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했던 한국인’이 ‘친구들’이 되기까지

[빈안학살 50주년 평화기행 ④] 평화, 베트남에서 출발해 한반도로

18:05
[편집자 주] 1966년 베트남 빈딘성 빈안에서는 1,004명의 주민이 학살당했다. 그 중 고자이에서는 불과 한 시간 만에 380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2016년, 2월 24일 한국인 32명은 빈안마을로 떠났다. 한국군에 의한 학살이 일어난 이곳에서 열리는 위령제에 참가하기 위해서다.?2월 24일부터 3월 1일까지 진행된 ‘빈안학살 50주년 위령제 참배 베트남 평화기행’에 <뉴스민> 김규현 기자가 동행했다. 학살의 마지막 날인 2월 26일 열리는 위령제와 생존자의 증언을 통해 베트남전쟁에 대한 성찰의 기록을 담고자 한다.

[빈안학살 50주년 평화 기행]①닫을 수 없는 과거:제주4·3 피해자 유족,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마주하다

[빈안학살 50주년 평화 기행]②성찰의 시작은 사과다:빈안학살 50년, 사과하는 한국인에 박수 보낸 베트남

[빈안학살 50주년 평화 기행]③”카이,카이,카이(말좀 하게 해주세요)”:쯔엉탄학살 위령관은 한국인을 기다렸다

[빈안학살 50주년 평화 기행]④평화, 베트남에서 출발해 한반도로:?’끔찍했던 한국인’이 ‘친구들’이 되기까지

‘닫을 수 없는 과거’의 아픔이 사라질 순 없더라도 옅어질 수는 있다. 지난해 한국을 다녀간 응우옌 티 탄(Nguyen Thi Thanh) 씨의 밝은 표정이 그 방법을 알려줬다.

_DSC8716
▲응우옌 티 탄(Nguyen Thi Thanh)

응우옌 티 탄(Nguyen Thi Thanh) 씨는 퐁니퐁넛 학살 생존자다. 1968년 꽝남성 디엔반현 디엔안사 퐁니퐁넛 마을 1번 국도 건너편에는 청룡부대가 주둔했다. 국도 위쪽으로는 미군 초소가 있었다. 미군 초소와 가까웠던 퐁니퐁넛 마을에는 남베트남군 가족들이 주로 살고 있었다.

1번 국도는 지금도 베트남 남과 북을 잇는 유일한 도로다. 1968년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구정대공세 직후인 2월 12일, 국도에서 의문의 폭탄이 터졌다. 청룡부대는 곧장 마을에 ‘베트콩’이 있음을 의심하고, 학살을 시작했다.

당시 탄 씨는 8살이었다. 포격 소리에 방공호로 들어가 숨었는데 한국군이 방공호 입구로 수류탄을 보여 주며 나오라고 손짓했다고 한다. 탄 씨는 총에 맞아 창자가 배 밖으로 나온 채로 장에 간 엄마를 찾아다녔다.

_DSC8750

이 학살로 모두 74명의 주민이 희생됐다. 구수정 본부장이 평화기행단을 이끌고 처음 탄 씨를 만났을 때, 탄 씨가 한국 남자들을 무서워해 남자 기행단원들은 모두 밖으로 내보냈다고 한다. 지금도 학살 당시를 설명하면 눈물을 보이지만, 28일 오후 기행단을 맞이한 탄 씨는 너무나 밝은 모습이었다.

지난해 탄 씨는 런 씨와 함께 한국군 민간인 학살에 대해 증언하기 위해 한국에 방문했다. 한국에 가기를 결정하기 전까지 오빠의 반대가 심했다. 한국군 때문에 가족을 다 잃은 게 기억나지 않느냐고. 그러나 탄 씨에게는 한국에 다녀온 경험이 오히려 아픈 마음을 치유했다.

“정말 잘 다녀왔어요. 그 전보다 덜 아파요. 예전에 비하면 한결 덜 아프고 덜 힘들어요. 정말 잘한 결정이었습니다. 참전군인들을 만났을 때 정말 무서웠지만, 많은 한국 친구들이 나를 지켜줬어요.”

학살 사실을 인정할 수 없는 참전군인들은 군복을 입고 나와 행사를 저지했다. 그 자체로 끔찍했지만, 탄 씨는 한국인들의 도움으로 행사를 잘 치를 수 있었다. 모든 한국인이 학살을 저지르는 괴물이 아니라는 것을 한국인이 보여준 것이다.

탄 씨는 “그때 참전군이 3명이 학살을 인정하고 미안하다고 했다”며 “내가 복수를 하겠어, 욕을 하겠어, 원망을 하겠어. 그냥 그 말 한마디면 되는데. 아직도 참 많은 참전군인이 인정하지 않고 있어서 많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_DSC8731
▲(왼쪽부터) 응우옌 티 탄(Nguyen Thi Thanh) 씨와 구수정 아맙 본부장

그 말 한마디면 되는 거였다. 기행 일정 마지막에 만난 탄 씨의 밝은 모습은 무거웠던 기행단의 마음을 풀어주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외면하는 방법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주4.3사건 진상을 규명했던 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공식적인 사과를 끊임없이 요구하는 일, 한국군 베트남 민간인 학살 사건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일은 모두 같은 이유다.?평화를 지키는 것.

17년째 평화기행을 꾸려 한국인에게 이 소식을 알리는 구수정 아맙 본부장 역시 같은 이유에서다. 그와의 인터뷰를 통해 자세히 들어보자.

  • 평화기행을 꾸준히 하는 이유가 있다면?

17년 동안 평화기행을 다녔으니 이제는 사람들이 다 아는 얘기겠지하며, 언론을 통해 매번 듣는 얘기를 내가 또 하는건 아닐까하며 항상 걱정한다. 그런데 매번 사람들의 반응이 마친 처음 듣는 얘기처럼 충격을 받는다. 그렇게 직접 와서 참배하고, 피해자들을 만나는 경험은 강렬하다. 평화기행을 다녀갔던 사람들이 진료단을 꾸리고, 컴퓨터 교실을 열고, 피해자 지원 사업도 하고 있다. 그분들이 멈추지 않고 지속적인 관심과 활동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 한국베트남평화재단을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다.

99년부터 지금까지 한 줌 안되는 사람들이 포기하지 않고 왔고, 지금은 많은 시민들의 정서적 반응이 변했다고 느낀다. 그래서 보다 더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어내는 문제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 속에서 재단을 준비하고 있다.

  • 구체적으로 어떤 취지인가?

우리가 당한 피해의 역사는 전국민적 공감을 얻어내기 쉽고, 대중적으로 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저지른 가해의 역사는 국민 대다수가 끌어안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역사 문제는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처럼 ?50년이 가고 100년이 가고 그 이상을 갈 수도 있다. 이 문제를 앞으로 해결하고, 평화로운 미래를 만들어나가는 작업을 할 미래세대를 위한 플랫폼 역할을 재단이 할 것이다.

  • 50년, 100년을 들여서라도 가해자로서 역사를 바로 보아야 한다는 뜻 인 것 같다. 그 작업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늘 피해자로서의 역사를 바라봤다. 우리가 평화에 대한 경계를 늦추는 순간 언제든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게 베트남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가해자로서 이 문제를 제기하면 단순히 베트남을 지원하거나 도와주는 거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 내면의 폭력성을 걷어내는 계기가 되는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내부에서도 수많은 전쟁과 셀 수 없는 국가폭력에 의한 학살이 있었다. 제주4.3사건, 경산코발트학살사건, 보도연맹학살사건 등. 우리가 그것을 한 번도 극복해보지 못한 거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건 결국 내부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다. 베트남에서 멈추는 게 아니라 베트남에서 출발해서 한반도의 평화, 한반도에 내재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