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년만에 이뤄진 아버지의 명예회복···김영호 씨에게 남은 숙제는

10월 항쟁 유족회, 김영호 씨
"찾고 싶은 사람들, 아버지의 유해, 그리고... "
10월에 떠올리는 아버지, 그리고 나의 지난 삶, 남은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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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가 김영호 씨의 아버지 김수경 씨. 아버지의 친구들도 민간인 집단 학살의 희생자라고 들었다고 했다.

가운데 팔장을 낀 사람이 김영호(73) 씨의 아버지, 김수경(1920년생) 씨의 젊은 시절 모습이다. 김수경 씨도, 그의 친구들도 사진 속 청년으로 멈춰있다. 사진 속 모습처럼 밝은 모습으로 친구들끼리 함께 나이가 들고, 과거를 돌아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버지도, 그의 친구도 모두 1950년 역사의 비극을 피하지 못했다.

아버지 친구들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로 알고 있어요. 아버지 친구분들 자식들을 죽기 전에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어요. 어떻게 살고들 있을까요? 저처럼 힘든 세월 어떻게 지내왔을까요? 지난 이야기들을 나눠보고 싶어요.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여전히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저처럼 뒤늦게 알고 진실규명을 받았는지 궁금합니다.

김영호 씨는 “집안 어른들께 들으니 아버지가 활달한 성격으로 주변에 친구들도 주변에 많았다고 한다. 아버지와 아버지 친구들도 전부 그렇게 되고, 남은 그 부인들끼리 모여서 신세 한탄도 하고 그랬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1949년 5월 생인 김영호 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당시 돌쟁이에 불과했고, 형제자매도 없다. 10년 전쯤에서야 집안 어른을 통해 아버지가 10월 항쟁 이후 민간인 희생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수 십 년간 집안 어른 누구도 아버지의 사정을 제대로 말해주지 않았다. 김 씨는 “나도 부모님 돌아가시고 고생을 했는데,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싶다”고 말했다.

2023년 7월에야 진실규명 받은 아버지
‘돌쟁이’ 나를 두고 생을 달리한 그 심정 어땠을까

지난 7월 김 씨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로부터 아버지 김수경 씨가 대구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 사건에 의해 희생됐다는 진실규명을 받았다. 서류를 받고 아버지 묘소를 찾았다. 달성군 가창면 용계리에 위치한 10월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도 찾았다. 심정을 묻자, 김 씨는 한참을 허공을 응시하며 할 말을 찾았다. 그러다 결국 주머니 속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 ’10월항쟁유족’인 김영호 씨는 아버지 김수경 씨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고 했다.

… 김정섭 씨도(10월항쟁 유족회원)도 진실규명 결과가 나와서 아버지 묘소를 찾았다는 이야기를 듣곤 다 같은 마음이구나 했어요. 참, 뭐라 해야 하나… 이제 자식 도리를 했다고 생각했죠. 아버지 명예회복을 70년 만에 이뤄드렸구나 했죠.

1950년 7월 가창면 가창골에서 집단 희생됐을 때 아버지는 겨우 30살이었다. 김영호 씨는 아버지 삶의 곱절 이상을 살았다. 그는 “갑자기 끌려가 그렇게 된 아버지 심정이 어땠을까 싶어서, 아버지 이야기를 하면 이렇게 자꾸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김 씨는 “제 외갓집이 충북에 있었는데 거기로 피해있다가 밤중에 집으로 돌아와서 저를 만나고, 그 길로 경찰에 잡혀갔다고 들었다”며 “처자식이 마지막까지도 눈에 많이 밟히지 않았을까 싶다. 제가 자식을 낳고 길러보니 아버지 심정이 더 그랬을 것 같다. 그때 심경은 말로 못할 정도로 복잡하고 무섭지 않았을까”고 울먹였다.

그때 어머니는 23살이었다. 어머니는 일본군 위안부를 피하려 17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아버지와 결혼했다. 아버지를 좋게 본 어머니 쪽 친척이 중매를 섰다고 들었다.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는 속앓이를 하다 김 씨가 11살이던 해에 화병으로 사망했다. 김 씨는 그때 이후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 없었다. 대신 할머니의 외가 친척집이 있는 경남 밀양으로 갔고, ‘부모 없는 설움’도 느꼈다.

김 씨는 “눈칫밥도 좀 먹었지, 거기도 자식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까”라며 “15살부터는 장터 철물점에서 일을 시작했다. 철물점 주인 아주머니는 자기 자식들이랑 차별 않고 먹을 것도 잘 챙겨줬다. 참 감사했다”고 회상했다.

저는 그때 공부를 많이 못한 게 한이 돼서 우리 아이들이 넷인데, ‘너희 하고 싶은 만큼 원 없이 공부하라’하고 그렇게 시켰어요. 저는 못 배웠어도 남들한테 나쁜 소리 안 듣고 잘 살려고 노력했어요. 어디 가서 ‘부모 없는 자식이라 그렇다’는 말을 안 들을려고 열심히 살았어요. 혹시 저승에서 아버지, 어머니를 보게 되면 잘 살았다, 고생했다 하지 않을까요.

쉬쉬 하던 집안 어른들…아버지 사연 10년 전 쯤에야 알아
10월항쟁 유족회 사무실 자료에서 만난 ‘보안법, 김수경’

어려서부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집안에서 금기였다. 김 씨는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왜 안 계시는지 물어보면 안 되는 집안 분위기가 있었다. 어른들이 모두 쉬쉬 했다”며 “커서도 마음 한 구석에 응어리처럼 남았고, 언젠가 아버지를 찾아보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홀로 아버지를 쫓았다.

어린 시절 기억을 되살려 아버지를 수소문 했다. 2013년, 6.25전쟁 납북진상규명위원회에도 문의를 했고, 그러다 우연히 달성군 가창면 가창골에 작은 제삿상을 차리고 제를 올리는 이들이 있다는 소식도 접했다. 인근에 살던 친척 어른에게 그런 모습을 보면 연락을 달라고 부탁했다.

연락을 받고 찾아간 자리에서 위령제를 지내던 10월항쟁 유족들을 봤고, 조용히 위령제를 지켜보다 안내문을 챙겼다. 안내문에 적힌 전화번호로 연락을 한 후 처음 채영희 (사)10월항쟁 유족회 이사장을 만났다.

유족회가 갖고 있는 자료에서 아버지 이름을 찾았다. 1960년 당시 신문 자료였고, 깨알 같은 글씨로 죄명과 이름이 적혀 있었다. 죄명은 보안법 위반, 그 아래 사망 날짜인 7월 30일과 김수경이라는 이름이 확인됐다.

▲ 아버지를 찾던 김영호 씨가 2013년 (사)10월항쟁 유족회 사무실에서 접한 자료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발견했다. 색깔로 표시된 부분에 죄명과 날짜, 이름이 각각 적혀 있었다. ‘보안법, 7월 30일, 김수경’이라고 쓰여 있다.

그때는 긴가 민가 하고, 답답했다. 보안법이라니, 우리 아버지가 무슨 나쁜 짓을 했나 싶어서 황당하기도 하고.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때는 그냥 갖다 붙이는 게 다 보안법이라더라. 자기들 말을 안 들으면 그냥 그렇게 죄명을 갖다 붙여서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

그제서야 집안 어른들께 아버지의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7월 초에 경찰에 잡혀간 아버지가 7월 30일 가창골에서 총살을 당했다는 것부터, 10월항쟁에 나서고 풀려난 이야기 등 아버지를 제대로 기억할 수 있게 됐다. 앓던 응어리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지금도 사망 신고 안 된 아버지
죽기 전에 풀고 싶은 숙제들

지금까지 아버지는 서류상 사망신고는 되지 않은 상태다. 희생자로서 진실규명을 받기 3~4년 전에 사망신고를 하려다 황당한 일을 겪기도 했다. 김 씨 사연을 들은 구청 직원이 법원에 확인이 필요하다며 전화를 했는데, 수화기 너머로 “이 사람은 빨갱이라 안 된다”는 소리가 들렸다.

발길을 돌려 나온 그는 지난 7월 진실규명을 받은 후에는 굳이 사망신고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됐다. 김 씨는 “그땐 참 화도 나고 그랬지. 사망신고를 위해서 서류랑 보증인원을 열심히 챙겼는데 그때 서류를 아직도 갖고 있다. 아직도 그런 이야길 아무렇지 않게 하고, 그게 법원 직원이라서 더 씁쓸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제대로 명예회복 받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여기 동네에서도 친구들끼리 모이면 그런 이야길 내 앞에서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면 내가 막 뭐라하기도 한 적이 여러 번이었어요. 이젠 명예회복도 받았으니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요.

마지막으로 더 바람이 있다면 아직 찾지 못한 아버지 유해를 찾고, 10월항쟁이 다음 세대에도 잊혀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는 “가창면 상원리 야산 일대에 아버지의 유해가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 또한 쉽지 않다고 한다.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이라며 “채영희 이사장님이 요즘 걱정하는 일이 우리 유가족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는데, 우리가 하는 일을 다음엔 누가 하냐는 거다. 10월 정신을 기억하고 다음 세대에 계속 전해질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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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미 기자
jem@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