가 연못에 던져진 후, 동헌에서 귀신 소동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귀신 소동 이후 달라진 것은 여씨 죽음 밖에 없었으니, 여씨야말로 귀신 소동을 벌인 사람이 확실했다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또 다른 원인이나 가능성을 상정할 여유도, 필요도 없었다. 처방의 잘잘못과 상관없이 관아 입장에서 귀신 소동은 해결되었다. 중세 유럽의 마녀사냥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논리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실제 이 사건을 기록했던 박득녕 선생마저 이게 정말 방술사의 소행인지, 아니면 관아에서 소문을 진정시키기 위해 생사람을 잡은 것인지 궁금해 할 정도였다.

176년 전, 또록또록 사람의 말을 하는 귀신의 첫 등장은 한여름 밤 오싹함을 선사하는 작은 즐거움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소문에 구체성이 더해지고 그럴 듯한 이야기 구조가 만들어지면서 호귀당 귀신은 예천 고을 사람들의 의식과 삶 속에 실재實在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생명을 부여받은 귀신은 입에서 입으로 회자되는 만큼 부풀려졌고, 그렇게 커진 귀신의 공포는 애먼 생명의 희생을 강제했다. 납량이 납량을 넘어선 결과였다. 예나지금이나 막걸리 한 잔 앞에서 음모론이나 부풀려진 영웅담만큼 좋은 안주도 없다. 그러나 그게 술안주 범위를 벗어나면, 어느 순간 그것은 증폭된 가짜뉴스가 되어 혹독한 사회적 희생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그나마 입에서 입으로만 증폭되던 조선시대는 차라리 다행일 수 있다. 21세기 우리 사회는 조선시대 모든 입을 다 합친 것보다 강한 매체들이 앞 다투어 그 증폭을 만들어 내기도 하니 말이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다른 듯, 같은 역사>는 달라진 시대를 전제하고, 한꺼풀 그들의 삶 속으로 더 들어가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사람의 삶은 참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네”라는 생각을 기록을 통해 확인하는 시간으로 기획된 것이다. 이 원문은 일기류 기록자료를 가공하여 창작 소재로 제공하는 한국국학진흥원의 ‘스토리 테파마크(http://story.ugyo.net)’에서 제공하는 소재들을 재해석한 것으로,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우리의 현실들을 확인해 보려 한다. 특히 날짜가 명시적으로 제시된 일기류를 활용하는 만큼, 음력으로 칼럼이 나가는 시기의 기록을 통해 역사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