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054] ‘불수리클럽’이라는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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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날 때마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보여주는 친구가 있다. 친구 이름은 ‘나루’, 신분증에 적힌 이름은 아니지만 아무렴 어떠랴. 대구 곳곳의 비건 식당, 계절마다 선물하기 좋은 꽃의 종류, 돌봄을 고민할 때 읽으면 좋은 책 같은 걸 그에게 배웠다. 이름 뒤에 붙이는 호칭보다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도 배웠다.

얼마 전 만난 나루가 “결혼했다”는 폭탄선언을 던졌다. ‘결혼식을 한 걸까? 둘 다 드레스를 입었을까? 아니, 그보다 두 사람은 혼인신고를 못 할 텐데? 나도 모르는 새 법이 개정됐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넣어두고 일단 “축하한다”는 말을 꺼냈다. 놀란 표정을 감추려 했는데,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반려된 반려>라는 제목의 뉴스레터를 시작했다는 소식도 전했다. 뉴스레터 소개에는 이렇게 적혔다. ‘인생의 반려(伴侶)가 되려 했지만, 200원에 반려(返戾)된 여자들의 함께 사는 이야기’. 배경 이미지로는 대구광역시 북구청장 도장이 찍힌 불수리 증명서가 사용됐다. ‘사건명 혼인신고, 불수리 연월일 2024년 3월 7일’이라고 적힌, 공공기관에서 뗀 서류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혼인신고는 반려됐지만 덕분에 기가 막힌 제목이 나왔는걸” 나루의 설명을 듣곤 진심으로 말했다. 신혼일기 제목으로 더할 나위 없다고 생각했다.

3월 28일 발송된 첫 번째 뉴스레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화장실 이야기다. 레즈비언 커플은 화장실에 같이 들어갈 수 있다는 걸 난 생각해 본 적 없다. 나루는 그걸 ‘지정 성별이 같다는 게 가져다주는 작은 재미 중 하나’라고 표현했다. 서로가 알고 있는 화장실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는 대목에선 부러웠다. 여성들이 화장실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는 안전, 생리, 수유 등 여러 이유가 있는데 그걸 나눌 수 있다니. 집 밖 화장실을 사용하는 게 미션이라고 느끼는 나도 여러 문장에 공감하며 밑줄을 그었다.

이 멋진 신혼부부는 혼인신고서 내러 가는 날을 영상으로도 담았는데 유튜브 채널명은 ‘불수리클럽’, 첫 영상 제목은 ‘머구에서 혼인신고한 레즈비언 커플’이다. 10분 남짓한 영상을 숨죽이고 따라갔다. 남해에서 언약식 하는 장면에서 미소를 지었다가 북구청 공무원 앞에 서서 혼인신고를 하는 장면에선 손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했다. 부부는 영상 소개에 이렇게 적었다. “저희가 이렇게 구청에 가서 혼인신고를 하기까지 길을 닦아 주신 많은 활동가분들과 퀴어 부부들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불수리클럽으로 함께 하고 싶은 분들은 연락 주세요. 모이면 무언가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댓글에는 ‘구청 직원분이 일처리가 깔끔하시네요. 저희도 북구청으로 갈까 봐요’, ‘불수리를 위한 용기조차 낼 수 없는 많은 이에게도 조금씩의 용기를 불어넣어 줄 것 같아요’, ‘붉디 붉고 자주 가던 대구라서 더 인상 깊네요’, ‘대구에서 선례 만들어주시고 과정 공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등 응원하는 마음과 위로받은 마음이 모이고 있다. 함께 하는 마음들이 더 모이면 무엇이 바뀔지 상상해 본다. 다양한 관계의 모습이 그 자체로 인정받는 날의 편안한 밤을 상상해 본다.

▲불수리클럽 유튜브 채널의 ‘머구에서 혼인신고한 레즈비언 커플’ 영상 중 한 장면. (사진=유튜브 화면 캡처)

김보현 기자
bh@newsmin.co.kr