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운동가들] 청년, 여성, 노동을 횡단하는 김수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페미니즘 학습 관심
2019년 청년NGO활동가 지원 사업으로 여성노동자회 활동 본격화
올해부터 사무국장, 걱정되지만 부딪혀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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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한때는 세상을 바꿔보겠다며 사회운동에 나선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운동가라고 지칭하는 사람은 줄어듭니다. 사회운동을 하는 운동가들은 오늘도 사람을 만나고, 제도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려고 애를 씁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운동권 특권 세력 청산은 시대정신”이라며 자신과 대립하는 정치인과 싸우기 위해 운동가들을 몽땅 폄훼하기도 합니다. 운동권이라는 어원은 독재정권 시기 민주화운동에 나선 학생운동가를 고립시키기 위해 만든 용어였습니다. 그들 중 대다수는 기득권으로 살아가지 않았고, 또 일부는 1987년 민주항쟁 이후 오늘날까지 사회운동을 이어가는 운동가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2020년대 사회운동을 시작한 운동가들도 있습니다. 2024년, <뉴스민>은 매달 1980년대 사회운동을 시작한 운동가, 1980년대 이후 태어난 운동가들의 삶과 더 나은 공동체를 바라는 운동가의 고민을 듣기로 했습니다.

활동가와의 인터뷰 전 질문지를 짤 때 두 가지를 중점적으로 담는다. 활동가를 직업으로 선택한 배경, 그리고 활동가로 성장한 과정이다. 김수현 대구여성노동자회 사무국장에겐 ‘우연’이 여럿 작동했다. 우연히 단체와 연을 맺고 인턴 활동을 시작했으며, 마침 단체는 인력 충원을 고민했다. 운이 좋게도 서울로 파견근무를 다녀왔고, 어쩌다 보니 단체의 위기를 함께 겪어내고 있다.

지난해 고용노동부는 직장 내 성차별·성폭력 피해 상담·지원 기구인 고용평등상담실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 고용평등상담실은 남녀고용평등법에 의거해 2004년부터 정부가 매년 민간단체를 공모해 예산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운영해왔다. 여성단체들은 기자회견을 열고 반발했으나 막지 못했다. 한국여성노동자회를 비롯한 지역의 여성노동자회들도 이중 하나였다.

단체에 직접적 위기로 다가온 이 일은 수현에게 답이 보이지 않는 문제이면서, 지난 활동을 기록하고 새로운 길을 찾을 기회가 됐다. 단지 운이 좋아서 하게 됐다고 생각한 일들이 사실은 선배 활동가들의 배려인 것도, 켜켜이 쌓여 온 대구 여성운동의 역사 덕분인 것도 이제 조금은 알겠다. 수현은 “올해 사무국장을 맡은 만큼 단체를 대표해 이야기하는 순간도 생길텐데 잘 대응하고 싶다. 도망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활동을 경험하다

▲인터뷰는 2월 13일 오전 대구여성노동자회에서 진행됐으며, 3월 15일 추가로 서면인터뷰를 했다.

Q. 언제부터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졌나요?

대학 입학 직후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사회가 뜨거웠어요. 메갈리아, 여성혐오 같은 단어가 무분별하게 떠돌던 시기였죠. 사건 이후 벌어진 논쟁을 따라가기 위해 공부를 했는데, 하면 할수록 내 삶 전반에 대해 고민하게 됐어요.

당시 아이돌 판에서도 페미니즘 이슈가 많았어요. 제가 덕질하던 아이돌은 예능 프로그램에서 순댓국을 좋아하는 여자, 파스타를 좋아하는 여자 중 이상형을 고르라는 질문을 받았거든요. 당시 멤버들이 ‘순댓국을 좋아하는 여자가 털털하니까 더 좋다’는 취지의 답을 했는데 일부 팬들이 질문에 문제가 있다고 비판했죠. 문제를 제기한 팬들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사이버불링(온라인 괴롭힘)을 당했어요. 처음엔 ‘뭐가 문제지?’했던 저도 점차 고정관념을 깨야 한다는, 그들의 논리를 이해하게 됐죠.

Q.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러 페미니즘 의제가 가시화됐던 게 생각나요. 그럼에도 수현이 여성단체 활동가로 진로를 정하기까지 중간 단계가 있었을 것 같아요.

맞아요. 대학에서는 관광을 전공했어요. 학과 공부보단 대학 밖 활동에 관심이 많았죠. 청소년 때 별명도 ‘씹선비’(도덕적으로 옳은 소리를 한다는 부정적 의미의 인터넷 신조어)였는데, 사회 이슈나 인권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 별명이 붙었던 것 같아요. 부조리한 어른들의 모습, 납득되지 않는 뉴스를 보며 ‘좋은 어른이 되는 것’에 대해 일찍부터 고민했어요.

2017년 우연히 대구 여성단체들이 함께 개최한 페미니즘 릴레이 강의를 들었는데, ‘페미니즘’을 핵심 키워드로 두고 뻗어나간 여러 갈래를 공부했죠. 페미니즘의 역사, 젠더폭력과 젠더감수성, 성매매 실태와 제도, 빈곤의 여성화, 직장내 성희롱 등 여러 강의를 들었어요.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게 대구여성노동자회에서 진행한 ‘젠더와 노동’이에요. 지금와선 내용도 내용이지만, 강의가 끝날 때쯤 풍기던 치킨 냄새가 강렬했다고 기억해요. 자연스럽게 뒤풀이 자리에 앉고 보니 20대는 저, 그리고 함께 간 제 친구 뿐이더라고요.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질문 폭격이 쏟아졌고 자연스럽게 회원 활동을 시작했어요.

Q. 단체와 인연이 그때 시작됐군요.

그렇게 시작해서 2018년에는 당시 인턴 활동가가 만든 여성노동 소모임 ‘페미하는 노동니즘’에 합류했죠.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고 자기 이야기를 하는 모임으로 시작했어요. 페미니즘과 노동의 교차성을 고민하는 모든 활동을 할 수 있는 모임이었죠.

대학 생활에선 크게 배운 게 없다고 기억하지만 여성노동자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사고의 폭이 넓어졌어요. 활동가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구체화한 경험이기도 해요. 페미니즘에 관심 많은 대학생이 노동, 그중에서도 여성 노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됐고요.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 것처럼 노동 이슈를 공부하면서 또 다른 눈이 떠졌어요.

본격적으로 대구여성노동자회에서 일을 시작한 건 2019년이에요. 당시 대구시에서 운영한 청년NGO활동가 지원사업에 붙으면서 시작했죠. 앞서 같은 사업으로 일한 인턴 활동가 뒤를 이어서 소모임을 운영하고 단체 운영 전반을 보조했어요. 8개월의 경험 뒤에는 학교에 돌아갔고, 졸업할 때쯤 단체로부터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는 연락이 왔죠. 마침 활동가로서의 진로를 고민하고 있었기에 2021년 3월부터 정식 활동가로 근무했어요.

#활동가로 취업하다

Q. 대구여성노동자회 활동가는 몇 명인가요?

현재 상근자는 저를 포함해 3명입니다. 대부분 시민단체가 그렇듯 각자의 업무가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진 않아요. 대부분 함께 진행하고, 저는 주로 청년과 여성노동자를 연결하는 기획을 담당해요. 청년소통팀장을 맡았다가 지난달 총회를 거쳐 사무국장이 됐죠.

두 선배 활동가는 경력이 10년 이상이에요. 우리 단체는 서로를 닉네임으로 부르거든요. 처음엔 말을 놓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애써 이름을 부르지 않고 용건을 말하던 시기도 있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자연스러워져서 이젠 자연스러워요. 저는 ‘토리’입니다. 도토리를 닮았다고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에서 따왔어요. 위계가 없다곤 못 해도 확실히 덜해요.

Q. 경력으론 막내 활동가인데, 사무국장을 맡았네요.

구성원들이 제 성장에 도움이 될 거라고 판단했어요. 원래 사무국장을 맡았던 활동가가 회장 대행직을 맡게 되면서 제가 승진을 하게 됐죠. 솔직한 심정으론 부담스럽고 걱정이 되지만, 일단 도망치지 않고 부딪혀 보려고요.

그래도 대구경북여성단체연합(대경여연) 모임에 가면 또래 활동가가 많아서 든든해요. 제가 처음 활동가 일을 시작한 2019년에는 제 나이대가 거의 없었거든요. 지난해 열린 대경여연 수련회에선 청년활동가들끼리 모여서 재밌는 기획을 만들어보자는 이야기도 나눴어요.

Q. 수현이 활동가로 성장하는 걸 단체가 함께 고민해 준다는 대목이 인상 깊어요.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대구여성노동자회에서 일을 시작해서 다른 사회생활 경험이 없어요. 저 스스로도 성장에 대한 목마름이 있고, 단체에서도 걱정하셨던 것 같아요.

마침 지난해에 좋은 기회가 생겨서 서울에 있는 한국여성노동자회에서 3개월 활동을 했어요. 지난해 3월부터 5월까지, 3개월간 파견근무 형태로 다녀왔어요. 짧지만 다른 단체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또래 활동가들은 어떤 고민을 하며 무엇을 공부하는지 탐색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Q. 단체에서도 엄청난 결단이었을 것 같은데요.

맞아요. 운도 좋았죠. 급여는 대구여성노동자회에서 지원받았고 마침 서울에 친오빠가 살고 있어서 머물 곳에 대한 걱정을 덜었어요. 사회적협동조합 ‘동행’에서 청년활동가 안전지원망 사업에 선정돼서 활동비 300만 원을 지원받기도 했어요. 덕분에 한국여성노동자회에서 일하는 것과 별개로 수도권 지역 여성노동자회를 돌아다니며 활동가들을 만나고 인터뷰하기도 했어요.

Q. 서울 한국여성노동자회에선 어떤 일을 맡았나요?

선배 활동가들이 배려를 많이 해주셨어요. 일부러 바쁜 시기를 골라 보내주셨거든요. 감사하면서도 최대한 많은 걸 배워 가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죠. 그 부담만큼 열심히 빨빨거리면서 돌아다녔어요. 서울에서 열린 3.8 여성대회에서 행진 사회를 보거나, 국회 토론회에 패널로 나가는 등 닿은 기회는 전부 잡았어요. 손을 벌벌 떨다가도 해내고 나니 ‘대구에서도 이정돈 충분히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죠.

서울의 활동은 확실히 다르더라고요. 몇만 명이 모인 집회를 처음 가봤어요. 심지어 그 앞에서 사회를 보려니 말 그대로 눈앞이 하얘졌죠. ‘이 앞에서 유창하게 말할 수 있는 담대함이 나에겐 없다’고 생각했지만 어쨌든 했어요. ‘선배들이 이 경험을 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지금은 생각해요.

국회 토론회에 패널로 참여해서도 많은 걸 느꼈어요. 토론회에서 발제를 맡는 것도 처음인데 심지어 국회에서 열린다니, 공부를 많이 했는데도 떨렸죠. 지역 청년들의 노동 현실에 대한 토론회였고, 대구의 여성 청년이 처한 노동 현실에 대한 발제를 맡았어요. 2021년 여성노동자회에서 진행한 ‘90년대생 여성노동자 실태조사’ 중 대구 지역 통계를 뽑아서 추가로 조사한 내용을 소개했죠. 활동을 널리 알리는 방법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어요.

▲수현은 지난해 서울여성노동자회에서 3개월간 근무할 당시 3.8여성대회 사회를 봤다. (사진=김수현 제공)

Q. 서울과 대구의 무엇이 가장 다르다고 느꼈나요?

‘청년활동가는 다 서울에 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서울은 집회든 모임이든 가는 곳마다 또래가 많았어요. 대구는 활동가 수 자체도 적을뿐더러 젊은 활동가가 특히 적잖아요. 서울은 젊음의 에너지와 거기에서 파생되는 미래에 대한 고민, 변화를 도모하는 힘이 크다고 느꼈어요. 한편으론 아쉽고, 그럼에도 더 열심히 해야 겠다고 다짐했죠.

#단체의 미래를 고민하다

Q. 현재 가장 큰 고민이 뭔가요?

아무래도 단체의 재정문제가 가장 걱정이죠. 고용노동부에서 지원받아 진행하던 민간고용평등상담실이 올해부터 폐지됐어요. 인건비 일부 지원이 사라진 게 가장 큰 일이죠. 작년엔 단체에서 계속 일할 수 있을지 불안하기도 했어요. 그래도 활동가들이 함께 ‘회원 확대 사업을 통해 지금의 세 명 구조를 유지하자’는 결단을 내렸어요.

한편으론 지난해 상담실 폐지 움직임에 대응하면서 이때까지 해온 활동이 이렇게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간의 활동을 정리하고 다른 지역 단체들과 서로 위로하고 다독이면서요. 피해자 지원 활동의 역사를 보면서 자부심도 가졌고요. 고용평등상담실은 폐지됐지만 여성노동자회에서는 기존에 운영하던 ‘평등의전화’를 통해 상담을 이어가요. 전국의 여성단체들이 회원 확대 사업 등으로 투쟁을 계속하는 거죠.

단체의 재정을 고민하는 게 때론 속이 상하기도 해요. 내 선택이니 각오는 했지만 ‘지금보단 좀 더 안정적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어쩔 수 없이 들어요. 재정구조가 안정적이면 또래 활동가들의 유입도 더 많아질 것 같은데, 뚜렷한 방법은 안 보이죠.

Q. 선배 활동가나 회원들 사이에서 세대차를 느낄 때는 없나요?

많죠. 대구여성노동자회 회원 연령대는 ‘40대가 젊은 편’이라고 말할 정도로 높은 편이에요. 처음 활동을 시작했을 땐 50, 60대 회원들과 공통의 대화 소재가 없다는 점이 어려웠어요. 지금은 좀 자연스러워졌지만 그럼에도 활동과 단체의 지속성을 위해 젊은 연령층 상대로 회원을 확대할 수 있는 방안은 여전히 고민이에요. ‘페미하는 노동니즘’ 소모임을 계속 운영하는 것도 그런 이유죠. ‘청년을 여성노동자회와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을까’, ‘관심 있는 주제와 수단이 뭘까’ 계속해서 찾고 있어요.

선배 활동가나 회원들과 교류를 통해 얻는 것도 많아요. 지금보다 엄혹했던 시기에 대해 듣게 되거든요. 그때 당연했던 게 지금은 당연하지 않은 부분에 대한 간극을 느끼기도 하고요. ‘예전의 노동운동과 비교하면 지금 난 포시럽게 활동하고 있구나’라는 생각, ‘간극을 좁히는 게 앞으로의 활동 과제겠구나’라는 생각을 동시에 해요.

Q. 기존에 해오던 것을 벗어나 새롭게 시도한 게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인턴 시절에 랩으로 영상을 만들었어요. 마침 친오빠가 랩을 열심히 하던 시기였거든요. 소모임에서 ‘직장내 성차별 문화 실태조사’를 통해 설문조사를 진행하고, 거기에서 나온 답변을 바탕으로 랩을 만들어 타이포그래피 동영상으로 제작했어요. ‘소리 내기 위한 스피커’라는 제목의 영상이죠.

그때부터 다양한 접근방법에 대해 고민했던 것 같아요. 최근에는 인스타툰으로 연결해 보고 있어요. 각자의 조직 내 차별 경험을 인스타툰으로 만들어 게재하고 지난해에는 전시까지 진행했어요. 접근방식을 다양하게 함으로써 조금씩이나마 연령대 폭도 넓어진다고 느껴요.

▲대구여성노동자회 1층 카페에는 지난해 진행한 인스타툰 전시에 사용된 작업물이 전시돼 있다.

#단체와 나의 성장에 대해 생각하다

Q. 접근방식을 다양하게 하는 것만으론 한계가 있을 것 같아요.

청년세대 조직화가 점점 어려워진다고 많이들 이야기하잖아요. 대학 안팎으로 구심점이 될 만한 공동체도 눈에 띄게 없어졌다고 느껴요. 코로나 팬데믹 이후 오프라인으로 안 나오려는 경향도 보이죠. 이런 분위기를 반영해 온라인 모임을 만든다거나, 오프라인만의 강점을 강조하는 등 방법을 고민하는데 쉽진 않아요.

Q. 이제 햇수로 4년 차 활동가네요.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이 있다면요?

2021년도에 100여 년간 대구 지역 여성 노동운동의 역사를 정리하는 사진전을 기획했어요. 예전에 활동했던 선배들을 한분 한분 찾아가 인터뷰 했어요. 영상을 직접 편집하고 전시까지 했는데 그걸 준비했던 시간이 강렬하게 남은 것 같아요. 편집을 하면서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염색 공단의 여성노동자, 영대병원 투쟁 등의 이야기가 담겼어요. 일터에서의 투쟁이 아니어도 각자의 삶에서 엄청난 투쟁을 해 온 이야기를 들으며 고마움, 감동, 반성 등 복잡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이 내용을 기반으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보고 싶은 마음도 생겼고요.

Q. 연차가 쌓이면서 생긴 고민도 있나요?

전문성에 대한 고민이 조금씩 늘어나는 것 같아요. 대구여성노동자회는 기본적으로 상담을 하는 단체니까 노동법, 페미니즘 공부를 꾸준히 해야 하거든요. 대학원 진학이나 학습에 대한 고민을 항상 해요. 일단 올해는 사무국장을 맡았으니, 업무 전반에 대해 파악하고 순발력을 기르고 싶어요.

Q. 총선을 앞두고 다뤄지는 젠더 이슈 전반에 대해서도 묻고 싶어요. 여성가족부 폐지나 게임업계 젠더 갈등 등 여러 현안도 있죠.

정희진 여성학자의 신간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에는 페미니즘이 새로운 레드콤플렉스가 됐다는 해석이 나와요. 선거 때마다 이야기되는 주적이 북한에서 여성으로 옮겨갔다는 거죠.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과 남성 간 앎의 격차가 커졌지만 남성은 오히려 이 변화를 기피하고 있다는 설명도 해요. 실제 대부분의 여성이 페미니즘에 대해 알게 됐지만 변화하지 않는 현실에서 무기력함을 느끼게 된 것 같아요. 몇 년 전과 비교해 여성들이 페미니즘 강의에 찾아오는 비율이 현저히 줄었거든요.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으로도 보지만 무기력함의 영향도 있어 보여요.

다만 오프라인과 달리 온라인에서의 움직임은 여전히 활발해요. 지난해 상담실 폐지 반대를 위해 ‘카카오 같이가치 모금’을 열었을 때 48시간 만에 전국에서 2만 명 가까운 이들이 기부금을 보냈거든요. 그때 페미니즘에 새로운 동력이 필요하다는 것, 운동의 흐름은 계속 변화하고 거기에 발맞춰 따라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단체에서도 회원들과 총선에 대해 가볍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자리를 자주 만들려고 해요,

Q. 올해 가장 중점적으로 계획한 일은 뭔가요?

지속가능한 활동을 위한 회원 확대 사업이에요. 3월부터 ‘성평등노동을 구하는 119’라는 타이틀로 후원회원 119명을 모집하고 있어요. 청년 대상 사업도 계속 이어나갈 예정입니다. 지난 2년 간 청년 여성노동자들과 진행한 인스타툰 작업물을 모아 올해 중 책을 발간할 계획이 있어요. 우울감을 느끼는 청년여성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심리상담도 지원할 거고요.

전국적으로 성평등임금공시제 시행을 위한 조례 제정 움직임이 있는데, 대구는 논의 자체가 이뤄지지 않고 있어요. 성평등정책 전담 부서나 관련 의제에 관심있는 지역 정치인도 없어서 공론화부터가 쉽지 않죠. 이런 상황이기에 대구여성노동자회 역할이 중요하다고 봐요. 지역의 노동사안을 발굴하고 더 많은 이가 노동 경험을 나눌 수 있는 창구가 될 수 있도록, 올해도 열심히 가보려 합니다.

김보현 기자
bh@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