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의 플라톤 추방] 「서울로 가는 전봉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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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운동이다. 시는 굳어진 모든 것, 고정된 것의 반대말이다. 시는 모든 물질의 속성이고, 세계의 속성이며, 역사의 속성이다. 시는 운동을 짚어내고, 전진시킨다. 안도현의 첫 시집『서울로 가는 전봉준』(민음사,1985)은 얼핏 보기에 그런 운동으로 가득하다. “살얼음아, 눕지 말고 가자/ 겨울 온다/ 어서 가자 그리움 밖으로”(「허수아비가 되어」), “흐른다 흘러/ 흐르다가 발 닿는 어디”(「유민(流民)」), “가리야/ 가리야/ 지금 여기 풀밭에는 앉지 못하리야”(「행군」)

안도현의 운동은 대부분 ‘가다’ 동사에 의지한다. 그 조짐은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자 이 시집의 표제작「서울로 가는 전봉준」에서부터 나타난다. 첫 연을 보자. “눈 내리는 만경 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 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1980년대 ‘대학생 문예’의 대미를 장식하는 이 작품을 온전히 감상하기 위해서는 이 시의 마지막 연까지 눈여겨 봐야 한다. “들꽃들아/ 그날이 오면 닭 울 때/ 흰 무명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최남선의 신체시 1호 <해에게서 소년에게>(1908)는 파도소리를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콱”으로밖에는 재생하지 못했지만, 안도현이 시는 봉기를 일으킨 동학군의 구호 척왜척화(斥倭斥和)를 강물소리의 의성어로 사용하는 세련의 극치를 보여준다.

시인의 운동은 “너무 그리워서 먼 나라로 가고 싶다”(「오랑캐꽃 피기 사흘 전에」)라고 간구했던 ‘먼 나라’로, “한 공화국”(「비 내리는 군대」)으로, “부족이 국가”(「울타리에 대하여」)로 자라나는 곳으로 움직인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남북이 통일되어 한 나라를 이룰 “그날”(「봉선화」ㆍ「젊은 북한 시인에게 1」)이 시인의 시심을 격동시킨다. “잔치 잔치 무슨 잔치 밥 잔치 벌인다고/ 이북쌀과 이남쌀 신랑 각시 되어 합친 몸/ 눈물겨워라 동네방네 기별하여 축하해주는 날/ 이뻐라 그것들 반반씩 안쳐 지은 우리나라 밥/ 한 그릇 같이 먹는 날”(「밥 1」) 통일에 대한 염원은 이 시집 곳곳을 장식했는데, 분단과 통일을 소재주의로 써먹은 여기까지가, 대학생이 쓰고 대학생이 향유한 1980년대 대학문예가 진보적일 수 있었던 한계치였다.

흔히 1980년대를 민중문화와 민중시의 시대였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민중문화 행세를 했던 탈춤이나 마당굿, 그리고 민중시를 참칭했던 당대의 시는 모두 ‘대학문화’의 일종이었지(왜냐하면 통기타와 맥주라는 또 다른 대학문화도 있었으니까), 그 시대의 민중과는 무관하게 번성했다. 예컨대 ‘창비시선’의 초석이면서, 안도현이「변방에서」나「화투놀이」에서 흉내를 내기도 했던 신경림의『농무』(창작과비평사,1975)를 어느 농민이 읽었으랴? 다 그 시대의 지식인과 대학생들이 돌려가며 읽었을 따름이다. 그 시대의 지식인 문학은 물론이고 대학생 문예는 기껏해야 ‘민중’의 가위눌린 꿈을 대신 꾸어줄 뿐이었는데, 지식인으로 이루어진 전문 문학인과 대학생 문사들이 토템으로 모신 민중은 그 형체가 모호했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에 수록된 어느 시에 “노동이 비로소 꿈이 되는 것을 보라”(「만경평야의 먼 불빛들」)라는 한 구절이 비수처럼 번뜩였는데, 기실 그것은 추상적이기 짝이 없었다. 저 구절은 민중 스스로 민중의 꿈과 실천을 표명하게 될, 도래할 ‘노동자 대투쟁’ 시대에 대한 알리바이 이상이 아니었다. 난숙했던 1980년대 대학생 문예는 안도현의 신춘문예 당선작에서 절정을 보았고, 그가 등단한 해에 박노해의『노동의 새벽』(풀빛,1984)이 나오면서, ‘1980년대’의 대학생 문예는 막을 내렸다.

박노해에 의해 1980년대의 대학생 문예는 느닷없이 폐업을 당했지만, 안도현이 빚은 절정은 정일근의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유배지에서 보낸 정약용의 편지」와 같은 낙곡(落穀: 추수가 끝난 들판에 떨어진 곡식의 낟알)을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