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1752년, 이름뿐인 세금 감면 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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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1년 경상도의 경제 상황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경상도 전역은 봄부터 시작해 음력 5월 12일까지 근 3개월간 가뭄이 이어졌다. 저수지가 있는 몇몇 고을을 제외하면, 아예 모내기를 시작도 못했다. 다행히 5월 중순이 되면서 비가 내렸는데, 그 반가움은 이내 재앙으로 바뀌었다. 한 번 오기 시작한 비는 한 달 이상 그치지 않았고, 이로 인해 곳곳에서 하천이 터지고 논밭은 침수됐다. 미처 수확하지 못한 보리는 서 있는 채로 썩기 시작했고, 일찍 수확한 보리도 말릴 데가 없어 상하기 시작했다. 보리를 수확해야 넘는 보릿고개는 6월이 되어도 넘지 못하는 고개가 되었다.

보리 수확과 모내기도 신통치 않은데, 7월 초 경상도 고을 곳곳에 강풍이 몰아쳤다. 가뭄과 장마 끝에 겨우 살아남은 농작물들은 하염없이 쓰러졌고, 달려있는 열매란 열매는 모두 떨어졌다. 이제 끝인가 싶었지만, 자연의 심술은 녹록치 않았다. 오랜 가뭄과 장마로 인해 먹이가 부족해진 곤충 떼가 7월이 되면서 논밭들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잎만 갉아 먹다가, 나중에는 줄기까지 갉아 먹었고, 그것도 모자라 밭으로 옮겨 콩과 팥까지 먹어 치웠다. 폭우와 바람 끝에 그나마 조금 남아 있었던 농작물들이 한 점도 남아나지 않았다. 빈 들녘에는 백성들의 아우성과 울음만이 남아 있었다.

1751년 5월 부임했던 경상감사 조재호는 음력 9월 6일 어려운 붓을 들었다. 갓 부임한 경상감사로서는 참으로 하기 어려운 보고였지만, 백성들을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세금을 줄여야 했다. 하지만 장계를 비웃기라도 하듯, 얼마 지나지 않아 호조에서는 경상도가 내야 할 세금 양이 통보되었다. 농사가 비교적 괜찮았던 1749년에 준해 경상도의 세금을 정했다는 것이다. 가슴으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화를 삭이지 못하고 있는데, 경상도에는 더욱 황당한 명이 내려졌다. 함경도를 비롯한 북쪽 지역 기근이 최악이므로, 곡식을 보내 구휼하라는 것이었다. 당연히 곡식 마련부터 운송까지 모두 경상도의 몫이었다. 해도 해도 너무하다는 소리가 절로 터져 나왔다.

최악의 농사에도 불구하고 세금은 세금대로 내야 했고, 경상도 백성들의 기근에 대비해야 할 곡식들은 함경도 백성들을 위한 구휼미로 사용해야 했다. 1751년 10월 15일, 경상도 각 사창과 관아에 남아 있는 곡식들을 탈탈 털어, 진주에서 구휼미를 실은 배를 출발시켰다. 왕명도 왕명이었지만, 이후 조정은 마치 빚쟁이처럼 경상감사를 채근했기 때문이다. 기근이 좀 더 심해지면 그때 가서 구휼을 요청하더라도, 당시로써는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 세금 감면과 같은 실효적인 혜택이라도 요청하려면, 일단 조정의 명을 따르기는 따라야 했다.

이듬해인 1752년 음력 2월 18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세금감면을 요청한 경상감사에게 답이 내려왔다. 함경도 백성들을 구휼하는 곡식까지 보냈으니, 경상도 백성들에게도 그에 상응하는 혜택이 필요했다. 묵은 환곡과 포흠을 줄여주겠다고 했다. 흉년이 심한 고을은 묵은 환곡과 포흠에 한 해 1/3만 징수하고, 좀 더 나은 고을은 절반만 징수하라는 지시였다. 조정에서는 아마 이러한 지시를 내리면서 경상도 백성들이 ‘성은에 망극함을 이기지 못하리라’ 생각했을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러나 백성들이 종잣돈까지 배에 실어 보내야 했던 경상감사 입장에서 조정의 이 조처는 실망스럽게 이를 데 없었을 것이다. 환곡이란 기근이 발생했을 때 봄에 백성들에게 빌려주고 가을에 약간의 이자를 부쳐 환수하는 구휼정책이다. 묵은 환곡이 없을 수는 없지만, 군현의 관아에서는 이를 비교적 엄하게 관리하기 때문에 대부분 백성들은 가을에 환곡을 갚았다. ‘묵은 환곡에 한’하게 되면, 지금까지 환곡을 갚지 않고 있었던 일부 백성들만이 수혜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제때 힘들게 환곡을 갚았던 성실한 납세자만 억울해할 일이었다. 게다가 환곡은 대부분 당해연도가 큰 문제이다. 1751년 경상도의 흉년은 이듬해 봄부터 백성들을 사창 앞에서 환곡을 기다리는 신세로 만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묵은 환곡만 줄여주고, 새로운 환곡은 다시 거두어들이면 환곡의 고통은 결코 줄지 않게 된다.

더 기가 찬 것은 포흠이었다. 이것은 애초부터 백성들에게 거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포흠은 관아에서 사사로이 쓴 경비나 관리들의 착오 등으로 인한 결손액, 관아 물건을 부실하게 관리해서 생긴 손실을 충당하는 데 사용하는 비용이다. 여기에는 간혹 관리들의 부정으로 생겨난 손해까지 포함되었다. 포흠을 줄여주면 관아 입장에서야 반가운 일이겠지만, 백성들 입장에서는 결국 백성들을 향한 배려 정책이 관리들의 잘못과 실수나 채우는 것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다. 물론 관아에서 이를 적게 거두는 것만으로도 백성들이 부담을 덜 수는 있겠지만, 이는 궁극적으로 관리들의 부정을 방조하는 결과로 이어질 공산이 컸다.

물론 연이은 흉년으로 백성들이 조세를 제대로 납부할 수 없는 경우 포흠이나 환곡을 줄여 주곤 했다. 비록 언 발에 오줌 누는 격이기는 해도, 그게 어딘가 싶어 반가울 수도 있다. 조정은 이를 이용해 지방에서 요구가 오면, 묵은 환곡과 포흠을 경감해 주면서 큰 인심을 쓰는 척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경상도는 이 같은 의례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막 부임한 경상감사가 세금을 줄여달라고 할 정도였겠는가! 그러나 조정의 조처는 또 그렇게 의례적으로 이루어졌고, 이는 이 상황을 바라보는 경상감사마저 가슴을 쳐야 할 정도였다. 실효성 없고 이름만 존재하는 대책으로, 전형적인 전시행정의 결과물이다.

근래 대한민국 정부는 ‘대책’ 발표가 유난히 많다. 대책의 양만 보면, 이미 서민들의 삶은 웃음이 돌아야 하고, 정책적 배려가 미치지 못하는 곳도 없어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다양한 이유들로 인해 경제 사정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이중의 억울함을 토로하는 사람들만 늘고 있다. 정책적 실효 없이 ‘묵은 환곡이나 포흠을 감면해 주는 것’처럼 이름만 있는 대책들만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하는 이유이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다른 듯, 같은 역사>는 달라진 시대를 전제하고, 한꺼풀 그들의 삶 속으로 더 들어가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사람의 삶은 참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네”라는 생각을 기록을 통해 확인하는 시간으로 기획된 것이다. 이 원문은 일기류 기록자료를 가공하여 창작 소재로 제공하는 한국국학진흥원의 ‘스토리 테파마크(http://story.ugyo.net)’에서 제공하는 소재들을 재해석한 것으로,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우리의 현실들을 확인해 보려 한다. 특히 날짜가 명시적으로 제시된 일기류를 활용하는 만큼, 음력으로 칼럼이 나가는 시기의 기록을 통해 역사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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