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피해자 유족,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마주하다

[빈안학살 50주년 평화 기행] ① 닫을 수 없는 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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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3 19:04 | 최종 업데이트 2016-03-03 19:05

[편집자 주] 1966년 베트남 빈딘성 빈안에서는 1,004명의 주민이 학살당했다. 그 중 고자이에서는 불과 한 시간 만에 380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2016년, 2월 24일 한국인 32명은 빈안마을로 떠났다. 한국군에 의한 학살이 일어난 이곳에서 열리는 위령제에 참가하기 위해서다.?2월 24일부터 3월 1일까지 진행된 ‘빈안학살 50주년 위령제 참배 베트남 평화기행’에 <뉴스민> 김규현 기자가 동행했다. 학살의 마지막 날인 2월 26일 열리는 위령제와 생존자의 증언을 통해 베트남전쟁에 대한 성찰의 기록을 담고자 한다.

“베트남 전쟁과 제주4.3사건은 비슷한 것 같습니다. 경찰의 폭력과 산사람들(남로당)의 폭력으로 돌아가신 친척이 많아요. 저도 그 아픔이 무의식중에 남아있어요. 제주 말로 ‘어디로 감수까’라는 말이 있는데, 4.3사건 이후 생겨난 말입니다. 산으로 가느냐 묻는 말이죠. 그 근원적인 아픔은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제주4.3사건 희생자 유족인 임남용 제주교구 성산포성당 신부가 입을 열었다. 그는 왜 베트남에 발을 디뎠을까.

그에게 1948년 제주에서 벌어진 학살은 희생자 가족이라는 아픔을 주었고, 1966년 베트남은 민간인 학살 가해 국민이라는 기억을 되새기게 했다.

1948년 제주,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남조선노동당의 저항에 이승만 정부와 서북청년단은 “빨갱이 소탕 작전”으로 응수한다. 남조선노동당과 무관한 민간인 피해자만 약 2만 5천명에서 3만 명으로 추정된다.

1966년 베트남, 한국군은 “빨갱이 소탕”을 내세워 크고 작은 마을에서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다. 임 신부는 “인간으로서 못할 짓을 다 하고 간다. 너희는 그런 짓을 하지 말아라”는 큰아버지의 유언을 떠올렸다. 그의 큰아버지는 베트남전쟁에 파병된 청룡부대 소속이었다.

1964년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베트남에서 전쟁을 시작했다. 한국은 전쟁 시작과 함께 비둘기부대를 파병한다. 이듬해부터는 맹호부대, 청룡부대, 백마부대 등 전투부대를 파병했고, 약 35만 명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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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증적박물관에 전시된 파병 부대 지도를 설명하는 구수정 본부장.

‘빨갱이와의 전쟁’으로 기억하길 강요당했던 한국에 민간인 학살이 알려진 것은 1999년 구수정 베트남사회적기업 ‘아맙’본부장의 <한겨레21> 기사를 통해서다.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을 자칭한 한국인에게 가해의 역사는 큰 충격이었다. 철저히 ‘피해자’를 자처했던 한국은 ‘가해자’로서 기억을 모른척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하는 한국이 베트남 민간인 학살의 가해일리 없다고 애써 외면했다. 교과서는 베트남 전쟁으로 경제를 일으켰다고 말했는데, 베트남 민간인을 죽여 번 돈이라니.

세계2차대전 당시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들의 이야기를 준비하던 만화가 고경일 씨도 베트남 평화기행에 참여했다. “일본이 조선인의 피로 먹고산다고 생각했고, 한국 역시 베트남인의 피로 부유해졌다. 예술가들 역시 우리 민족을 피해자로서만 이야기하지 가해의 역사를 이야기하지 않아서”다.

2000년부터 꾸준히 베트남을 방문한 베트남평화의료연대도 마찬가지다. 당시 10년만 의료 지원을 하기로 마음먹었지만, 끝낼 수 없었다. 아직 한국군 학살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해자로서 역사를 외면한 채 피해자로서 사과만을 요구할 수 있을까.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은 “국가폭력 과거사 청산의 첫 번째는 인정하는 것인데, 한국군 민간인 학살 문제는 그것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며 “한 번도 가해의 역사가 없는 한국이 이 문제를 극복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전쟁은 ‘기념’ 아닌 ‘기억’과 ‘기록’
종전 직후 세워진 전쟁증적박물관

베트남 정부는 어느 나라에도 공식적으로 전쟁에 대한 사과나 배상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호치민시에 세워진 전쟁증적박물관(WAR REMNANTS MUSEUM)을 살펴보면 베트남은 언제든 가해국에 사과를 요구할 준비가 돼 있었다. 1975년 개관 당시 이름은 ‘전쟁범죄전시관’이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전쟁 범죄 증거를 모으기 시작했다.

우리에겐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박물관’이 익숙하지만, 베트남은 전쟁을 '기념'하는 것이 아닌 '기억'하고 '기록'하고 있다. 또, 베트남에서는 전쟁을 “미국의 베트남 전쟁”이라고 부른다. 박물관을 들어서면 미국의 독립선언서 전문이 있다. 특별한 설명도 없다. 누가 전쟁을 일으켰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다.

"인간은 날 때부터 평등할 천부적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다. 인간의 행복추구권, 자유권은 어떤 이유에서는 침해당해서는 안 된다." (1776년, 미국 독립선언서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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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립선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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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증적박물관

구수정 아맙 본부장에 따르면, 한국군은 베트남 전쟁에서 여러 가지 기록을 가지고 있다. 최초로 베트남에 파병했고, 가장 많은 전투병을 보냈고, 가장 오래 주둔했다. 때문에 참전군의 피해도 최대였고, 민간인 학살 역시 가장 많이 저질렀다.

한국군이 베트남 빈딘성에서 저지른 ‘빈안학살’은 베트남전 최대의 민간인 학살로 꼽힌다. 빈딘성 빈안마을 15곳에서 학살이 일어났는데, 고자이에서만 380명이 학살됐다. 빈딘성 박물관 안내를 맡은 응우옌 티 년(Nguyen Thi Nhan) 씨는 “남조선 군대가 빈딘성에 발을 디디면 학살은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설명을 듣는 동안 한국인들은 두 손을 모으기 시작했고, 고개도 숙였다. 몇몇은 그 생생한 설명이 불편해 밖으로 나가기도 했다.

빈딘성 박물관은 베트남 전쟁 당시 맹호부대의 문화센터 건물이었다. 1975년 전쟁이 끝난 직후, 해방군은 건물을 점유해 민간인 학살 증거물 수집을 시작했다. ‘빈안학살유적사집’에는 학살 지점을 모두 사진으로 찍어 보관했다. 당시 한국군이 총을 쐈던 들판, 방공호가 있던 집, 시장, 밭, 마당 등이었다. 희생자의 시신과 유품 또한 사진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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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딘성 박물관, 맹호부대 문화센터 현판

베트남 정부는 “과거를 닫고, 미래로 가자”는 기조를 갖고 있다. 과거를 잊고 살자는 의미가 아니다.

자원입대해 종군화가로 전쟁을 겪은 판 오안(Phan Oanh) 씨는 “사람들 마음속에는 닫을 수 있는 과거가 있고, 닫을 수 없는 과거가 있다”며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병사를 보내 가장 적극적으로 참전했다. 언젠가 과거를 닫는 날이 와야 할 텐데, 어떻게 과거를 닫을 것인가는 모두의 기대일 것”이라고 말했다.

‘때린 놈은 기억 못하지만, 맞은 놈은 끝까지 기억한다’는 말이 있다. 한국은 때린 놈이기도 하고 맞은 놈이기도 하다. 하지만 때린 기억이나 맞은 기억이나 감추기 일쑤다. 베트남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도 인정하지 않았지만, 일본군 ‘위안부’ 문제 졸속 합의를 이루고 ‘위안부’문제 기록 작업을 중단했다.

하지만 한국을 방문해 사과하고 성찰하는 일본인이 있듯, 베트남을 찾은 평화기행단은 성찰을 위한 중요한 발걸음을 몇 해째 이어오고 있다. 베트남의 ‘닫을 수 없는 과거’는 훗날 어떻게 닫힐까. 학살지에서 만난 베트남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사죄의 인사를 건네는 것, 우리는 제대로 과거를 기억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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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 오안(Phan Oanh)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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