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년 만에’ 대구 가창골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

1950년 한국전쟁 전후 무차별 집단 학살 확인된 곳
달성군 가창면 용계리 산 89-6번지(150㎡) 30구 매장 추정
유해 발굴되면 감식 절차 거쳐 희생자 추모의 집 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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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전쟁 전후 대구에서 일어난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이 시작됐다. 발굴지는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용계리 일대로 1950년 7월 대구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재소자와 보도연맹원, 예비검속자 집단 학살이 확인된 곳이다.

▲24일 오후 2시 2기 진실화해위원회와 10월항쟁유족회는 10월항쟁·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 위령탑에서 ‘대구·경북형무소재소자 희생 사건’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가창골 유해 발굴 개토제를 진행했다.

24일 오후 2시 2기 진실화해위원회와 10월항쟁유족회는 10월항쟁·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 위령탑에서 ‘대구·경북형무소재소자 희생 사건’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가창골 유해 발굴 개토제를 진행했다. 이날 개토제에는 10월항쟁·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 유족들과 진실화해위원회,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경상·강원지부 관계자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발굴이 이뤄지는 대구 달성군 가창면 용계리 산 89-6번지(150㎡) 매장 추정 유해는 모두 30여 구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약 6,000만 원을 들여 6월 중 유해발굴을 완료할 계획이다.

▲24일 10월항쟁·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 위령탑에서 열린 ‘대구·경북형무소재소자 희생 사건’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가창골 유해 발굴 개토제에 참석한 채영희 10월항쟁유족회장이 눈물을 닦고 있다.

채영희 10월항쟁유족회장은 “1950년 같이 죽은 우리 아버지들을 빨갱이라는 프레임에 시신 수습할 생각도 못하고 살았다. 진실화해위원회, 대구시청, 발굴단 모두에게 감사드린다”며 “우리들의 한을 풀기 위한 일만이 아니다. 아버지들의 뜻을 이어받고 역사에 진실을 밝히고 교과서에 남겨 후손들에게 정확하고 진실된 역사를 밝히고자 함”이라고 말했다.

이하석 10월항쟁유족회 이사는 발굴 시작에 앞서 “살아남기 위해 원한을 숨겨왔던 유족들의 아픔을 쓰다듬어야 한다. 억울하게 처형되고 몰래 파묻혀버린 님들이시여 이제 세상으로 나오십시오. 유족들이 애타게 찾는 건 님들의 뼈와 자취뿐만 아니라 그 진상을 밝히고 제대로 명예회복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축문을 전했다.

▲24일 오후 2시 2기 진실화해위원회와 10월항쟁유족회는 10월항쟁·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 위령탑에서 ‘대구·경북형무소재소자 희생 사건’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가창골 유해 발굴 개토제를 진행했다.

임나혁 진실화해위원회 법무·화해팀 전문위원은 “진실 규명된 결과에 따르면, 이곳 대구 달성군 가창면 용계리 일대는 1950년 7월 초와 말경에 최소 두 차례 이상 73년 전 적법한 절차 없이 재소자들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비극적인 사건의 현장이자 화해와 미래를 위한 토대가 되어야 할 장소”라며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것은 물론, 역사에 바로 기록하고 추념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진행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1기 진실화해위원회가 발표한 ‘대구경북지역 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2010)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대구형무소에 수감중이던 재소자와 보도연맹원, 예비검속자를 1950년 7월 초와 중순 사이 경산 코발트, 가창골짜기, 칠곡 신동재, 본리동 빨래터 등지에서 집단 살해됐다.

대구형무소에 상주하던 대구경북지구 CIC(방첩대)와 3사단 22연대 소속 헌병대, 대구지역 경찰 등이 적법한 절차 없이 두 차례에 걸쳐 최소 1,400명 이상의 재소자와 보도연맹원 및 예비검속자를 살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해 발굴이 이뤄지는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용계리 89-6번지(150㎡)

대구형무소 재소자들은 1950년 7월 7일부터 9일까지 헌병대와 CIC(방첩대)에 의해 끌려왔다. 10월항쟁을 포함해 좌익활동으로 수감된 이들이 주된 대상이었다. 사형수와 무기수 등은 2심 재판을 앞두고 재판도 받지 못하고 끌려 나가 살해됐다.

7월 27일부터 31일까지는 김천과 안동 지역에 대한 인민군 공격이 시작되면서 대구형무소 재소자 중 좌익사범 1,196명이 학살됐다. 이들은 진주로 이감한다는 이유로 끌려나가 군 헌병대에 인계됐고, 죽임을 당했다.

애초 1950년 희생자 학살 후 매장 장소는 지금의 가창댐이 있는 곳이다. 진실화해위원회는 1959년 가창댐 준공 전 인부들에 의해 유해가 많이 발굴됐고, 인부들이 가마니에 유해를 담아 공사 현장 인근인 발굴지에 이장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발굴을 맡은 우종윤 (재)한국선사문화연구원 원장은 “59년도에 댐 건설 과정에서 옮겨졌다면 적어도 59년 이전일 것이다. 희생되고 나서 불과 6~7년이라면 의복 같은 경우는 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흔적만 찾는다 하더라도 유해가 여기에 묻혀 있다는 것은 간접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조사단의 조사 여건은 상당히 안 좋지만 사람이 일일이 손수작업을 해서 유해를 찾는 작업을 열심히 해서 하나의 유품이라도 뼈 한 조각이라도 찾을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본격적인 유해 발굴은 25일부터 시작해 6월까지 진행할 예정이다. 유해 발굴이 이뤄지면 나이, 성별 등을 파악하는 감식 절차를 거쳐 유해는 세종시에 마련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추모의 집에 안치할 예정이다.

한편, 2기 진실화해위원회는 이번 유해발굴과 연계된 대구형무소 사건과 관련해 추가로 신청된 진실규명 사건 60건 중 48건에 대해 조사 개시해 현재 조사 중이다.

천용길 기자
droadb@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